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폐하. 오셨습니까?”
“공작, 그간 잘 지냈소?”
할바마마와 공작이 상투적인 인사로 대화를 시작했다. 분위기가 좋았다.
분위기가…… 빌어먹게 좋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할바마마가 직접 사냥하러 가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막아야 하냐고!
나는 그럴듯한 핑계를 짜내려고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가 어느새 황후와 볼테르 숙부도 도착했다. 사냥 시작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무렵이었다.
사냥에 직접 나서기로 한 사람들은 자신의 무기와 갑옷을 점검했다.
할바마마는 연세도 있으시고 기사들처럼 무예를 잘하는 것도 아니시니 호위기사 몇 명만 거느리고 가볍게 산 입구에서 둘러만 보고 오신단다.
참가하지 않고 구경만 하러 나온 귀족들은 여기저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몇몇은 참가자의 무운을 빌어 주었다.
할바마마 근처에서 앉아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면서 어떻게 할바마마를 뜯어말릴지 골똘히 생각했다. 한 시간 안에 말려야 한다.
그때 키옌 황후가 근처로 다가와 할바마마께 작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분홍색 물이 곱게 든 손수건이었다.
“갑옷을 입고 오래 승마를 하시면 땀이 나실 겁니다. 이걸로 닦으셔요.”
할머니, 웬일?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황후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황후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할바마마를 향해 활짝 웃었다.
주변의 귀족들이 그런 황제와 황후를 보며 저들끼리 미소를 띠고 수군거렸다.
아, 그러니까 할머니 지금 이미지 메이킹 중인 거지? 이를테면 ‘금실 좋은 황제 부부’ 이런 거 말이야.
같잖은 가식에 배알이 뒤틀렸다. 할바마마는 저 여자와 볼테르가 전 황태자인 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되실까.
할바마마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그저 나 혼자 야속했고 한편으로는 아들을 죽인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이 몹시 애잔했다.
나는 마시던 코코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문득 이 뒤틀린 심사를 조금이라도 풀 만한 좋은 생각이 났다. 입안 가득 코코아를 머금었다가 일부러 크게 뿜었다.
“쿨럭!”
진한 초콜릿색 우유 방울이 황후의 드레스 자락에 가득 튀었다.
“꺅!”
황후가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의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켁켁! 켁켁켁!”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기침을 하며 손에 든 코코아를 쏟았다. 내 드레스에도 코코아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이코!”
할바마마가 내 등을 두드렸다. 황후는 젖은 드레스를 들고는 어찌할 줄 몰라했다. 시녀들이 재빠르게 다가와 수건으로 드레스를 닦아 냈으나 갈색 초콜릿 얼룩은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황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목까지 핏대가 솟았다. 하지만 화를 낼 수는 없으리라.
왜냐? 난 아직 어린애거든! 캬캬캬캬!
지금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사레가 들려서 실수로 그랬다는데. 그런 어린애 상대로 화를 내봤자 황후의 그릇은 그것밖에 안 된다고 소문을 내는 것뿐이거든!
그래서 일부러 사과도 안 했다. 그냥 목과 명치가 몹시 아픈 척했다.
로이드도 멀찍이 서 있다가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고 달려와선 내 옷에 묻은 코코아를 제 손수건을 꺼내 닦았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예상 밖의 인물이 등장한 것에 당황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예의 그 눈웃음이 뒤를 이었다.
“정말요? 아침부터 안색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네?”
아침부터 내가 머리가 상당히 아프긴 했지. 방금까지도 기분이 꽁해 있었고…….
할바마마 어떻게 해야 오늘 사고를 안 당하게 할까 밤새 고민했다고. 안색이 좋을 리가 없잖아.
로이드의 세심한 관찰력에 진심으로 감탄하면서 동시에 마침 잘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거다. 꾀병을 부리자!
“고마워요. 로이드 공자님.”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해줘서. 나는 진심을 듬뿍 담아서 인사했다.
