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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0화 (10/148)

10화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휴우- 황자가 잘못한 게 무어 있겠습니까? 황제가 그저 어미 없는 자식이라 불쌍하다 싸고도는 것이 문제인 게지요.”

황후는 그렇게 은근슬쩍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다.

“소자가 더 학문에 정진하여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다.”

볼테르는 제 어미의 화를 가라앉히는 말을 기계적으로 외워 생각 없이 읊어 댔다. 그래야 이 불편한 자리를 빨리 털어 버리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궁으로 돌아가 무언가를 미친 듯이 입에 쑤셔 넣고 싶었다. 야들야들한 송아지 스테이크에 환상적인 풍미의 와인을 곁들이고 후식으로는 꿀을 잔뜩 넣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다.

그렇게 무언가 정신없이 먹고 배가 터질 것 같은 포만감을 느끼고 나면 어머니로부터 받는 이 기묘한 압박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키옌이 그런 볼테르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여상히 말했다.

“당연한 것을요. 이 어미는 아드님을 믿습니다.”

격려인지 협박인지 모를 어조였다.

“어서 가서 학문을 갈고닦아 정진하세요. 만인의 모범이 되셔야 합니다. 황자.”

그렇게 말하며 키옌은 볼테르를 드디어 방에서 내보냈다.

볼테르는 공손히 인사하고 얌전히 나오면서도 숨이 턱 막힐 것 같아 돌아가는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야외로 나오자마자 그는 크게 숨을 쉬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어머니 말씀을 따라 황제가 되면, 내가 황제가 되면 그때는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황제의 관을 쓰고 옥좌에 앉으면 모든 것이 제 손안에서 뜻대로 움직일 줄만 알았다.

그러나 올해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제 어머니는 저를 황제로 앉히고 자신이 태후로서 그 뒤를 조종하려 들겠지.

‘그러면 나는 과연 언제 숨을 쉴 수 있을까.’

그 생각은 기어이 위험하고도 끔찍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내가 자유로워지려면 어머니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볼테르는 뒤를 돌아 황후궁의 높은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시절, 까마득히 높기만 했던 황후궁의 지붕이 언제부턴가 눈앞에 선명히 보일 만큼 낮아진 기분이었다.

***

향기로운 봄꽃이 만개한 어느 날. 날도 볕도 모두 좋은 어느 날.

그러나 나는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하얀 테이블 위에 차려진 한입 크기의 미니 샌드위치의 맛은 완벽했으나 입맛이 돌지 않고. 새콤달콤한 딸기 주스는 영 텁텁하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앞에는 똥마차가 앉아 있거든!

회귀 전의 날 수십 수백 번 엿 먹였던 크로이젠 공작가의 자유로운 바람, 로이드 크로이젠!

우리는 서로 각자의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나왔다. 그리고 황제 궁의 티 가든(tea garden)에 마주 앉아 있다.

지난 삶에서 13세에 약혼했던 나는 사실 2년 동안은 마냥 행복했다. 딱 2년이 끝이었지만.

나도 저 똥마차의 반반한 면상에 홀렸었고 더구나 바람기 다분한 부드러운 매너가 오로지 나만을 향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로맨틱함에 매료되었다.

내가 정말로 순진했던 거지.

나보다 나이가 일곱이나 연상인 그는 올해로 열 살. 그는 황제의 초대를 받아 조부인 크로이젠 공작의 손을 붙잡고 입궁했다.

벌써 미래가 기대되는 수려한 외모는 기본이고 요망한 눈웃음까지 칠 줄 알았다. 본인의 눈물점이 눈웃음과 합쳐지면 얼마나 치명적인 시너지를 보여 줄 수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만이 칠 수 있는 대범한 웃음이었다.

거기에 부드러운 매너까지 겸비했다. 만약 내가 지난 생에서 그의 온갖 바람기를 겪어 보지 못했더라면 깜빡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과거에, 아니 미래에 많이 넘어갔었고.

하지만 지금의 내 감상은 오직 하나!

‘저 자식, 이때도 이미 싹수가 노랬군…….’

