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당장에라도 황후를 쫓아내고 체리에 후작가를 밀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준비된 증거가 없이는 황후를 몰아세울 수는 없다.
이 정도로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알았다면 애초에 볼테르를 낳기도 전에 그녀의 부정을 까발리고 궁에서 쫓아냈을 거다.
봐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저 허영심 가득한 철없는 후작 영애인 줄만 알았는데 그 가면 뒤에 이리도 무시무시하고 영악한 본모습이 있을 줄이야.
애초에 전 황후와의 아들이었던 죽은 태자의 안정적인 황위 계승을 위해서 키옌과의 사이에 그 어떤 황자, 황녀도 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키옌과는 그렇게 합의를 한 후에 황후로 들였다. 그런데 키옌이 그만 거하게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었다.
그때 쫓아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지금이라도 밝히자면 어떤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키옌이 나가고 곧 밖에 있던 마론 백작이 들어왔다.
“폐하…….”
백작이 걱정스레 황제를 불렀다.
“물이나 한 컵 다오.”
“예.”
마론 백작은 머그잔에 우아하게 물을 따라 황제의 손에 건넸다. 그런 일련의 동작에는 절제된 기품이 배어 있었다. 기품 있는 분위기를 풍기며 주전자를 정리하는 마론 백작을 황제가 가만히 응시했다.
“백작.”
“예.”
“볼테르의…… 후우.”
황제가 길게 한숨을 쉬자 백작이 눈치 빠르게 말을 받았다.
“황후 폐하와 황자 전하의 출생에 관해 이야기하신 겁니까?”
황후는 황제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지만 사실 황제는 시종장인 마론 백작에게 이 사실을 말했었다. 정확히는 마론 백작은 키옌과 황제 사이에 있었던 혼인 전의 약속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황후가 볼테르를 임신했을 때, 뜬금없이 들려온 그 회임 소식에 황제만큼이나 깜짝 놀랐더란다. 황제가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는 걸 아는 백작이 황후의 부정을 가장 먼저 의심했고 황제는 결국 마론 백작에게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 황제로서는 마론 백작이 일종의 보험이었던 셈이다. 혹여 진실을 아는 자신이 진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죽을 것을 대비하여 들어 둔 보험. 볼테르를 절대로 황태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혹여 자신이 잘못되었을 때라도 진실을 밝힐 증인.
“볼테르의 친아비를 찾아야겠다.”
내가 눈을 감아 주었던 것이 독이 되었구려. 내가 용서해 주니 만만했나 보구려.
아무것도 모를 아이가 불쌍하여 그 어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지 않도록 내가 자식으로 받아 주었는데, 그 어미가 또다시 내게 죄를 짓는구나.
황제는 길게 탄식했다.
***
어리다는 건 생각보다 많이 불편했다.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내게 많은 것을 알려 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많은 것을 알지 못하도록 입을 조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회귀 이후 처음으로 내 시녀들을 전부 소집했다. 아침을 먹은 후였다.
“말해. 사냥 행사 때의 일이 밝혀졌다며?”
이미 궁 안에 소문이 파다했다는데 나만 몰랐다. 어제 할바마마께 문안을 드리러 가다가 궁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우연히 들어 알게 되었다. 그때의 배신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해줄 수 있어?”
내가 그들을 타박하듯 말하자 모두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결국 잔느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입을 조심하라 하였습니다. 저하께서 들으시면 충격을 받으실까 저어되어 그리했습니다. 소인의 생각이 짧아 감히 저하의 눈과 귀를 막았으니 저를 벌하십시오.”
……아니,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내가 뭐가 되는 거니?
나는 이게 내가 잘못한 일인가 싶어 갑자기 심장이 뜨끔해졌다. 차마 그들 앞에서 티를 내지는 못하고 새침하게 입술을 오므렸다.
“이제라도 알았다면 말해 줘.”
