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회귀 전에 아르는 분명 이걸로 나를 찔렀다. 내가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할 때 그가 이것으로 나를 찌르는 것을 보았는데.
그럼 이 단도는 무엇이며 아르는 이 단도의 정체를 아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내 회귀의 비밀이 이 단도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무슨 원리로? 아니, 정확히 이 단도의 정체는 뭐지?
단도를 들어 올리는데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손잡이 끝에 달린 보석이 없다.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는 이 단도의 유일한 장식인 푸른 보석.
꿈에서 보았던 이 돌고래 모양의 단검은 돌고래의 눈이 있을 법한 양쪽 끝에 보석이 들어갈 만한 오목한 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어째 꿈속에서도 보석이 한쪽 눈에만 박혀 있더니 지금은 아예 없다.
“뭐야?”
이리저리 단도를 돌려 보아도 딱히 이 단도의 실체를 알아낼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나는 이것을 준비해 온 천에 둘둘 감고 서둘러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을 비운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내가 빠져나온 줄 모르고 있었다. 단도는 비밀 통로인 거울 바로 안쪽에 숨겨 둔 채 몸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옷은 감쪽같이 제자리에 벗어 두고 잠옷으로 갈아입었고 자는 척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날이 샜다.
***
마리는 황후의 발 앞에서 달달 떨었다. 그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장부의 숫자 몇 개가 틀린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한 번만 후루룩 계산해서 결재를 올려도 위에서는 잘만 받아 주었다. 그런데 사실 계산 실수가 어마어마했었다니!
“어, 억울합니다! 황후 폐하. 저는 결코 속이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실수……!”
“닥쳐라, 이년! 그 큰돈을 다 어디로 빼돌렸느냐?”
“빼돌리다니요. 억울합니다! 제발……!”
“그럼 장부에서 비는 이 큰 금액이 다 어디에 있는 것이란 말이냐?”
마리는 정녕 억울했다. 그동안 적당히 농땡이를 치고 귀찮아하면서 대충대충 일하긴 했어도 결코 횡령하거나 장부를 일부러 조작한 적은 없었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결백했다.
마리는 눈물을 글썽였다.
“정녕 손가락이 잘려 나가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마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키옌 황후가 정말로 손가락을 자를 작두를 대령하라고 할 것만 같았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키옌은 희미하게 조소를 지었다. 그러곤 말했다.
“내가 얼마 전에 하얀 천에 손수건으로 쓸 것이니 분홍 물을 들이라 했었지?”
“……예?”
황후가 그런 적이 있던가? 그러고 보니 희미하게 그런 기억이 있는 것도 같다. 황후가 수를 놓을 천을 찾는다고. 그래서 하얀 면과 자수용 실을 비단 창고에서 꺼내 내간 적이 있다.
그런데 손수건으로 쓸 천을 찾는다고 했었지 거기에 분홍색 물까지 들이라고 했던가?
“그…… 물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구나, 그때 물을 들이라고 했었구나! 물을 들이지 않아서 화가 나셨나? 그래서 내가 희생양이 된 것인가?
분명 하얀 면을 원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이거 큰일 났구나!
마리는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정작 들려오는 황후의 말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정제하지 않은 염료를 쓰다니! 네가 황제를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예?”
정제하지 않은 염료?
“이것이 네가 쓴 염료가 아니냐?”
황후가 마리의 앞에 분홍색 액체가 든 작은 병을 내려놓았다.
“이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모릅니다. 저는 정말 모릅니다!”
“새끼 와이번의 정제하지 않은 피다.”
“……헉!”
새끼 와이번의 피로 물들인 면은 신비롭게 반짝이는 분홍 펄감으로 인기가 좋았다. 게다가 새끼지만 몬스터의 피답게 은은한 마력이 감돌아서 간단한 마법진을 수놓기에도 좋았다.