나는 그를 뚱한 눈으로 쳐다보며 무감각하게 빨대를 빨았다. 딸기 주스를 입안 가득 머금었다가 기계적으로 삼켰다.

일부러 외면하고 무시하며 딸기와 샌드위치에 푹 빠진 철없는 세 살 아가를 연기하는 것도 슬슬 화가 날 무렵이었다.

“황손녀께서 많이 피곤하신 듯합니다.”

로이드의 말 한마디에 그만 목구멍으로 향하던 주스가 허파로 넘어갔다.

저거 날 관찰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거야?

“쿨럭!”

요란한 기침과 함께 생각 없이 먹던 딸기 주스를 장렬하게 뿜어 버릴 뻔했다.

“켁켁!”

“아이고! 멜리!”

할바마마가 놀라 내 등을 토닥거렸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시녀들이 달려오기도 전에 로이드는 제 앞에 놓인 냅킨을 들고 달려와 내 입가에 흐른 붉은 딸기 과즙을 조심스레 닦아 냈다.

“괜찮으십니까. 저하?”

심지어 목소리도 미성이다. 와, 저래서 저놈 한창 적에 영애들이 꼴딱꼴딱 넘어갔구나.

“쿨럭!”

“제가 혹시 놀라게 해드린 겁니까?”

세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상대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날카롭게 파악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도저히 열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 저 모습에 콩깍지가 제대로 끼어서 설렌 적이 있더랬다. 젠장.

문제는 로이드 공자님 아니면 죽고 못 산다는 이가 나뿐만이 아니었고 로이드는 그걸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거지.

그게 지금으로부터 5년 후의 미래다.

내가 기침을 멈추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샌드위치를 집어 먹자 할바마마는 내 등을 두드리던 손을 멋쩍게 거두었다.

그리고 정작 무시를 당한 로이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포시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앉는 것을 확인하곤 할바마마가 흡족하게 웃었다.

아, 제발 할아버지…… 저거 똥마차라고…….

“어린애가 사려가 참 깊구먼. 껄껄껄!”

“과찬이십니다. 폐하. 허허허!”

크로이젠 공작이 함께 웃었다.

나는 환장하겠다.

그 와중에 할바마마가 더욱 신이 났다.

“그래서 말인데. 에오넬 황녀의 황태녀 책봉식 이브닝 파티 때에 공식 석상에서 이 애들을 좀 붙여 두었으면 좋겠네만.”

황제의 가벼운 행동과 말투 때문에 얼핏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릴 말이지만 사실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할바마마는 내게 무려 크로이젠 공작가라는 든든한 아군을 붙여 줄 생각인 거다.

물론 크로이젠 공작가와 혼인, 아니 약혼 동맹 좋아. 겁나 든든해. 아주, 나도 쌍수 들고 환영인데 로이드 이 새낀 아니라고!

크왕크왕! 분노한 드래곤처럼 사방팔방 불을 뿜고 싶은 내 심정은 전혀 눈치 못 챈 건지 할바마마가 결정타를 날렸다.

“축하 파티장에서 첫날 로이드가 멜리를 에스코트해 주었으면 좋겠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물론 의자가 높아서 의자 위로 올라가 일어난 것이지만 나름대로 테이블에 앙증맞은 손을 탁! 짚고 일어났다고.

“시뎌! 안 해! 시쪄!”

아, 이 뭉개진 아기 발음은 대체 어찌하여……!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은 발음이지만 나는 꿋꿋하게 얼굴과 목에 힘을 주려 노력했다.

그러자 크로이젠 공작도 로이드도 가만히 있는데 할바마마가 당황해서 난리가 났다.

“아니, 왜?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응? 멜리야, 이 할애비한테 다 말해 보려무나.”

할바마마는 내가 행여라도 의자 위에서 미끄러질까 두 손을 내 앞에서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런데 진짜 다 말하면 들어주시려고요? 그럼 이 약혼 반댈세!

그렇게 외치고 싶다!

하지만 아직 약혼 얘기 제대로 꺼내지도 않았고 그냥 공식 파티 때 에스코트 한번 해서 다른 귀족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두라는 것뿐이지 않은가.

