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크로노스의…… 성물?”
“네. 뭐, 신화라는 게 그렇듯이 허무맹랑한 얘기긴 하죠. 헤헤헤.”
벨이 혀를 쏙 빼물며 웃었다.
“신화 속 그 성물이 어떻게 생겼을까?”
“아마 시계 모양이 아닐까요? 시간의 신의 상징은 뭐니 뭐니 해도 시계니까요. 고대의 화가들도 크로노스 신을 표현할 때는 모래시계를 그렸다잖아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는 머릿속에서 귀여운 돌고래를 그대로 지워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고래와 신화를 접목하면 별의 여신 말고는 떠오르지 않잖아? 별의 여신이 별들 사이를 오갈 때 타는 마차를 끄는 돌고래.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벨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그냥…… 유모 말처럼 내가 후회할 일을 한 것 같아서.”
“아까는 그런 일 한 거 아니라면서요.”
…….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자 유모가 벨의 등을 두드리며 주의를 환기했다.
“호호호! 저하가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러면서 벨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녀의 눈빛은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그 의미만큼은 확실히 전달되었다.
‘이런 눈치 없는 녀석 같으니! 그런 건 모르는 척해야지!’
벨이 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화들짝 놀랐다. 그러면서 저도 무안한지 슬며시 눈웃음을 쳤다.
“헤헤헤.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벨이 더 헛소리하기 전에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유모가 그녀를 내보냈다. 그러고는 하인들을 불러 방 안 벽난로에 불을 더 때도록 지시했다.
타닥타닥 발간 불이 예쁘게 탔다. 한참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유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하, 혹시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런가요?”
“아니.”
“그럼 갖고 싶은 것은요?”
“없어.”
며칠 전부터 계속 틈만 나면 그 단도를 쳐다봐서 그런가 머릿속에서 지난 삶의 일이 떠나질 않았다. 무엇보다 아르가 계속 생각이 났다. 요 며칠 꿈도 꾸지 않아 어쩐지 그리워지기도 했고.
그런 나를 유모가 부드럽게 나를 타일렀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저하,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그것이 나쁜 짓이 아니라면 다 하셔도 괜찮아요.”
나쁜 짓이 아니면 정말 다 해도 되는 걸까? 그런데 나쁘다는 기준이 대체 뭐지?
“저하는 욕심내도 괜찮고 이기적이어도 돼요. 황족이고 아직 어린애니까 얼마든지 욕심쟁이고 이기적이라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요.”
그 순간 나는 좀 더 이기적으로 살아남기로 했다.
“유모. 잔느를 불러 줘.”
***
간밤에 또 꿈을 꾸었다. 이상했다. 미래인지 과거인지 알 수 없다.
“돌겠네…….”
아르는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분명 겪은 일처럼 생생한 꿈이었다. 지나친 압박감 때문일까.
꿈속에서 그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다. 하지만 한낱 평민 출신 기사 따위가 정치적 판도를 바꿀 수는 없었다. 미래가 지난 삶과 똑같이 흘러갔다.
아멜리아 황녀는 볼테르 황제에게 사약을 받았고 그녀는 사약을 마셨다. 그가 지난 삶에서 황녀를 모시고 탈출을 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전개였지만 새드 엔딩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미래를 바꿀 기회를 이렇게 날려 버리게 되는 걸까?
“역시 무리였나? 지금이라도…….”
그의 머릿속에 크로이젠 공작이 떠올랐다. 아니, 아니다. 그쪽도 미래를 바꾸긴 힘들다. 차라리 지금 바로 아멜리아에게 접근해야 할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을라 치면 또 다른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꿈에서 깨면 이렇듯 늘 불안해졌다. 그 단도를 찾지 못해 이리 불안한 걸까?
아르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사냥 행사 때 황제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원래라면 그날 기사들을 이끌고 나갔어야 할 황제가 어쩐 일인지 행사장에 남았다. 대체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냥 행사 당일까지 그는 무력감 속에서 허덕였다. 그가 막을 수 있는 미래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지난 삶에서처럼 황궁의 수많은 기사 중 하나일 뿐이었다.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 알 게 뭐람. 어쨌든 미래가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지.
침대에서 일어난 아르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방에서 잠시 눈을 붙였으니 또 나가서 그걸 찾아야 했다.
그때였다.
똑똑똑!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생소했다. 그의 방에 이렇게 정중하게 노크를 하는 사람이 있던가? 보통은 밖에서 목소리로 바로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이 황성에서 그보다 높은 사람은 많아도 낮은 사람은 없으니까.
“누구십니까……?”
문을 열고 나간 그는 순간 얼어붙었다. 누구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문 앞에 선 자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멜리아 황손녀의 시녀. 그것도 그냥 시녀도 아니고 시녀장.
“황손녀 저하께서 찾으시네. 따라오게.”
***
마시멜로를 듬뿍 넣은 핫초코를 삼키며 한 손으로는 서류를 열심히 넘겼다.
황궁 견습 기사들의 신상 정보에 대한 서류였다. 외할아버님인 세르피스 후작을 통하여 입수했는데 그것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 외할아버님께는 호위기사를 갖고 싶어서 직접 찾아보려 한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그건 아예 거짓말도 아니었다.
외할아버님은 자신이 믿을 만한 이를 추천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내 손으로 뽑아 보고 싶다고 말하자 어른을 따라 해보고 싶은 어린애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신 건지 별말 않고 구해다 주셨다.
