21화
3. 엇갈린 시간
단장실에서 나와 기사단 점호를 마치고 취침 시간. 자리에 눕자마자 오만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빠르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이대로 기사 서임을 받은 직후, 황제 폐하의 의도대로 그의 기사단 배치가 누락 되어 소속이 붕 뜨게 된다.
그리고 그때 마론 백작에게 황제의 명령서(그때는 사냥 대회 이후 황제가 돌아가셔서 유언장이 되어 버렸지만)를 전해 받는다. 그는 황후의 뒷조사를 명령받고 극비 임무를 수행하게 될 터였다.
그러다가 마론 백작까지 죽은 뒤에는 에오넬 황제가 그의 기사단 배치 누락 서류를 손본 뒤 아멜리아 황녀의 호위로 배치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거냐, 대체.’
뒤척거리느라 잠이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더욱 선명하게 들려온다. 고민해 봐야 해결될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해결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내일 섀도 나이트 쪽에서 폐하의 명령이 내려오겠지. 잠이나 자자.’
그렇게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슬그머니 눈을 떠졌다.
또 그 꿈이다. 지난 과거의 꿈. 하지만 기억하는 과거와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꿈속에서 아멜리아 황녀가 나왔다. 냉궁에서 제대로 된 시녀도 없이 그녀와 단둘이 생활하던 그때. 원래의 시녀들이 모두 볼테르에 의해 바뀌었다. 새로 오게 된 시녀들은 불손했고 근무 중 자리 이탈은 밥 먹듯 했다. 그냥 없다고 봐야 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녀와 단둘이 있을 수 있던 그 시간이 그 힘들었던 와중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일개 호위기사가 감히 황녀께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아렸지만 그걸 의식하면 할수록 더욱 감정이 또렷해졌다.
그날, 그녀에게 사약이 내려지던 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사실은 연모했었노라고 그리 말했다면 그녀는 나를 경멸했을까.
주저하는 사이 황녀는 사약을 마셨다. 쓰러지는 그녀를 꼭 끌어안자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오랫동안 숨겨 왔던 시간의 신의 성물, 눈알이 한쪽 남은 돌고래 단검을 꺼냈다.
‘저는 바꿀 수 없었지만, 황녀님께서는 많은 것을 바꾸실 수 있겠지요.’
“부디 소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이 충정을 가장했던 불순한 마음까지도 전부……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목에 꽂힌 단검에서 빛이 났다. 눈이 부셨다.
번쩍!
눈이 뜨이며 상체가 저절로 벌떡 일어났다. 침대에는 땀이 흥건하다. 함께 방을 쓰는 동료 기사의 코 고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그를 현실로 이끌었다.
‘아, 내가 그녀를 죽였었구나.’
그러니까 지금이 두 번째 삶이 아니라 세 번째 삶이었던 거다.
‘내가 한번 실패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어.’
그렇게 찾아 헤매던 돌고래 단검이 그 산속에 없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미래는 아멜리아 황녀가 바꾸고 있었다. 그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녀는 손쉽게 해내고 있었다.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그녀가 해내고 있는 것을 깨닫고 나자 스스로가 몹시도 초라해졌다.
‘내가 무능력했어.’
“하아, 하아…….”
숨이 몹시 가쁘다. 가슴이 타들어 갈 것만 같다. 문득 아멜리아 황손녀에게 불려가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내 호위기사가 되어라.”
그녀가 그를 기억하고 찾아낸 것이었다. 숨이 턱 막힐 것만 같다. 그녀에게 용서받은 것만 같다. 다시 그녀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이번에는 영원히 지켜 줄 수 있다고 맹세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이성이 그를 억눌렀다.
지금 상태로는 겨우 억누르고 있는 이 마음을 통제할 자신이 없다. 눈치 빠른 키옌 황후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귀족들이 미혼 영애를 골로 보내 버리는 수법 중에서 호위기사와 염문설을 조작하는 방법은 매우 흔하고, 대개 확실한 효과를 보장한다.
