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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20화 (20/148)

20화

나는 한껏 웃으며 말했다. 유모의 말처럼 내가 황제의 금지옥엽, 유일한 황실의 적통 황손인데 욕심 좀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황궁 한복판, 중신들 보는 앞에서 할바마마한테 아르의 얼굴이 좀 반반히 잘생긴 데다 철없는 황손녀에게는 평민 기사라는 것이 신기하니 나 좀 달라고 떼를 쓰면 내가 원하는 바를 가장 탈 없이(?)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지난 생에서 할바마마가 직접 선발해서 내게 붙인 호위기사님들은 기사단에서 실력도 인망도 두터웠지만, 황실에서 오랜 세월 일하며 검증(?)이 완료된 분들인 만큼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들이었다. 한마디로 재미없고 고지식했다.

그러니까 나도 할바마마나 고모님처럼 내 호위기사를 내가 뽑겠다고 고집을 좀 부려 봐야지. 할바마마가 손수 뽑아 보낼 수염 덥수룩한 기사님들은 재미없다고 어리광도 좀 부리고. 그러면 어른을 따라 하고 싶은 어린애 심리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반드시 내가 조금이라도 철이 들 나이가 되기 전에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 오직 이 나이에만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짓거리였다.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며칠을 준비한 끝에 마련한 자리에서 내 계획은 의외의 곳에서 장벽에 가로막혔다.

“싫습니다.”

당사자인 아르가 단칼에 이 엄청난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한 거였다.

나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이 어마어마한 스카우트 제의가 대체 왜 싫어?

너 이거 거절하면 앞으로 평생! 영원히! 아무도 안 사는 황궁 구석 빈 별궁 근처에서 담벼락 지키는 4조 3교대만 서야 할지도 모른다고!

이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다. 그가 지난 삶에서 내 호위기사가 되기 전까지 했던 일이었다.

“왜?”

“제 실력에 과분한 이유 없는 승진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황당해하자 그는 슬쩍 내 눈을 피했다.

나도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아서 잠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게 서류를 숨겨 둔 상자가 있는 방향으로 눈길이 갔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그게 공평하지 않다고 거절할 거였으면 서류를 그따위로 세탁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서류가 아주 깨끗하던데 마치 누가 뒤를 봐주는 것처럼.”

“…….”

“원하는 대로 공평하게 견습 기사 선발 비리 감사를 해봐?”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협박을 하며 나는 그가 내심 내 입안의 혀처럼 굴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권력에 굴하지 않는 아르의 대쪽 같은 성품이었다.

“황녀님께는 황실 기사단 감사실을 움직이실 권한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응?”

황녀? 그에게서 듣는 황녀님 소리가 몹시도 익숙하여 순간적으로 놓칠 뻔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이 빨라서 내가 잘못 들었겠거니 해버렸다.

네 이놈을 전생의 빚이고 뭐고 알 게 뭐람. 어차피 얘는 모르는데!

“그럼 너는 서류를 세탁할 권한이 있는 귀족이랑 손 붙잡고 들어왔니!”

내가 소리를 빽 지르자 그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가 슬며시 내렸다.

“화가 많이 나셨나 봅니다. 그럼 호위기사 제안은 없었던 것으로 하시는 겁니까? 설마 저처럼 위아래 없는 놈을 호위기사로 쓸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는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일어나 형식적이고도 완벽하게 예를 갖추고는 쌩하니 떠나 버렸다.

목표가 바뀌었다. 저걸 내 호위기사로 들여 보은할 것이 아니라 기필코 참교육을 하고 말리라!

***

아르가 나가고 유모와 잔느가 들어왔다.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대체 무슨 대화를 한 거예요?”

나는 대답 대신 입만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런 내 등을 유모가 토닥였다.

“저하. 사람의 마음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알고 있어.”

“다짜고짜 너, 내 호위기사가 되어라! 뭐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건 아니시죠?”

뜨끔!

“그런 얘기 한 거 아니야!”

“흐흥~ 그렇단 말이죠? 그래요. 후훗.”

정말 인생을 다시 살아도 유모는 당할 수가 없다.