내가 입술을 비죽이며 말하자 잔느가 그 특유의 평온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궁의 궁인의 실수랍니다. 황후 마마께서 황제 폐하께 행사 날 선물한 손수건에 사용된 염료가 새끼 와이번의 피로 만든 분홍 염료인데 실수로 정제하지 않은 염료를 사용하여 그 사달이 났답니다.”
그녀가 차분하게 알려진 사실을 읊는 동안 나는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구분해 내기 위해서 온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 사실을 누가 밝혀냈지?”
설마하니 사건을 책임지던 내 외할아버님이 밝혀냈을 리 없다. 고작 황후궁 궁인 하나 잡고 끝낸다고? 분명 그 궁인을 일단 잡아다 감옥에 처넣은 다음, 그 배후가 있을 거라며 황후궁을 샅샅이 뒤질 터였다.
“황후 마마께서 직접 잡았답니다.”
황후가 범인이군.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야.
“자백한 거야?”
“자백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깔끔하게 말을 끝맺는 잔느가 어쩐지 계속 내 눈을 피하였다.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자꾸만 나를 어린애 취급했다.
따지고 보면 여덟 살이 어린 건 맞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시간을 보내기엔 모든 것이 촉박했다. 이대로 가다간 10년 후에 내가 죽는다.
당장 이번 사건만 보더라도 할바마마께서 돌아가실 뻔했다. 실제로 지난 회귀 때에는 돌아가셨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번에서야 그것이 사실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 실패한 이들은 분명 두 번째를 시도할 것이다. 즉, 언제 다시 할바마마의 목숨이 위태로워질지 알 수 없다.
물론 지금은 할바마마도 이 사건이 누군가에 의한 암살 시도였다는 것을 눈치채셨으니 몸을 조심하실 테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실패를 맛보았던 만큼 그들도 우리만큼이나 더욱 신중해질 테니까.
한편 잔느가 여전히 내게 말하는 것을 머뭇거리자 결국 내가 그녀를 재촉했다.
“계속 말해. 자백했는데 왜?”
“그 자백을 들은 사람이 황후 마마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시녀가 직접 황후 마마께 자신의 실수를 자백하여 황후 마마께서 그 자리에서 혀와 손가락을 잘라 이튿날 황제 폐하께 바쳤다고 합니다.”
실로 잔인한 행태에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 불쾌감을 티 낸다면 잔느는 앞으로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다시는 지금처럼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으리라.
그래서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억울할 수도 있겠어.”
내 말에 잔느를 비롯해 시녀들이 몸을 움찔했다. 물론 나도 내가 한 말이 전혀 여덟 살짜리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나는 내 시녀들이 그러한 사실에 대해 더는 생각할 수 없도록 화제를 돌렸다.
“외할아버님께 가자. 예쁘게. 최대한 귀엽고 깜찍하게 꾸며서.”
가서 폭풍 애교를 떨어야지. 황후가 버렸다는 그 시녀를 내게 넘겨 달라고.
***
화려하고 거대한 분홍색 마차가 황궁을 빠져나와 세르피스 후작가로 향했다.
마차의 모서리를 타고 아기자기한 꽃이 빼곡하게 양각된 마차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차의 양쪽 문에는 꽃이나 분홍색과는 거리가 먼 드래곤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즉, 황족의 마차. 이런 분홍색에 꽃무늬가 마차의 모서리를 아름답게 감싸는 유치찬란한 형태는 누가 보아도 어린 황손녀의 것이었다.
‘정말 위엄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군,’
조만간 마차를 바꾸든 해야겠다.
나는 마차의 창문에 친 커튼을 살짝 걷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마차를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냥 갈 길 가지. 저런다고 내가 쳐다봐 주는 것도 아닌데…….”
거참 비효율적일세.
이래서 황족들이 황궁 밖으로 함부로 나다니면 안 된다는 건가? 다음부터는 몰래 나오든 해야지 원.