그러니 그녀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이 맞다. 적어도 이 감정을 시간이 해결해 줄 때까지만. 그녀가 눈앞에 없다면, 언젠가 이 감정도 빛이 바랠 것 같다. 그때는 괜찮을 거다.
이불을 쥔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여전히 숨이 찼다. 옆으로 돌아누워 벽을 바라보다 아예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으읏.”
심장이 조각조각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밤이었다.
***
내가 고모님의 양녀가 되는 서류는 속속 준비되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 후면 그 작업이 끝난다. 그리고 나는 서류상으로도 정식으로 황태손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날의 행사를 위한 작업이 속속 진행되고 있었다.
아침에 드레스숍에서 고모님과 함께 맞춰 둔 드레스와 액세서리가 도착했다. 시녀들은 꼼꼼하게 상품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머, 이 색감 좀 보셔요! 너무 예뻐요.”
“응! 예뻐!”
나는 유모에게 빗질을 받으며 활짝 웃었다.
“꺄악! 너무 귀여워!”
“어허! 저하께 말버릇이……!”
잔느가 시녀들을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 나는 황급히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진짜? 진짜로 멜리 귀여워? 까르르르!”
그러자 잔느도 시녀들을 혼내려다 말았다. 그렇게 그녀들이 내 옆에서 행복해할 때마다 조금씩 그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덜어 내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숙부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혀가 잘렸고 누군가는 황실 물건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손목이 잘렸다. 누군가는 숙부를 노려보았다고 눈이 파였다.
그녀들 모두가 나를 지키다 그렇게 됐었다.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내가 너희들을 지켜 줄게.’
그때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들어와.”
방 안으로 들어온 건 내 외할아버지댁, 세르피스 후작저로 심부름을 나갔던 시녀였다. 그 뒤로 하녀복을 입은 여자가 한 명 더 따라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심한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나는 그 하녀와 유모, 잔느만 남긴 채 모두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들이 문을 닫고 물러난 것을 확인한 잔느가 하녀에게 명령했다.
“얼굴을 벗어라.”
그 하녀가 자신의 턱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얼굴 가죽을 들어 올렸다. 돼지 껍데기를 태워 정교하게 만들어진 화상 자국 가면 아래로 매끈하고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마리라고 했던가? 황후궁의 옷방 시녀로 있었다지?”
“아, 아.”
그녀가 나오지 않는 발음을 억지로 짜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할아버지, 아니, 후작님께 이야기 들어서 알겠지만 이제 너는 서류상으로 죽은 사람이다. 더는 귀족이 아니며 앞으로 네 이름은 메리다. 너는 오늘 내 드레스룸과 옷감 창고의 청소를 하게 될 하녀로 난생처음 입궁했다.”
마리, 아니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은 멀쩡하니 글씨 연습을 해둬. 그리고 황후 마마에 대해 의심스럽거나 생각나는 점이 있다면 뭐라도 좋아. 그에 대해 할 말이 있거든 내 드레스룸을 청소할 때 내 잠옷 어깨끈에 이 리본을 묶어. 그럼 내가 자기 전에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메리를 내보내고 나는 다가오는 행사 일정, 특히 기사들의 검술 시합에 관한 것들을 확인했다.
그때 잔느가 물었다.
“저자를 믿을 수 있을까요?”
“못 믿을 건 뭐야? 내가 저 시녀였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황후에게 복수할 거야. 내게 충성을 바치지 않아도 괜찮아.”
“저하를 배신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도 있어요.”
“저 여자는 나를 배신하지 못해. 자살로 위장까지 해서 궁에 다시 들어온 걸 황후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든 들키는 날에는 진짜로 죽을 테니까. 무언가를 기억해 내면 적당한 때 적당한 날을 골라 적당히 터뜨려 줄 거야.”
