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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5화 (15/148)

15화

옷을 다 갖추어 입고 나는 드레스룸 벽면의 전신거울을 더듬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 황성의 수많은 건물 중 대부분의 궁에는 이렇게 비밀 통로가 있다. 황제 궁의 비밀 통로는 황제만 아는 극비지만 그 외의 비밀 통로들은 암암리에 소문이 퍼져 있다.

개중엔 비밀 통로를 지키려고 일부러 만들어 낸 헛소문도 있고 진짜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비밀 통로들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그 존재 자체가 묻히기도 했다.

내 드레스룸의 비밀 통로 역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비밀 통로 중 하나였는데 내가 라벤더궁으로 이사를 오고 얼마 안 있다가 발견한 거였다.

사실 이 통로를 발견한 것도 완전히 우연은 아니다. 라벤더궁으로 들어온 나는 ‘라벤더궁이 암묵적으로 대대로 황태자궁이었다면 여기도 황태자를 위한 비밀 통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혹여라도 일이 잘못되어 지난 삶과 같은 결과를 반복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숙부의 바람대로 곱게 죽어 주지는 않을 작정이다. 내가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끝내 죽었을 때 남아 있던 이들의 결말이 어떠했는지 꿈속에서 너무도 끔찍하게 봤으니까.

그러니 도망쳐서 귀족들의 꼭두각시 황제가 되는 것이 내 미래라고 해도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키옌과 볼테르에게만큼은 반드시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그러려면 비상시를 대비해서 탈출구를 찾아 놓아야 했다.

다행히도 라벤더궁에 이사 올 당시에는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던지라, 세 살인 나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숨바꼭질을 핑계로 궁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만에 이 통로를 발견했다.

아, 여담이지만 유모와 시녀들은 아직도 내가 숨바꼭질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고 믿고 있다.

나는 거울 밑의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달칵, 손에 걸리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그런 느낌과 다르게 소리는 없었다.

여섯 칸짜리 거울 중 한 개가 50㎝ 정도 옆으로 스르륵 밀려나며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통로가 생겼다.

재빨리 그 안으로 들어가 열려 있던 거울을 스르륵 밀어 닫았다.

“으으으- 떨려 죽는 줄 알았네.”

행여 유모가 문을 내 방으로 넘어와 잘 자는지 확인을 할까, 시녀 중 한 명이 잊은 것이 있다며 살그머니 들어왔을까…….

쓸데없는 기우라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만에 하나라는 상상이 사람의 심장을 이렇게 미친 듯이 뛰게 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램프처럼 생긴 마법 조명을 켰다.

틱!

마력이 조그맣게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불빛이 램프 안에서 일었다. 마력 출력기를 돌려 빛의 밝기를 등불 수준 정도로 맞추어 놓았다.

불빛을 비밀 문 바닥에 비추면서 그곳에 있는 문 잠금장치를 잠그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나는 한 걸음씩 좁은 통로를 따라 발을 내디뎠다.

사실 나도 내가 향하는 이 길이 맞는 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꿈속의 기억을 통해 움직일 뿐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깊이 들어왔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미로처럼 복잡한 길은 나의 꿈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진짜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냐 하면 나도 지금 이 상황이 신기하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돌아 버릴 정도다.

“와아……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아멜리아.”

지금 이 길은 황궁 북쪽 숲으로 빠지는 길, 즉 냉궁 방향과 비슷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전각이었다.

궁 이곳저곳에 유사시 사용하려고 만들어 둔 이 비밀 통로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대신에 미로로 되어 있어 그 규칙은 황제에게만 전해진다.

그런데 왜 이곳이 나의 꿈속에서 나타났을까.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곧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내려 애썼다. 어차피 지금은 아무리 고민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꿈속에 빠지지 않고 나왔던 그 단도가 냉궁 지하의 ‘그곳’에 있는지만 확인해 보자. 지난 삶에서는 그 단도의 행적이 ‘그곳’에서 끊겼으니까.

