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렇게 얼마나 생각을 정리하셨을까, 할아버님이 물었다.
“그 시녀에게 어째서 황후 마마께 복수할 기회를 주려는 거지? 단순히 불쌍해서가 아니라고 했지? 네가 그 시녀를 이용해 황후 마마를 굳이…… 공격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니?”
“이번 일이 사고가 아니라…… 사람이 의도적으로 벌인 짓이라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도…… 어쩌면…….”
할아버님은 마차 사고로 죽은 딸 내외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날의 악몽이 떠오른 듯 할아버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다가 곧 마른세수하듯 쓸어내렸다.
“후우…… 레이첼…….”
돌아가신 어마마마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는 물기가 촉촉하게 어려 있었다.
“그 시녀가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리 잔인한 손속으로 내치려 했는지 그걸 알아야겠어요. 그러니 이번 사건은…….”
“알았다. 적당히 묻으마. 그다음 그 시녀의 신분을 세탁해 넘길 수 있도록 내 힘써야겠지. 폐하께도 내가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네. 그리고 부탁드릴 것이 더 있어요. 제가 오늘 할아버님께 부탁해서 그 시녀를 제게 보낸 게 아닌 것처럼 해주세요.”
“그, 그 말은…… 네가 아니라 내 판단으로, 너를 이용해서 증인을 숨기려 하는 것처럼 폐하께 고하라 이 말이냐?”
“정확하네요.”
“허! 그것참. 네 외사촌 오라비인 루디안은 여덟 살 때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할아버님이 헛숨을 내뱉었다. 하긴 내가 할아버님이라도 기가 막힐 거야. 나는 조용히 외할아버님의 혼잣말을 외면했다.
***
어두운 수풀 속, 사박사박 흙 밟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에 울렸다. 밤이슬 위로 차가운 달빛이 내려앉았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아르는 거친 숨을 내쉬며 온 산을 헤집었다. 분명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미치겠군. 사기당했나?”
아니, 아니지. 이렇게 돌아온 것을 보면 분명 사기를 치진 않은 것 같단 말이지. 애초에 그게 사기였다면 그는 지금 저승에 있어야 옳았다. 그것도 열세 살 꼬맹이가 아니라 스물셋, 청년의 모습으로.
오래전이자 어쩌면 미래이기도 한 그날. 그때 그는 아멜리아 황녀의 호위기사였다. 황녀에게 사약이 내려졌던 그날, 그는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사약을 마시고 죽겠다는 아멜리아 황녀를 억지로 끌고 나와 이 산을 탔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냉궁에서 도망친 그들 뒤로 추격대가 붙었다. 그들을 피해 다니느라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오롯이 정신력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에게는 황녀를 모시고 크로이젠 공작가의 차남이자 황녀의 약혼자인 로이드 크로이젠을 약속했던 중간 지점에서 만나 사하임 대륙으로 망명시켜야 한다는 소임이 있었다. 그렇게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대의에 그는 온몸을 바쳤었다.
지금 생각하면 솔직히 그때 했던 일이 순수하게 대의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건 지금에 와서는 중요한 건 아니다. 앞으로는 또 달라질 테니까. 아니, 달라져야만 한다.
어쨌거나 그들의 등 뒤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독화살이었다. 어차피 사약을 내려 죽일 생각이었으니 화살에 독이 묻은 건 당연했다.
독화살이 아멜리아의 팔뚝을 스쳤다. 불행히도 해독제는 없다. 아니, 정확히는 무슨 독인지도 모르니 해독제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가 발자국이 쓸려 내려갈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는 것이다. 발자국이 없으니 추격대가 쫓아오기는 힘들 것이다. 동시에 빗소리 덕분에 도망치면서 기척을 숨기기 좋다는 뜻이었다.
날이 추워 살이 오들오들 떨리는 것쯤이야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
추격대와 거리가 꽤 벌어진 것 같을 즈음, 그는 적당한 장소에 침낭을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지친 아멜리아를 눕혔다.
