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2. 아직은 미취학 아동입니다.
공작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끝나자 아르가 공작을 향해 무어라 대답했다. 아련하던 목소리는 내가 집중할수록 또렷해졌다.
“황녀 전하께서는 꼭두각시 황제 자리는 필요 없다셨습니다.”
공작을 향해 말하는 그 목소리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래서 이 냉궁에서 끌고 도망 나오지도 않고 죽게 내버려 두었느냐?”
“……꼭 그래서만은…… 아닙니다.”
그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그와 동시에 공작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볼테르가 알았다.”
“……?”
“곧 크로이젠 공작가도 막을 내리겠지. 하! 저지르지도 않은 역모라……. 반역자가 뉘거늘!”
공작의 입에서 까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부탁대로 황녀의 시신은 볼테르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잘 수습했다. 놈이라면 그저 죽이는 데서 끝내지 않았을 게야. 제 조카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모욕했을 테지.”
“감사합니다.”
“그래도 황녀가 죽은 것을 확인한 시녀들의 증언이 있었으니 적어도 황녀의 시체를 확인해야 안심이 되겠다며 여기저기 들쑤시지는 않을 게다……. 대신 시신을 빼돌린 네놈 목을 하루빨리 치고 싶어하겠지.”
그럼 그날 독을 먹고 죽은 내 시신을 숙부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고?
공작이 저 먼 곳을 쳐다보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우- 그래서 너는 어찌할 테냐. 로이드와 함께 사하임으로 망명을 할 테냐?”
공작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아르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가만히 자신 앞에 있는 검을 응시하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죽여 주십시오.”
“응?”
“주군을 죽이고 혼자 사는 것은 기사가 할 짓이 아니니 죽여 달라 하였습니다. 아니면 제가 볼테르의 손에서 죽기를 바라십니까?”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두근!
심장이 내려앉았다.
검을 쥔 공작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긴, 볼테르가 너를…… 편히 죽여 주지는 않겠구나.”
“그러니 지금 죽이십시오. 제 대답도 전부 예상하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고작 검 한 자루 들고 사하임 대륙으로 떠나라니, 지나가던 개도 믿지 않을 소리를…….”
아르가 턱짓으로 공작이 든 검을 가리켰다.
공작은 그에게 내밀었던 검을 자신의 가슴 앞에 수평으로 들었다. 이윽고 검집에서 검을 꺼내었다.
스릉-.
맑은 은빛이 반짝이며 묵직한 쇳소리가 좁은 공간을 울렸다.
쇠 비린내가 진동했다.
검을 든 공작의 손이 천천히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안 돼!’
나는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달려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발과 손을 움직여도 그들과는 한 뼘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초상화 속 그림을 보는 것처럼, 그들과 다른 세상에 동떨어져 있는 듯 점점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아르……!’
허공에 은빛 사선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촤악!
붉은 것이 시야를 덮쳤다.
그러고는 이내 불에 타고 남은 재가 날아가듯 아르도, 공작도 가루처럼 부서져 눈앞에서 사라졌다.
공허한 지하 공간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아르가 있던 자리, 하얀빛이 반짝였다.
낯이 익다. 그 단도. 저번 꿈에서도 보았던 그 단도.
손잡이 끝에 푸른 보석이 달려 있던…… 아니, 보석은 사라지고 옴폭하게 흔적만 남아 온통 은색만이 감도는 단도였다.
냉궁 지하의 서늘한 온도처럼 시린 은빛이었다.
***
“허억!”
숨이 턱 막혔다. 명치를 움켜쥐며 눈을 떴을 때는 다행히도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침대 위에 매달린 캐노피의 무늬였다.
한동안 잊었는데 또 그 꿈이다.
깨고 나서야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어지자 오한이 돋았다. 등에는 흥건한 식은땀이 마르면서 온몸이 으슬으슬했다.
그때 옆방에서 자고 있던 유모가 내 목소리를 들었던 것인지 살며시 문을 열고 다가왔다.
타박타박 러그 위를 걷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저런, 또 악몽을 꾸셨나요? 괜찮아요. 어릴 때는 자주 악몽을 꾼답니다. 그러고 나면 키가 훌쩍 크지요.”
유모가 별일 아니라며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나도 가만히 유모를 끌어안았다. 푸근한 품 안에 얼굴을 묻고 심호흡을 했다.
유모의 품에서는 고소한 옥수수식빵 냄새가 났다.
“유모…… 무서웠어.”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다시 잠이 들 때까지 옆에 있을게요.”
회귀하고 5년이 지난 지금. 미래가 많이 바뀌었다. 비록 민티아를 황후에게 돌려주긴 했으나 그 덕에 나는 라벤더궁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의 자취를 느끼며 생활해 왔다.
할바마마는 아직까지 절대 황권을 휘두르고 있고 고모님도 그 비호 아래서 황태녀 자리를 공고히 다졌다. 나는 잘 먹고 잘 놀고 잘 크고 있다.
미래가 바뀌었음을 자각할 때마다, 그리고 미래가 바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늘 이렇게 꿈을 꾸었다. 마치 예지몽처럼.
그 꿈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내 목에 박혔던 그 단검이 나왔다.
나는 가만히 내 등을 두드리던 유모를 불렀다.
“유모.”
“말씀하셔요.”
“오늘, 오늘이 무슨 날이지…….”
지금 그 꿈을 꾸었다는 건 무언가 미래가 바뀔 날이라는 걸 내 무의식이 경고하는 거란 말인데. 과거이자 미래인 지난 삶에서의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었더라?
내 질문에 유모가 슬그머니 웃으며 답했다.
“오늘 황도 사냥 행사가 있어요.”
맞다. 사냥 행사…….