“쯧쯧.”
나는 혀를 차면서 커튼을 다시 치고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엉덩이가 쿵쿵 의자 바닥에 찧었다. 푹신하게 깔아 둔 방석 덕분에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아도 속이 울렁거리며 멀미가 났다.
그렇게 마차가 달려 멈춘 곳은 세르피스 후작저. 할아버님께서 직접 마중을 나와 계셨다.
“오랜만입니다. 저하.”
“할아버지!”
나는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외할아버님의 품에 폭 안겼다. 그리고 폭풍 애교를 떨었다.
“저 마카롱이 먹고 싶어요. 할아버지네 파티시에가 만드는 마카롱이 황궁 마카롱보다 맛있어요.”
“허허허. 그래요. 마음껏 먹어도 됩니다.”
할아버님과 나는 후작저의 온실에서 마카롱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가 한참 말랑말랑하게 무르익었을 즈음, 나는 슬쩍 본론을 꺼냈다.
“할아버지가 사냥 행사 때 일어났던 사고를 조사하셨다면서요?”
“아아. 그랬지.”
온실에서 단둘이 앉아 보는 눈이 없어지니 할아버님도 자연스레 내게 편하게 말씀하셨다.
“범인이 잡혀서 다행이에요. 황후 마마의 시녀가 실수한 거라면서요?”
“벌써 그런 이야기까지 다 들었어?”
외할아버님이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건지 어린 내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려 주어도 되고 알려 주면 안 될지 고민하시는 듯한 눈치였다.
그래서 그냥 시원하게 내가 아는 걸 다 까발렸다.
“그저 실수했을 뿐인데 혀도 잘리고 손가락도 잘리고. 흑흑, 너무 끔찍해요.”
“아니, 누가 그런 말을 네게 하였니?”
외할아버님은 누가 내게 사실을 말해 주었는지 알면 그게 누구라도 족칠 것 같은 눈빛을 하곤 물었다. 거기에서 내가 잔느에게 말하라고 윽박질러서 어쩔 수 없이 말해 줬다는 사실 따윈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황성 안에 소문이 쫙 난걸요? 황성을 돌아다니다 보면 궁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우연히 듣기도 해요.”
내가 둘러대는 말에 외할아버님은 혀를 찼다.
“쯧쯧. 무려 황실에서 일한다는 자들이 그리도 주둥이가 가벼워서야…….”
플로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것 같아서 나는 할아버님이 잠시 마카롱을 집어 입에 넣으시는 사이에 재빨리 나섰다.
“그 시녀를 제가 거두었으면 좋겠어요.”
“뭐라고?”
“그 시녀를 제 성으로 보내 주세요. 신분을 세탁해서.”
“……불쌍해서? 음…… 아멜리아, 네가 좀 더 어른이 되어야 알겠지만 말이다. 황궁에서는…… 그러니까…….”
“불쌍해서가 아니에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거 사실 그 시녀의 실수가 아니죠?”
“……!”
외할아버님은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뜨셨다. 나는 할아버님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속사포로 말을 쏟아 냈다.
“혀와 손가락을 잘랐다는 건 그 시녀가 억울하다고 말할까 봐 그런 게 아닐 거예요. 증거야 조작하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마 그녀가 무언가 발설하면 안 될 만한 무언가를 알았거나 보았을 거예요. 본인이 알든 모르든 말이에요. 그리고 황후 마마께는 그 시녀가 그 리스크에 비해서 별로 유용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죠.”
“흐음…….”
할아버님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과연 어린애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인가 혼란스러워하시는 듯했다.
“그리고 제가 그 시녀라면 저를 꼬리 자르기 한 황후 마마를 저주할 거예요. 언젠가 복수할 기회를 노릴 겁니다. 그 기회를 제가 주려고요.”
할아버님은 내 말을 듣고 한참 거칠게 숨을 쉬다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허공을 바라보고 눈을 감았다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