그리고 건국 축제 혹은 신년 축제 날이면 귀족들은 와이번 새끼의 피로 물들인 분홍 천에 소원을 적어 풍등에 매달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와이번이 새끼에 대한 애착이 큰 몬스터라서 와이번 새끼의 피로 염료를 만들 때 피 냄새가 나지 않도록 특수한 가공 처리를 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황후가 손에 들고 있는 저것이 ‘새끼 와이번의 정제하지 않은 피’라니! 저것이 지금은 밀봉이 되어 있지만, 뚜껑을 따는 순간 두 시간 안에 황궁에는 새끼의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와이번 떼가 들이닥칠 것이다.
마리는 이 어마어마하고 영문 모를 상황에 그저 황후가 손에 든 염료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황후의 손이 마리의 뺨을 후려쳤다.
짜아악!
방 안에 가득 파열음이 들렸다.
“이런 발칙한 것 같으니!”
황후가 소리쳤다. 그 순간 마리는 입안에서 미끌미끌한 촉감을 느꼈다. 볼이 따갑고 쓰라렸다. 입술에서 주르륵 무언가 흐르는 것 같았다. 볼 안쪽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눈물이 났다. 억울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미 황후는 그녀를 버리기로 작정한 게 분명했다. 그런 황후를 일개 이름 없는 하급 귀족 출신인 시녀 따위가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마리는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그저 외치는 것이 이미 통할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황후의 마음을 돌릴 그 어떤 패도 없었다.
“…….”
마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황제를 죽이려 했다는 누명, 그녀 혼자 죽고 끝날 일이 아니다. 가문이 작위를 몰수당함은 물론이고 일가가 죽임을 당할 터였다.
“내 특별히 네가 실수를 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황제 폐하께 선처를 빌어 보마.”
키옌이 몹시도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리의 부은 뺨을 쓰다듬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리는 정말로 잘못을 저질렀고 황후가 그런 마리의 실수를 너그럽게 봐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리는 그런 키옌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찢어발기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상대는 이 제국의 황후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할 겁니다. 마마! 반드시……!’
***
“그리된 일입니다.”
황후가 눈 하나 깜짝 않고 황제 앞에서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하는 짓이 더욱 가관이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까지 완벽한 연기였다.
“실수였습니다. 제가…… 제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흐윽!”
키옌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콕콕 찍어 냈다. 그 모습이 가증스럽다는 것을 사실 황제도 알고 있었다.
“그렇단 말은 그대가 나를 정녕 죽이려 했다는 말이로구려.”
“어머나, 그리 오해하시면 섭섭하옵니다. 폐하! 이는 정말로 실수이옵니다. 아랫것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함도 제 부덕의 탓이오니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흑흑흑!”
급기야 황후는 꺼이꺼이 통곡까지 했다.
“말이나 못 하면…….”
황제가 혀를 쯧쯧 찼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마론 백작을 향해 고갯짓했다. 잠깐 나가 있으라는 신호였다.
시종장, 마론 백작이 기척을 숨기고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황후는 언제 울었냐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황제는 그것을 보았지만 이미 황후의 실체를 알고 있는 양 아무렇지 않게 혀를 찼다.
“쯧쯧. 그래서 말도 못 하고 글도 쓰지 못하게 혀와 손가락을 잘라 버렸소?”
아아, 독하다. 참으로 독하다.
그 시녀가 억울하다, 모함이라 말을 할까 두려워 그리했단 말인가? 설령 그 시녀가 그리 억울해한다고 해도 누가 편을 들어 줄까. 아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황후의 꼬리 자르기라는 건 대부분이 눈치를 챌 거다.
키옌은 황제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입가에 매단 웃음을 지우지도 않았다.
결국 황제가 노기 서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내가 그대를 죽은 태자의 어미로서 태후의 자리까지 보장해 주겠다 했는데 무엇이 그리 욕심이 났는가? 태자가 이미 장성하여 계모인 그대가 맘대로 휘두르지 못할 것 같아 그리 친아들을 원했는가!”