그 단도가 과거이자 미래에 관련한 내 모든 꿈에 나온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것이 무언가 내 회귀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아니, 그럴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간을 되돌렸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어딘가에는 나의 시간이 되돌아갔다는 흔적이 남지 않았을까?

전각 밖에 나와 어둠에 적응하려 애썼다. 행여 들킬세라 마법 램프도 끄고 달빛에 의지해 길을 더듬었다.

다행히도 아무도 살지 않는 전각과 아무도 살지 않는 냉궁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황궁 경비대도 최소의 인원이 정해진 순찰 코스만 도는 듯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냉궁의 지하에 숨어들었다.

아무도 없는 지하에 다다라 마법 불을 다시 켰다. 어두운 지하실에서 꼭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가 사실 악마와 계약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타박타박-.

발소리가 지하에 울렸다. 역시나 냉궁이라 자리가 영 좋지 못한 것인지 돌벽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이윽고 처음 들어왔던 출입구조차 까마득해진 깊은 지하실, 그곳이 보였다.

내가 죽고 나서 아르가 갇혀 있던 그곳. 아르가 죽었던 그곳.

지하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녹슨 쇠의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시큼한 쇠 비린내가 풍겼다. 손바닥에 까슬한 녹이 묻어나는 것 같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그것을 잡아당겼다.

끼익-.

드디어 문이 열렸다.

***

황후궁에 때아닌 폭풍이 몰아쳤다. 황후의 바로 옆에서 시중을 드는 전속 시녀들이 황후궁 안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궁 안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이번 사냥 대회에서 벌어진 사건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사냥 대회가 엉망으로 끝나고 황제는 이런 갑작스러운 사태를 철저하게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그것도 세르피스 후작을 조사 책임자로 앉혀 놓고서.

말로는 와이번이 서식지를 옮긴 것인지 우연히 지나던 것인지를 조사하여 내년 사냥 행사 때부터 베이스캠프를 바꾸어야 할지 그대로 둘지 결정해야 하고 안전 대책을 좀 더 확실히 마련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눈치가 빠른 이들이라면 대충 알고 있었다.

‘황제가 누군가를 골로 보내려 한다’라는 것쯤은.

그 ‘누군가’란 향후 황태녀인 에오넬과 황손인 아멜리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볼테르 황자파 귀족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것 역시.

황제는 이미 조사 전부터 ‘누군가’가 일부러 와이번을 베이스캠프로 불러냈다는 가정을 세우고 그것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그게 진짜로 드러난다면 그자의 가문은 멸문을 면치 못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없는 죄라도 만들어 참할 것이 분명했다.

가령 이번 사냥 행사에서 베이스캠프를 지키는 일을 맡았던 12기사단의 단장, 황후의 작은 오라비라든가…….

어느 모로 보나 황후에게는 몹시 위험한 정세였다.

그러니 그녀가 눈에 불을 켜고 난리를 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그녀가 그저 성질을 못 이기고 날뛰는 거라 그리 생각하며 하녀들은 늘 하던 대로 차분하게 몸을 사렸다.

하지만 몇몇 더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깨달았다.

‘우리 중 누군가에게 덮어씌울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황후가 사냥 행사 때 일어난 사고 때문에 아무런 연관도 없는 제 궁의 궁인들을 지지고 볶으며 들쑤실 리 없지 않은가.

어떤 명목으로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울지는 모르겠지만 황후라면 없는 것도 만들어서 제 뜻대로 일을 만들어 낼 것이었다.

그러니 괜한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죽는 것이었다. 그렇게 황후궁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을 때였다.

오늘은 어느 곳이 먼지의 영혼까지 탈탈 털리려나 싶을 즈음, 황후의 전속 시녀들이 황후궁 2층 서쪽의 어느 방에 들이닥쳤다.