비에 쫄딱 젖어서 그런 것인지 독이 몸에 퍼져 그런 것인지 파르르 떨고 있었다. 급한 대로 딱 두 병뿐인 포션을 일단 까서 먹였다. 그러자 그녀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호소했다.
“사셔야 합니다. 먹어야 삽니다.”
목이 메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수 없다. 팔이 잘려 나갈 것 같다며 바르작바르작 그에게 매달리는 아멜리아에게 억지로 포션을 먹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기적이었던 건 아닐까 후회되었다. 그녀를 살리고자 했던 건 순전히 그 혼자만의 욕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체 무슨 독을 쓴 것인지 팔에서 찔끔찔끔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지혈초를 찾아오겠습니다. 전하.”
옆에 있어 달라고 고개를 젓는 아멜리아를 뿌리치고 일어났다.
인근을 샅샅이 뒤지며 해독에 좋다는 약초, 지혈에 좋다는 약초를 생각나는 대로 다 뽑아다 챙겼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산을 뒤질 즈음, 누군가가 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앞길을 막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우리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종입니다.”
“……?”
“시간의 신의 성물입니다. 제국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아실 거라 믿습니다.”
그들은 그의 앞에 은색 단도를 내밀었다. 단도라고 해도 길이가 제법 길어서 성인 여성의 손목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 정도는 되었다.
아르는 얼결에 신관들이 내미는 것을 받아 들었다. 그 단도는 보기보다 몹시 가벼웠다.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돌고래 모양의 단도는 손잡이가 돌고래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그 끝부분, 돌고래의 눈이 있을 법한 자리 양쪽에 작고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건국 신화 속 성물……?”
“초대 황제가 건국 직후 신들께 제사를 바쳤을 때, 시간의 신 크로노스께서 내리신 물건이라 전해집니다. 제국에 멸망의 위기가 닥칠 때, 시간의 신의 권능으로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 전해지는 그 성물입니다.”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고 해서 시계처럼 생긴 건가 했는데 단도라니 기대했던 모양과는 영 다른 모습이 미심쩍었다. 하지만 단도에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 때문에 신관이라는 작자들의 말에 묘하게 신뢰가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릴 때 건국 신화 책을 읽었을 때는 사용자를 과거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무슨 모래시계를 뒤집거나 시곗바늘을 손으로 돌리는 모양인가 했었는데.”
“하하하! 성물의 모양이 언제나 인간의 기대와 같지는 않지요. 어쨌든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죽이면 됩니다. 이 단도로 누군가를 죽이면 그 사람만이 현재의 기억을 간직한 채 시간이 과거로 되돌아가지요. 단도는 사용한 자리에 그대로 남을 겁니다. 꼭 회수해야 합니다.”
“……이걸 제게 주는 이유가 뭡니까?”
“제국에 멸망의 위기가 닥쳤고, 신화에서 예고한 대로 이것을 사용할 때가 되었으니까요. 황족이 모두 죽었으니 위기가 아니겠습니까? 수천 명의 피가 묻은 손으로 옥좌를 차지한 자가 휘두를 권력이 결코 선정(善政)일 리는 없지요.”
아르는 얼떨떨한 얼굴로 단도를 쳐다보았다.
애초에 신이라는 게 존재는 하긴 했었나? 딱히 신의 존재를 부정한 적도 없지만 긍정한 적도 없이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 물건을 쳐다보고 있으면 신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기이한 자태에 홀려서 멍하니 있는 사이에 시간의 신의 신관들이라는 사람들이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아르는 정신이 들었다.
황가의 핏줄이 아닌 자가 황제가 되었다고? 볼테르가 황족이 아니라니, 무슨 뜻이지?
하지만 궁금증을 해결해 줄 만한 사람들은 이미 사라졌다.
그가 단도와 약초들을 들고 황녀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는 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싸늘하게 식어 있는 아멜리아의 시신이 담긴 침낭뿐이었다.