다른 이들은 듣자마자 바닥에 납죽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을 법한 목소리에도 황후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맞받아쳤다.
“그럼 처음부터 저에게 그림자처럼 살라 요구하지 그러셨습니까? 제게 황실의 안주인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약속하셨던 건 폐하가 아니셨습니까?”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황제는 혈압이 치솟았다.
“그대가 원하는 건 황후, 나아가 태후의 자리까지 원한다고 했잖소. 그거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감히 날 배신해? 태자도 설마 그대가 죽였소?”
“아니, 죽은 태자 얘기를 왜 또 꺼내십니까? 그건 엄연히 사고입니다!”
키옌이 강하게 쏘아붙였다. 증거도 없으면서 ‘네가 죽였지?’ 하면 어쩔 거냐는 마음가짐으로 일단 배 째라며 뻗대었다.
“그럼 대체 정확히 원하던 것이 뭐였소?”
“제국의 태후 자리요. 저는 태후가 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허울뿐인 자리이길 원한 건 아니었습니다.”
“이런…… 발칙한!”
황제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피가 거꾸로 솟아 뒤로 넘어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황후는 무엇이 그리 당당한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발칙하다뇨?”
“됐다. 허울뿐인 자리 놓아두고 기회를 줄 때 네 스스로 나가거라. 볼테르도 데리고 나가! 내 그대가 그대 아비의 욕심에 놀아난 것이 가여워서 그날 너를 폐비로 쫓아내지 않겠다, 비밀로 해주겠다, 용서하겠다고 약조했거늘! 감히 나를 이리 능멸해?”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볼테르는 왜요?”
황후가 빽 소리를 질렀다. 황제는 황후의 뺨을 올려붙이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참았다. 대장부가 부인을 손찌검할 수는 없지 않겠나. 참자, 참자.
가까스로 마음을 달랜 황제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젊은 나이에 아버지 강요에 떠밀려서 다 늙은 홀애비에게 시집오기 싫었던 마음도 이해한다고 그러니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다른 귀족들 아무도 모르게 눈감아 줄 테니……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불명예를 눈감아 줄 테니. 그러니 부디 조용히 지내라고 내가 그대에게 말했었지. 볼테르를 남들 앞에서 내 자식으로 인정해 주겠다고, 그 이상은 욕심내지 말라고 했잖아.”
다른 이가 들으면 실로 충격적일 말을 황제는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던 걸까.
늦었지만 바로잡아야 했다. 애초에 황제에게 볼테르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이었다.
그러니 황태자로 만들지 않으려 한 것도 당연했다. 멀쩡한 핏줄인 에오넬과 아멜리아를 놓아두고 어느 놈 씨일지 모를 볼테르를 황태자로 앉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먼 황실의 친척을 데려오면 데려왔지.
이건 황후의 명백한 과욕이었다. 그녀의 아비인 후작이라면 볼테르가 황제의 핏줄일 거라 황실의 적통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거다. 그러니 당연히 황위를 노리려 들겠지. 그건 정말 백번 양보해서 지극히 인간적인 욕심이라 치고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키옌이 적어도 인간이라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외도를 눈감아 줬는데,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를 놈이지만 아무도 몰래 황자로 인정해 주었는데, 그런데 감히 이럴 수는 없었다.
분노로 황제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런 황제를 보며 키옌은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에 와서는 폐하 혼자서 볼테르가 폐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설마…… 내가 비밀을 말할까 두려워서 그리했소? 그 사냥 행사의 사건은 사실 내 입을 막으려고 그랬던 거냔 말이오!”
“설마요. 비약이 심하십니다. 게다가 지금 황태녀가 있는데 폐하를 음해한다 하여 제가 얻는 것이 무어겠습니까?”
“허! 제발 그대의 말처럼 내 비약이길 바라네.”
“그럼요.”
키옌이 빙그르르 돌아 우아하게 걸어 나갔다. 그 뻔뻔스러운 뒤태를 쳐다보며 황제는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