황후궁에서 발생하는 모든 빨랫감을 처리하는 세탁실이면서 동시에 황후의 개인 소유인 비단이나 가죽, 실 등 옷감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황후의 전속 시녀들이 들이닥쳤을 때, 세탁실의 하녀들은 바지런히 수건을 개고 햇볕에 잘 말린 카펫과 커튼을 펼쳐 얼룩이 빠졌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황후의 시녀들이 들이닥치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하녀들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하던 것을 멈춘 채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던 시녀장이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아이는 어디 있지? 업무실에 없던데?”

이 방을 관리하는 시녀, 마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녀들은 고개를 떨구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난 모르는데…….’

‘넌 알아?’

‘나도 몰라. 넌?’

‘내가 어떻게 알아?’

마리는 매번 월급 때가 되면 자신의 개인 업무실에 나타나 “귀찮아.”를 연발하며 하녀들의 봉급을 대강 계산해 결재를 올렸고 그 외에는 비단 창고에도, 자수실에도, 심지어 하녀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세탁실에도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았다.

그녀의 아비는 그녀가 언젠가 황후의 전속 시녀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딸을 입궁시켰지만 애초에 그렇게 될 짬도 못 되는 하급 귀족이었다. 그녀에겐 이 서쪽 구석 옷방이라도 황후궁 시녀라면 감히 황송해야 할 정도였다.

“이름이 마리였던가? 어디 있는지 찾아서 당장 끌고 와라. 감히 근무 시간에 자리를 이탈하다니.”

시녀장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시녀장의 뒤를 따르던 시녀 중 하나가 후다닥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시녀들이 세탁실을 나가 마리의 업무실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리의 업무실에서 각종 장부를 바구니에 쓸어 담았고 비단 창고와 가죽 창고까지 건너가 가죽과 비단들을 끄집어내 관리 상태와 수량을 확인했다.

곧 그들이 비단과 모피, 천을 염색하는 염료와 장부 몇 권을 줄줄이 가지고 나타났다.

“비단 다섯 필에 좀이 슬었습니다,”

“여우와 담비 모피도 털이 상했습니다.”

“붉은색 염료에 곰팡이가 피었습니다.”

“회계장부에 기록한 하녀들의 월급과 하녀들의 근무 일지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황후의 불똥이 튈 곳이 결정되었다.

***

내 과거이자 미래인 회귀 전, 그 시절의 냉궁보다 더 춥고 어둡고 습한 냉궁의 지하.

철문이 열리고 나는 꿈속에서 아르가 죽었던 그곳을 똑바로 마주했다. 꿈속과 똑같은 풍경. 똑같이 음습한 그곳.

서늘한 기온 탓에 입김이 절로 하얗게 피었다.

“하아…….”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원하던 것을 찾았다.

돌고래를 형상화한 은빛 단검. 손을 가져다 대자 몹시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감쌌다.

그것은 쇠붙이 특유의 촉감과는 조금 달랐다. 추운 공간에 오래 놓아둔 쇠붙이의 그것과 달랐다.

차갑기는 한겨울의 눈송이처럼 차가웠지만, 그 단면은 마치 촘촘하게 잘 짠 천처럼 보드라웠다. 마치 신화 속 겨울의 여신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 머리칼로 직접 짰다는 비단 같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그런 이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의문은 따로 있었다.

“이게 왜…….”

사실 내가 막연하게 꿈에서 본 것들을 좇아 이곳까지 왔다는 것 자체도 현실성 없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이게 정말로 여기 있었어? 물론 애초에 내가 회귀한 것도 현실성 없는 일이지만.

지난 3년 동안 계속 꿈을 꿔오면서부터 의심하긴 했었는데 설마 이 단도가 진짜로 회귀 전의 마지막 행적인 이 냉궁 지하실에 있었을 줄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현재 시간 축에서 이 단도가 있었어야 할 곳은 적어도 지하실이 아니어야 했다. 이 단도가 현재 냉궁 지하실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 단도는 내 회귀에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유일한 것인지도 사실 확실하지 않지만) 것이라는 증거였다.

“아르가 갖고 있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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