그게 지난 삶의 마지막이었다.
아멜리아가 죽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가지 말라고 할 때 그냥 곁에 있어 줄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멜리아가 죽었는데 이딴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쥐고 있던 약초를 내던졌다. 겨우 이딴 풀로 살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과거의 자신이 너무 멍청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손에 쥔 단도를 내려다보았다. 과거로 돌아가든 말든 상관없다. 더는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고 그 어떤 시간도 의미가 없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좋겠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기다란 검으로는 스스로 목을 베기 어렵다. 이 정도 크기의 단도라면 딱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돌고래의 파란색 눈알 양쪽 중 한쪽이 파스스 부서졌다.
그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날 이곳에서 분명히 썼는데.
“하아…… 진짜 환장하겠네.”
추측하건대 돌고래 눈알의 남은 한쪽이 멀쩡하다는 건 기회가 한 번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바꿔 말하면 그건 이미 가치를 다한 평범한 단검이 아니라 아직도 성물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기회가 한 번 더 남은 셈이었다.
너무 늦게 찾으러 온 것인가? 비바람에 휩쓸려 어딘가로 쓸려 내려간 건가? 아니면 설마 누가 먼저 발견하고 집어 갔나? 그런데 이 숲에 누가 들어오기는 할까?
아무래도 기사단에서 그는 아직 견습생인지라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탓에 회귀한 지 5년 만에야 간신히 몰래 탈출해 단도를 찾으려 하니 그것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결국 오늘도 성물을 찾지 못했다.
***
사나흘에 한 번 나는 밤에 몰래 내 드레스룸으로 넘어가 그 거울을 열어 보곤 했다. 단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잘 있었다. 천에 감싼 모습 그대로였다. 요즘 들어서는 낮에도 혼자 있을 때면 유모와 시녀들이 방에 없을 때 그곳을 열어 보곤 했다.
날이 추워지면서 바닥에 고인 물에 얼음이 얼기도 하는 완연한 겨울이 되면서 외출을 삼갔기 때문에 심심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아무 의미도 없이 그곳을 확인하곤 하는 것이었다.
‘에휴…… 저게 대체 뭐라고.’
혼자 생각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데 유모가 그런 내 한숨과 표정을 읽고서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초콜릿을 녹이다 말고 내게 다가왔다.
“저하?”
“어, 응?”
“무슨 생각을 그리 하셔요?”
“그냥.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해서…….”
나는 장난스럽게 피식 웃었다.
“후회되는 일을 했나요? 그래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건가요?”
유모는 내 장난에 퍽 진지하게 대답하며 웃었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사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간절히 되돌리고 싶어했더니 놀랍게도 되돌아왔다.
유모는 그런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조용조용 말했다.
“저하. 시간이라는 건 지나가면 되돌아오지 않아요. 후회할 일을 했다면 최대한 빨리 수습을 하면 되고요. 그리고 앞으로는 미래의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현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랍니다. 알았지요?”
“으, 응.”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다고 해도 내가 다시 어린 시절로 회귀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지나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가 이렇게 과거로 되돌아올 줄 몰랐으니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요,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내가 과거로 이렇게 또다시 되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나는 시간을 거스른 것이 아니다. 그저 같은 시간을 두 번 산 것뿐.
그러므로 유모의 말은 정녕 우문현답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시녀 하나가 내 앞에 초코 우유를 대령했다. 유모가 젓다 말고 놓아둔 우유컵의 초콜릿을 마저 녹여 가지고 온 것이었다.
지난 삶에서 숙부를 흘겨보았다는 이유로 그가 두 눈을 인두로 지진 다음 쫓아낸 아이, 이름은 벨이었다.
“고마워, 벨.”
“뭘요. 헤헷. 그런데…… 저는요. 시간을 되돌린다는 물건을 신화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건국 신화에 나오잖아요!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성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