할바마마한테 꾀병을 부려서 가지 말라고 졸라 볼까. 지금까지 할바마마의 행동이면 내 말 한마디에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실 것 같은데.
어차피 황족 중 누구 하나 가야 한다면 볼테르 숙부가 가도 되잖아? 왜 굳이 연세 드신 황제 폐하께서 장성한 아들 놓아두고 직접 행차하시느냐 이 말이다.
그래. 꾀병 작전이다!
그러려면 일단 진짜로 아프고 서러워 보여야 한다. 눈을 뜬 상태로 감지 않고 버텨 눈동자를 벌겋게 만들고 슬픈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돌아가신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아니, 얼굴도 기억 안 나서 별로 슬프지가 않다.
키옌 황후? 지금 쳐다보니 고소해서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날 것 같다.
볼테르를 쳐다보니 화가 치밀어서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다. 음…… 눈앞의 로이드도 마찬가지.
슬픈 생각, 슬픈 생각!
머리에 힘을 주고 지난 삶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 순간 희미하게 환청이 들렸다.
“부디 소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결론적으로는 할바마마를 막는 데는 성공했다.
내가 “어지럽다.”,
“속이 메스껍다.”
,
“몸이 덜덜 떨린다. 춥다.” 등등 적당히 둘러댈 법한 모든 감기 증상을 읊어 대자 할바마마의 얼굴이 납처럼 시퍼렇고 거무죽죽하게 굳어 버렸다.
거기에다 대고 “할바마마 가지 말아요. 찡찡찡.” 하며 칭얼거리자 할바마마는 그 자리에서 입던 갑옷을 훌렁훌렁 벗어 버렸다.
그리고 한마디 하셨지.
“볼테르가 올해로 25세 아니냐? 이 황실의 어엿한 황자로서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게 좋겠구나. 이번 기회에 네 검술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이 아비도 궁금하구나.”
요약하자면 ‘볼테르야, 네가 가라.’ 이거였다.
그러자 볼테르의 얼굴이 볼만하게 변했다. 정말 어릴 때 구경 오던 습관을 못 버려서 언제까지고 행사에 ‘참관’만 할 생각이었던 건가? 아무것도 준비된 것 없이 화려한 옷을 입고 덜렁덜렁 몸만 왔나 보다.
할바마마의 말을 들은 귀족들이 근처에서 술렁였다.
“드디어 올해는 황자께서도 사냥에 나가시려나 봅니다.”
“황자께옵서 벌써 약관을 넘긴 지 오래신데 사냥 행사 정도는 이끄실 때가 되셨지요.”
볼테르를 지지하는 황후파의 귀족들이 내심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볼테르가 당황할 즈음 황후는 아무렇지 않게 볼테르의 시종을 시켜서 그가 입을 갑옷을 가져오라 명했다.
그래, 사지 멀쩡한 장정이, 그것도 황실이 주최한 사냥 행사에서 황족이 이런 행사 때에 그저 구석에 앉아서 노는 건 영 그림이 안 좋다고 생각했거든. 잘됐다.
나는 할바마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볼테르를 향해 응원 아닌 응원을 해주었다.
“숙부, 파이팅. 콜록!”
기침이 나오는 척 꾀병을 부리는 것도 잊지 않고.
나는 할바마마의 옆에 기대 병든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이제야 긴장이 풀려 스르르 잠이 쏟아졌다.
그때 할바마마가 무언가 생각난 듯 볼테르를 불렀다. 그리고 아까 황후가 주었던 손수건을 볼테르의 손에 쥐여 주었다.
“황후가 땀을 닦으라 준 것인데 내가 가지 않게 되었으니 네가 가져가 땀이나 닦으려무나.”
“가,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볼테르가 감격한 듯 넙죽 고개를 숙이며 손수건을 받으려는데 어느새 황후가 나타나 손수건을 낚아챘다.
“엇?”
“아아아, 아니, 아닙니다. 폐하. 신첩이 폐하께 드린 것인데……. 그러니까 볼테르 것은 제가 따로 줄 것입니다. 예.”