겨울이 시작되기 전, 제국 전역에서 사냥 행사가 열린다. 그 해 첫 사냥 행사는 황실에서 주최한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개최한다. 그렇게 이 전국적인 행사는 한 달 가까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겨울철 산이 황량해지면 몬스터들은 민가로 내려와 가축과 사람을 잡아먹곤 하기 때문이었다. 황도에서 그럴 일은 없지만 적어도 아직 많은 시골 영지들은 몬스터가 민가를 침략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황도에서 황실이 주최하는 행사는 사실 형식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제국민들에게 몬스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하지만 제국법에 의해 몬스터의 서식지를 끼고 있는 모든 영지는 의무적으로 이 행사를 열어야 했다.
‘사냥 행사라…….’
나는 억지로 지난 삶에서 올해의 사냥 행사 때 있던 일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거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열 살 미만이었을 적의 사냥 행사 기억들은 모두 제멋대로 섞여 있어서 제대로 된 기억도 아니었다.
전리품 중에 라이칸이 있어서 그 가죽으로 내 코트를 지어 입었나……? 아니, 그건 아홉 살 때의 일인데. 그것도 할바마마가 잡은 게 아니라 크로이젠가의 기사들이 잡아다 준 것으로…….
응? 아홉 살 때 할바마마는…….
아, 그때는 이미 안 계셨지. 내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다.
여덟 살 사냥 행사 때…….
“아! 아아아아아!”
맙소사! 이걸 잊고 있었다니.
내가 도 깨치는 소리를 내지르자 유모가 나보다도 더 깜짝 놀란 듯 움찔거렸다.
“왜요? 무슨 일이셔요?”
“아니, 아니야. 사냥 행사가 있는 날인 걸 잊고 있었네.”
“어휴, 저하께서는 그냥 가서 천막 안에 앉아 놀고 계시면 되세요.”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는 그런 나를 침대에 다시 눕히고는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쪽-.
“주무세요. 옆에 있을게요.”
“괜찮아. 혼자 잘 수 있어. 유모도 얼른 다시 자.”
“알았어요.”
그녀가 옆방으로 돌아가자 조용한 공간에 내 심장 소리만 쿵쾅쿵쾅 요란했다.
오늘 예정대로라면 할바마마는 와이번의 습격 때문에 돌아가신다. 사냥 도중 와이번 무리를 만나 공격당하고 그때 다치게 된다. 그것 때문에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그로부터 한 달 후 돌아가시게 된다.
오늘, 할바마마를 사냥터에 보내면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으으…….”
몸을 뒤척이자 고요해진 방 안에 이불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울렸다.
그렇게 밤새 고민만 하고 결국 어떻게 막을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그 탓에 아침이 되었을 때는 정말 눈이 떠지지 않았다.
“어서 정신 차리셔요.”
시녀들이 깨우는 소리에 비몽사몽하면서 팔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꼼짝도 하기 힘들었다.
회귀 전에는 날을 새워도 끄떡없었던 것 같은데 회귀 후에는 이상하게 잠을 제대로 못 자면 다음 날에 정신을 못 차렸다. 새삼 8세의 육체적 한계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이불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유모의 손에 억지로 일으켜져 자리에 비척비척 앉았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이나 유모의 팔에 늘어지듯 매달려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꺼떡거렸다.
곧 시녀들이 작은 대야에 시원한 물을 받아 왔다.
“찬물로 얼굴을 씻으면 잠이 조금 달아나실 겁니다.”
잔느가 시원한 물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았다.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가까스로 내 발로 일어나 시원한 물이 담긴 대야에 풍덩 얼굴을 담갔다.
“어푸푸!”
아, 좀 살 것 같다.
어서 잠이 깨야 할바마마를 구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나는 저 멀리 잠의 세계로 달아나는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바로 행사장으로 출발했다.
행사장에는 이미 귀족들이 대부분 와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야외용 화로에 피운 불 주변에 서넛씩 짝을 지어 모여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그들이 하나둘 인사를 건네왔다.
아직 황제인 할바마마와 황태녀인 고모님은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대신에 크로이젠 공작(5년 전의 그 공작님이 아니다. 전 공작님은 전 대륙을 일주하며 낚시 여행을 다니신단다.)이 자신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러니까 장남인 크로이젠 공자와 로이드 공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황손녀 저하를 뵙습니다.”
“저하를 뵙습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공작님. 그리고 소공자.”
공작과 첫째 공자와 인사를 나누고 나니 로이드가 살포시 눈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보고 싶었어요.”
응? 뭘 하고 싶었다고? 진짜 이 인간은 방심하는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데 뭐 있다.
회귀 전의 나 같았으면 일상적이지 않으면서도 도발적인 ‘보고 싶었다’라는 말에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당황했을 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을 곱씹고 얼굴을 붉혔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난 삶에서 그런 착각이라면 이미 실컷 겪었다. 더불어 저런 언변에 넘어가 나처럼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무수한 영애들의 정신머리도 머리채부터 휘어잡고 끌어내 현실을 직시하게 했던 나였다.
게다가 지금 내 신체 나이 여덟, 로이드의 나이 열다섯. 저 ‘보고 싶었다’라는 말이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말일 리가 없잖아! 만약 그랬던 거라면 심각하게 위험한 거다, 저거.
그러니 그냥 자유로운 영혼 특유의 습관처럼 입에 밴 인사말인 거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그랬나요?”
내가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로이드도 당당하게 “네.”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말 한마디도 밀리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때 황제 폐하와 황태녀 전하가 도착했다는 시종의 말이 들렸다. 나는 그것을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아니, 떠나려 했다.
할바마마, 왜 이리로 오시는지……? 이러면 나 지금 타이밍에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가 없잖아.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