나는 작은 머리를 또다시 팽글팽글 굴렸다. 그러다 내 생각에 가장 세 살짜리다운 답을 찾아냈다.

“……어, 어어…… 그러니까…… 못생겨쪄!”

“못생겼다고? 그, 그건 이 할애비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아니, 그 전에 실례가……. 저 정도면 매우 잘생긴 편이란다. 그러니까…….”

실례고 자시고 실례는 앞으로 저 자식이 나한테 더 많이 할 거고.

“모오오오옷생겨쪄!”

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외치자 로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얼굴에 적잖이 충격이 어렸다. 크로이젠 공작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저 허허 웃었다.

할바마마만 손님을 앞에 두고 몹시 당황해 크로이젠 공작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그러니까 크로이젠 공작. 내, 내가 미안하네. 우리 멜리가 그러니까……. 이거 손님을 초대해서 면목이 어, 음…….”

“괜찮습니다. 폐하. 허허허!”

아무래도 공작님 웃음소리를 보아하니 진심으로 이 상황이 웃기신 모양이다. 그건 다행이었다. 공작이 계속 말했다.

“당사자이신 황손녀님의 의사가 사실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로이드의 에스코트가 싫으시다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려고요.”

그런 공작의 말을 듣던 로이드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모, 못생겼다니…….”

내 말이 적잖이 충격이었나 보다.

그보다 로이드 네가 그렇게 처연하게 앉아서 우니까 정말로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한 것 같잖아…….

아니,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때문에 내가 몹쓸 짓을 한 게 맞긴 한 것 같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드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아직 벌어진 일이 아니니까 일단은 그냥 어른들 장단에 맞춰 줄까?

지금의 로이드는 아직 나에게 잘못한 게 없기도 하고, 크로이젠 공작가라는 아군을 가장 쉽게 얻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붙어 다니기에 나쁘지 않은 외모에 나쁘지 않은 가문. 그렇게 생각하니 썩 괜찮았다.

연애만 그래, 딱 연애만 하자. 아직 명분도 없으니 낌새가 나타나면 그때 바로 꼬투리를 잡아서 파혼하는 거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할바마마의 장단에 놀아 드리기로 했다.

***

깊은 밤 뒤척이다 간신히 잠들었나 싶더니 눈이 떠졌다. 나른하면서도 비현실적인 감각, 꿈이다. 자각몽.

지난 5년, 쉬지 않고 꾼 꿈. 지난 나의 삶이 나올 때도 있었고 내가 죽은 이후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지금처럼.

꿈속에서는 열여덟의 내가 가만히 복도를 걷고 있었다. 황궁 어딘가인 듯한데 어딘지는 모를 어두운 곳을 불빛 없이 걸었다. 하지만 앞을 보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꿈이었으므로.

서늘한 곳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춥지는 않았다. 역시 꿈이었으므로.

한참을 지하로 지하로만 내려갔을 때,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내가 갇혀 있던 냉궁의 지하.

무릇 황족이 냉궁으로 유배를 당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든 실제로든 잘못을 저질렀다는 명분이 있을 때였다. 그럴 때마다 그 황족을 가까이서 모시는 시종이나 시녀가 혼자서 깨끗할 리는 없었다. 피를 묻혀도 함께 묻혔을 것이기에. 그런 시종 시녀들을 가두는 곳.

종종종 걸음을 옮기자 어느덧 눈앞에는 작은 문이 나타났다. 차가운 쇠로 만든 육중한 문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잠겨 있을 줄 알았던 문이 삐걱 열렸다.

내가 멈칫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내 몸을 유령처럼 통과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크로이젠 공작……?’

꿈속의 크로이젠 공작은 늙은 크로이젠 공작이 아니라 그 아들인 젊은 크로이젠 공작이었다. 회귀 전의 내 기억 속에 있던 그 크로이젠 공작.

그의 손에는 기다란 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그가 정면의 둥근 사람 그림자를 향해 무어라 말을 걸었지만 내게는 너무도 희미하게 들렸다. 잡음마저 심했다.

‘뭐지?’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그림자처럼 보이던 인물이 선명해졌다.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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