황후가 기어이 손수건을 부득부득 황제에게 돌려주고 볼테르에게 하얀 손수건을 건네었다.
“아…… 그러시오. 황후. 내가 미처 황후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구려. 하긴 황후가 내게 준 선물인데 다른 이에게 빌려 줄 생각을 했으니 내가 실례하였어.”
할바마마는 손수건을 다시 품에 넣으며 멋쩍은 듯 허허 웃었다.
황후도 마주 가볍게 웃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볼테르를 향해 말했다.
“조심하세요. 황자. 어미는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그렇게 사냥 행사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윽고 모든 참가자가 준비를 마쳤다는 말이 들려왔고 잠시 후 귀족들과 기사 무리가 깊은 산을 향해서 떠났다.
행사를 관전하러 온 이들은 천막을 쳐둔 곳에 남았다. 몇몇 귀부인들과 그들의 어린 자녀들, 나와 할바마마를 비롯한 황족들 그리고 그들의 호위를 위한 최소 인원만이 남았다. 귀부인들은 요즘 전망이 좋은 사업과 무역, 그리고 여행하기 좋은 겨울 휴양지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아픈 척 꾀병을 부리며 졸고 있었고 할바마마는 그런 나를 무릎에 눕혀 토닥토닥했다.
황후는 아까 전 할바마마의 변덕에 심술이 난 것인지 속이 좋지 않다며 주변을 산책한다고 호위 몇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고모님은 다른 귀부인들이 모인 천막에 가서 열심히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멀리 하늘에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이-.
쇠를 긁는 듯한 높은음이 끼룩끼룩 산을 울렸다.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부디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그 울음소리였다. 드디어 그날의 와이번들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볼테르 숙부는 무사하려나?
사실 원래는 와이번 습격을 받은 건 할바마마여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은 볼테르 숙부가 할바마마가 둘러보려 했던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그렇다면 볼테르 숙부가 대신 습격을 받는 건가? 그럼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복수가 된다고?
나는 잠이 든 척 눈을 감고 멀리서 울리는 와이번 소리에 집중했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볼테르가…… 죽을까?
이참에 확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기심과 이렇게 죽어 버리면 너무 허무해서 오히려 더 억울할 것 같다는 묘하게 뒤틀린 마음이 심장을 거세게 옭아맸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보다도 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막사 안으로 기사가 뛰어 들어왔다.
“폐하! 피하십시오! 와이번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뭣이! 와이번이? 지금 이 베이스캠프 근처에 말이냐?”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그렇듯 틀리지 않았다.
“예. 폐하. 어서 피하셔야 하옵니다!”
끽끽거리던 울음소리가 삽시간에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응? 어째서지?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건너편 천막에서 귀부인들의 비명이 들렸다.
“피하십시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난 할바마마의 손에 이끌려 천막 밖으로 나왔다.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우리는 황궁 방향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하지만 그저 예쁘게만 디자인된 딱딱한 구두를 신고서는 뛰기 쉽지 않았다.
그때 반대쪽 막사에서 고모님이 할바마마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바마마! 멜리!”
굽이 높았던 구두는 언제 벗어 던졌는지 맨발이었고 드레스 자락은 뛰기 편하게 무릎 높이로 부욱- 찢어 짧아져 있었다.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꾸역꾸역 잡아 들고 높은 구두를 신은 채로 엉거주춤 뛰는 다른 귀부인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할바마마가 놀라 물었다.
“에오넬! 이 꼴은 어찌 된 일이냐? 다쳤느냐?”
“전혀요. 드레스고 구두고 자시고 살고 봐야죠. 품위가 생명까지 지켜 준답니까? 아바마마도 애는 시종이 업으라 하시고 따로 도망가시는 편이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고모님은 할바마마의 손을 붙잡고 있던 나를 낚아채 근처에 있던 유모에게 넘겼다. 그러곤 소리쳤다.
“비상 나팔을 불어라!”
그것은 마치 사자의 포효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