물론 내가 고집부린다고 해도 할바마마가 내가 대충 손가락으로 ‘쟤가 마음에 들어요!’ 하는 기사를 호위로 붙여 버리지 않을 거라는 건 외할아버님도 잘 알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인지 그저 허허 웃으며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거라며 놀리듯이 내 등을 토닥였었다.
조용한 방 안에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사락거렸다.
사르륵- 사륵-.
유모도 시녀들도 다 내보냈기 때문에 눈치를 보며 어린애처럼 행동할 것도 없었다. 빠르게 서류를 넘기다가 곧 원하는 것을 찾았다.
“정말 백지네.”
그와 관련한 서류에는 수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과 출신 지역, 견습 기사로 황궁에 들어온 날짜 이외의 것은 전부 백지였다. 심지어 성도 없었다.
이게 왜 수상하냐 하면, 만약 그가 귀족일 경우에는 가문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평민이라면 뒤를 봐주는 귀족이 써준 추천서가 있을 것이었다. 그것마저 없다면 졸업한 공립 아카데미의 교수 추천서라도 있다.
황궁에 들어오려면 적어도 신분과 실력을 동시에 증명해야 하는데 이건 성이 없으니 신분도 증명이 되지 않았을뿐더러 실력을 증명할 서류도 없다.
“얘는 대체 어떻게 황궁에 들어온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황립 기사단에 들어온 경로를 세탁했다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감히 황궁의 서류를 세탁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귀족이 그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거다. 그것도 황실 몰래.
“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극도로 수상한 이 서류를 붙잡고 한참 눈 씨름을 하던 나는 이윽고 잊고 있던 중요한 질문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거 아군이야, 적이야?”
전생을 떠올려 보자면 아군이 분명한데 도무지 서류가 믿을 만한 구석이 없다.
‘계획을 수정해야 하나?’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그렇다고 키옌 황후나 숙부가 꽂아 넣은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지난 삶에서 그의 충심이 대단했다.
그렇다고 할바마마나 고모님께서 꽂아 넣은 낙하산이라면 서류가 이렇게 암흑의 루트로 세탁되었을 리가 없다. 황족이 황실 기사단에 사람 꽂아 넣는데 무엇 하러 내 집에 스파이를 심는단 말인가.
그리고 외할아버님인 세르피스 후작께서 입궁시킨 자라면 애초에 내게 이 서류를 주면서 아르와 관련한 서류는 은근슬쩍 빼냈을 거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전 황후, 할머님의 가문인 파피란 공작가 쪽이거나 이도 저도 아닌 중립세력이라는 이야긴데.
‘어디지?’
초조함에 나도 모르게 손끝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황급히 물고 있던 손끝을 내리고 서류를 보이지 않게 상자에 넣어 치워 버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잔느가 아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멀찍이서 내게 예를 갖추고는 그냥 자리에 섰다. 나는 그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좀 더 들어와.”
그랬더니 한 발자국 꿈틀할 뿐이었다.
움찔.
“더 와. 여기까지.”
내가 정확하게 내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자 그제야 그가 조금씩 앞으로 다가왔다. 말소리를 전달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거리였으나 대화를 나누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하긴, 그에게 아직은 이 거리가 편하려나.
나는 그에게 더 다가오기를 강요하지 않고 대신에 잔느에게 그곳에 의자를 두고 나가라고 했다. 잔느는 작은 스툴과 가장 무난한 가향 홍차를 아르 앞에 놓아주고 내 컵에 핫초코를 채운 뒤에 밖으로 나갔다.
달칵- 하고는 문이 닫혔다.
나는 그에게 손짓하여 앉도록 권하면서 물었다.
“일할 시간인가? 바쁜데 부른 건가?”
“그건 아닙니다.”
내 기억 속 그의 목소리보다 훨씬 가늘고 고왔다. 아직 미성이 남아 있는 변성기 전의 목소리였다.
“그럼 다행이군.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
내 말을 들은 그가 아주 잠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 표정이 워낙 찰나였기도 했고, 네가 그럼 뭐 어쩔 건데 싶어서 그냥 무시하고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기사 하나를 찾고 있네. 정확히는 기사가 아니라 서임 직전의 견습생이지만.”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어쭈? 이것 보게?
“내가 누굴 찾는 줄 알고?”
“찾는 기사가 누군지는 몰라도 저는 아닐 겁니다. 저는 저하의 눈에 뜨일 행동을 한 적도 없고 직접 뵌 것도 오늘이 처음입니다. 저하가 아니라도 다른 분들의 눈에 뜨일 행동도 한 적이 없습니다.”
“어. 그래서. 네가 존재감이 너무 없어서.”
“네?”
나는 일단 될 대로 둘러댔다.
솔직히 이 상황에 “내가 미래를 좀 보고 왔는데 네가 나라 망할 때까지 충신이더라.” 하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말 그대로다. 출신도 연고자도 무엇도 없는 자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누구의 눈에도 띄지 말고 내가 허락한 연줄 이외에 그 어떤 연줄도 만들어 놓지 마.”
그래야 머지않은 미래, 황궁에 불어닥칠 피바람 속에서도 안전할 테니까. 그를 지켜 주고 싶다.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다. 곁에 두고 싶지만 내 곁에 두었다가 정적의 손에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내 손에 권력을 쥐고 있을 때, 적어도 그때까지는 날개를 달아 줘야지. 그게 내가 미래의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명령이 이상한지 그의 숨소리가 영 떨떠름하다.
그도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을 수는 없으니 일단 무표정으로 일관하고는 있는 모양인데 그 무표정이 더 어색해서 불편한 속내가 내 눈에도 다 드러났다.
“내 호위기사가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