게다가 유모의 말에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르와는 아직 이번 생에서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

지난 삶에서처럼 좀 더 자연스럽게 만났어야 했나?

내가 고민의 굴레에 빠져들 즈음 유모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나저나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신 건 생각해 보셨나요?”

“아! 맞다.”

고모님이 황태녀로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다져 놓자 할바마마는 나를 고모님의 양녀로 입적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하셨다. 내게 다시 황태손의 지위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절차가 끝나면 온 제국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그에 합당한 행사를 열게 마련이다.

할바마마는 내게 열고 싶은 축제가 있느냐고 물어보셨었다.

“아니, 그보다 호위기사를 뽑아 달라고 할까.”

“역시 호위기사 제의했다가 거절당하신 거였군요.”

“아니라니까!”

“그래요. 알았어요.”

유모가 나를 놀리는 것에 재미가 들린 것이 틀림없다. 유모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차라리 황실 기사단에서 검술대회를 열어 달라고 하세요.”

“웬 검술대회?”

내가 반문하자 테이블 위의 찻잔을 치우던 잔느가 대답했다.

“평민 출신이 어린 나이에 황실 기사단에 들어왔다는 것부터 이미 재능과 실력은 검증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분명 두각을 나타낼 거예요.”

“아! 그거 괜찮다.”

“명분이 생겼으니 원하시는 바를 이루기 훨씬 편할 겁니다.”

“좋아, 할바마마께 가자!”

***

할바마마의 집무실에 다다른 나는 그대로 달려가 할바마마의 품에 쏙 안겼다.

1단계. 일단 혀 짧은 소리로 애교를 잔뜩 부려 준다.

“하바마마! 하바마마!”

“오구오구. 우리 멜리가 왔어요?”

2단계. 눈웃음을 친다.

나는 눈꼬리를 살포시 접으면서 할바마마를 올려다보았다. 최대한 사랑스럽게 보이려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멜리가 소원이 있다요. 헤헤!”

“응? 소원? 말해 보아라. 이 할애비가 우리 애기 소원 다 들어주마.”

3단계. 달님에게 빌듯 소원을 빈다.

“축제를 열면 꼭 보고 싶은 게 생겼는데요. 기사들이 보고 싶어요. 그래서 멜리도 호위기사를 뽑을래요.”

내 호위기사는 겨우 셋이다. 나이 많은 아저씨 셋이 돌아가면서 호위를 한다. 황태손이 되면 어차피 호위기사는 더 뽑아야 할 거다.

“그니까 기사 뽑는 대회 해줘요.”

“오냐. 당연하지. 그럴 생각이었단다.”

“견습 기사님들도. 아저씨들은 멜리 무서워요.”

“어…… 견습 기사는 좀…….”

“히잉. 멜리 삐질 거예요.”

내가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고개를 피하며 울먹이자 할바마마는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대회를 안 열겠다는 게 아니라 호위기사로 아직 서임도 안 받은 애송이들은 좀…….”

그때 유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난 사냥 대회 때 저하를 구해 주었던 견습 기사가 있다고 하는데 그를 호위로 두고 싶은 듯합니다.”

“그러냐? 누군지 아느냐? 그렇다면 상을 내려 줄 수는 있단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호. 위. 기. 사!”

“알겠다. 네 말대로 축제 때 검술 대회를 열어서 명분을 만들어 보마. 대신에 기회를 줘도 명분을 만들어 오지 못하면 취소하겠다.”

그렇게 나는 원하는 바를 얻어 냈다. 그리고 기사단 건물로 향했다.

***

기사단이 있는 건물은 황궁의 어느 건물들보다도 컸다. 기사들의 숙소도 숙소지만 연무장이 차지하는 면적이 어마어마했다. 정말 곳곳에 연무장이 있었다. 중간중간 어쩐 일인가 나를 쳐다보며 예를 갖추는 기사들을 몇몇 보았으나 누구도 나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 서임을 받기 전인 견습 기사들이 있는 교육장으로 직행했다. 안에 들어서자 우렁찬 기합이 들렸고 뽀얀 먼지가 날렸다.

나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궁둥이를 붙일 만한 곳을 찾아 걸터앉았다.