내 말이 끝나자 유모는 ‘여덟 살이 아니야…….’를 중얼거리며 빗질이 끝난 머리를 땋아서 시원하게 틀어 올려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잔느와 나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목숨을 부지한 것에만 감사하며 이곳에서 적당히 안주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하께서는 위험부담만 떠안으신 채로 얻는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저 여자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놓친 것을 기억해 낼 거다. 그래야 황제를 실수로 죽일 뻔했다는 누명을 쓴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볼모지. 더불어 누명을 벗게 되면 황실로부터 명예훼손에 대한 보상금을 크게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날 배신할 수 있겠어?”
이 문제는 그럼 끝났고. 나는 내 호위기사를 되찾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나는 어제 이번 검술 시합의 참가자 명단을 입수했다. 잔느가 어디선가 참가자 명단을 용케도 구해 왔는데 내게 필요한 건 견습 기사부의 출전자 명단뿐이라 나머지는 전부 테이블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참가했군.’
가서 교육 담당에게 대놓고 저 녀석 준비시키라고 말했는데, 아마 강제로라도 내보낸 걸 거다. 제 발로 이런 곳에서 자신을 드러낼 녀석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
아멜리아가 즐거운 상상을 하며 행복에 잠겨 있던 그 시각, 그 할아버지인 황제는 고민에 휩싸였다.
“아…… 이거 어쩌지?”
황제가 손톱 끝으로 책상을 톡톡 부딪쳤다. 마론 백작이 그런 황제 앞에 뜨거운 생강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게 누군지는 알아보고 해주겠다고 하셨어야죠. 대뜸 호위기사 선발 대회부터 열자! 이러시니 이 사달이 났죠.”
“아니, 나는 하고많은 놈 중 하필 걔일 줄은 몰랐지.”
황제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전 와이번 잡은 견습이라는 소리 들었을 때 예상했습니다.”
“그럼 말해 줬어야지!”
“제가 누군지 알아보자고 했는데 그냥 밀고 나가셨잖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섀도 나이트 쪽으로 다시 부를까요?”
“그냥 적당히 예선에서 탈락하라고 해야 하나?”
마론 백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녀석은 황명이라고 해도 그렇게는 안 할 겁니다.”
황명이라고 불구덩이로 뛰어들라면 뛰어들 놈이지만 일부러 대련에서 지라고 한다면 절대로 적당히 질 위인이 아니다. 어린 게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대진표라도 조작 좀 해봐.”
“아니, 모든 기사단에 소속된 견습들을 통틀어도 원탑입니다. 대진표를 조작해서 대체 누구랑 붙일 건데요? 어지간한 진짜 기사들보다 실력이 좋은 애라고요. 애초에 섀도 나이트 출신을 꼬맹이 견습 기사들이 어떻게 이깁니까?”
“얘도 꼬맹이잖아!”
“저더러 뭘 어쩌라고요! 해결책 드렸잖습니까? 섀도 나이트로 다시 부르라고요. 어차피 서류상으로 평민이라 애 하나쯤 없어지는 거 금방 수습됩니다. 골치는 좀 아프겠지만.”
마론 백작이 투덜거렸다. 황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백작 말대로 해야 하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은 하고많은 기사 중에서도 하필이면 이놈을 달라고 조른다.
“내 손녀지만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이 할애비가 찜한 놈을 달라고 조르다니.”
“손녀 자랑은 그만하세요. 그래서 귀환하라고 명령합니까, 맙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황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연무장에서 혼자 연습하던 중 부상이 좋겠어.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하면 딱이겠지.”
“황손녀께서 슬퍼하시겠군요.”
“어쩔 수 없지. 어린애라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금방 흥미를 잃을 게야. 복귀시켜. 쯧, 견습 기사단 졸업시켜서 기사 작위라도 쥐여 주려고 했는데. 3년 후에 녀석에게 황후의 뒷조사를 시킬 거니 차근차근 준비해 둬.”
“지금 안 시키고요?”
“황후의 불륜을 조사하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지 않냐? 너는 양심이라는 게 있느냐?”
오늘도 황제와 마론 백작은 투닥투닥 잘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