그러곤 도르륵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아르를 찾았다.

그때 나를 발견한 교육 담당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전체 동작 그만!”

“예!”

“차렷! 뒤돌아!”

기사들의 절도 있는 동작에 나는 나도 모르게 물개 박수를 쳤다.

“아멜리아 플라티나 체르무트 황손녀 저하시다! 경례. 체르무트 제국에 영광을!”

“제국에 영광을!”

견습 기사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장엄한 광경에 나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옆에 선 잔느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저하. 이럴 때는 이제 일어나라 명하셔야 합니다.”

“앗! 일어나. 하던 일 계속해요.”

하지만 내가 와서 그런지 때아닌 휴식시간이 시작되어 버렸다. 견습 기사들이 생수통 앞에 차례대로 서서 물을 마시는 동안 교육을 담당하는 기사가 내게 다가와 예를 갖추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나는 기사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가 이름을 물었다. 그의 가문까지 확인한 나는 그가 내 외가인 세르피스 후작가의 가신 가문 출신이라는 것까지 파악한 다음 안심하고 말했다.

“호위기사를 뽑을 거예요.”

“혹, 견습 중에서 원하셔서 그러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 대회 때 와이번 잡는 거 봤어요.”

기사는 견습생들을 쭉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녀석이죠? 기억하십니까? 누군지 특정하셨으니 수많은 견습 기사 교육장 중에서도 애매한 위치에 있는 이곳까지 오셨겠지요?”

“아르.”

나는 손가락을 들어 아르를 가리켰다. 내 쪽은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있던 그가 용케도 내 손짓을 알아채고는 움찔했다.

“호위로 쓰시는 데에 차질 없이 준비시키겠습니다.”

감히 황족의 스카우트 제의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교육장을 빠져나와 내 궁으로 돌아갔다.

***

낮에 황손녀가 다녀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기사단장실로 ‘조용히’ 불려 갔다.

‘돌겠네.’

대체 뭘 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그가 가진 힘으로는 과거를 바꾸기는커녕 하루하루 이 기사단 내에서 살아남기도 버거웠다.

대체 한 것이 뭐가 있다고 미래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바뀌어 간단 말인가.

아르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기사단장실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기사단장은 그를 위아래로 훑더니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그러나 바깥에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 너 와이번 잡았냐?”

“아, 그건 그러니까……. 예…….”

“오오, 짜식. 제법인데?”

기사단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도톰한 종이 뭉치를 들어 훌훌 넘겼다.

“견습 중에서 실력은 원탑이라더니, 와이번도 잡아? 흐음, 입단 서류가 부실한 걸 보면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 출신?”

황제 직속의 그림자 기사단. 매우 폐쇄적이며 존재 자체도 모르는 이가 더 많을 정도로 베일에 싸인 집단. 그 정체를 제대로 아는 이가 황제뿐인 그곳.

다른 기사들이라면 몰라도 기사단장급이라면 음모론으로 치부되고 있는 그곳이 사실은 실존한다는 것쯤을 알음알음 알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아르는 그냥 긍정했다.

“예.”

“아주 어릴 때부터 데려다 교육한다더니. 진짜였네. 아, 이런 거 함부로 말하면 그쪽에서 날 암살하려나?”

“그 정도는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어쨌든 폐하께서 목적이 있으니 너를 거기서 빼다가 여기에 꽂아 넣으셨겠지만, 황손께서 말씀하신 바로는 폐하께서도 어느 정도는 허락하신 모양이거든.”

문득 낮에 황손녀가 다녀간 일, 황손녀에게 불려 갔던 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골치가 지끈거렸다. 아직 그 돌고래 모양 단검도 찾지 못했는데 황손녀 호위가 되면 개인 시간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아나질 않게 된다.

“저하 호위 말입니까?”

“어? 알고 있었냐? 얘기가 빠르겠네. 너 황손녀 저하의 호위기사가 될 준비를 좀 해야겠다. 만약 섀도 나이트 쪽에서 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하더라도 일단 하려는 시늉이라도 해드려야겠어.”

어차피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위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했다. 고민할 필요도 심지어 고민할 권한도 없는 일이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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