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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9화 (9/148)

9화

두 시간 전, 할바마마는 내 기분 전환을 시켜 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갔다. 정작 나는 황후의 세력에 한 방 먹였다는 사실이 몹시 뿌듯해서 기분 전환 따위 필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 의사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할바마마와 뛰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할바마마가 나를 정원에 내려놓고는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우리 똥강아지 잡아라아아아아!”였다.

내가 뛰지 않으려 하자 이번에는 “애가 어디 많이 아픈 거 아니지?” 하며 유모와 시녀를 몹시도 닦달하시었다. 유모와 시녀가 퍽 곤란해하는 바람에 내 나이 세 살, 인생 최대의 갈등에 휩싸였다.

나는 뛸 것인가, 말 것인가!

결국 나는 두 시간을 쉬지 않고 뛰었다. 그마저도 할바마마를 잡으러 나온 마론 백작 덕에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처진 채 할바마마에게 업혀 할바마마의 집무실에서 와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비몽사몽 한 와중에 고모님이 찾아오셨다.

“멜리가 체리에의 민티아와 싸워서 이겼다지요?”

“애가 다쳐서 꽁-해 가지고 데리고 나가서 술래잡기하고 놀아 줬는데 아주 야무지게 잘 뛰더구나.”

……할바마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다쳐서 꽁-해 있던 건 할바마마 아니셨습니까? 그래서 나 데리고 나가서 술래잡기하고 놀아 준답시고 내 재롱 구경하신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와다다다 내 속마음과 함께 진실을 외치고 싶다. 하지만 지쳐서 얼굴에는커녕 입술 끄트머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애들이 다 그렇죠.”

아니, 고모! 아닙니다아!

내 억울해서 이대로는 잠이 들 수 없도다.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내가 피곤과 사투하는 동안 할바마마와 고모님이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민티아를 입궁 금지 시키셨다지요?”

“당연하지. 원래 사교계 데뷔도 치르지 않은 어린애가 황궁 안에 수시로 드나드는 것도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었어. 황후의 친지라고 들여보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황후가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눈감아 주니 후작이 분수를 몰라. 언제고 계기만 생기면 못 오게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나와의 헤프닝은 벼르고 벼르다가 운 좋게(?) 얻어걸린 거라는 말씀 맞죠? 약간 억울해질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잠들지 않으려고 낑낑거리자 고모님은 내게 다가와 이불을 잘 여며 주었다.

“으으으!”

몽롱한 와중에도 그 따뜻한 손길이 좋아서 볼에 닿은 손등에 얼굴을 부볐다.

고모님도 내 볼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민티아가 입궁할 수 있는 시기를 내년으로 당겨 주세요.”

뜬금없이? 내 의문처럼 할바마마도 갑작스러운 고모님의 말씀에 고개가 갸웃하시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왜? 이유는?”

“황후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민티아의 입궁 금지를 내년에 풀어 준다면 멜리에게 라벤더궁을 넘기겠다고요. 황궁의 안살림을 담당하는 것이 황후의 일입니다. 사실 궁을 배정하는 것도 황후의 허락 없이는 못 할 일이죠.”

“그건 그렇지…….”

사실 라벤더궁은 황태자가 부부가 서거한 이후로 황후가 호시탐탐 노리면서 볼테르에게 쥐여 주고자 했다. 볼테르도 제 어미를 졸라 라벤더궁을 한시바삐 차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황후는 잡음 없이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볼테르의 황태자 책봉 이후로 미루어 두고 있는 것이었다. 볼테르를 황태자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게다가 어차피 (그들의 뇌내 망상 속에서) 황태자 자리는 볼테르의 차지가 될 터였다. 그러면 라벤더궁을 볼테르가 갖는 것에 대해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할 텐데, 라벤더궁이 욕심난다고 하여 궁의 주인이 사라지자마자 갑작스레 제 아들에게 떡하니 그것을 쥐여 주기에는 모양새가 상당히 좋지 못하니까.

그래서 황후는 일찌감치 나를 라벤더궁에서 쫓아내긴 했으나 섣불리 그곳에 볼테르를 집어넣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난 황태자 자리에 볼테르를 앉힐 생각이 없는데? 그런데 굳이 민티아의 입궁을 앞당겨 주면서까지 라벤더궁을 멜리에게 넘기라 할 필요가 있을까? 볼테르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라벤더궁도 쉬이 차지하지 못할 텐데.”

“그렇다고 멜리에게 그 궁을 선뜻 내주지는 않겠죠. 비워 두면 비워 뒀지. 황태자 책봉식이 끝나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저한테 넘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멜리에게 넘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게 깔끔해요.”

사실 고모님의 성격에 그게 다는 아닐 것 같지만.

황후는 자신의 의붓딸에게 자존심을 굽히면서 거래에 응했을 거다. 한데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없던 것을 놓고 의붓딸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도 참 볼만할 터였다.

고모님이 원하는 것도 아마 그것 아니었을까?

할바마마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흐음.” 콧소리를 내다가 고모님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어느 궁으로 갈 생각이냐?”

“아마 수정궁으로 갈 것 같네요.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라벤더궁에 기거하지 않으셨던 역대 황태자들께서 그리하셨듯이. 황후가 수정궁을 내놓을지가 문제긴 하지만요.”

고모님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게 내가 꿈결에 잘못 듣고 있는 건가 뭔가 묘하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난 회귀 전, 어린 시절을 라벤더궁에서 보낸 기억이 없었다. 아니, 그런 적이 아예 없었다. 당시의 나는 지금 내가 머무는 궁인 서월궁에서 냉궁으로 옮기기 직전까지 살았다.

미래가 아주 많이 바뀔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

흐릿한 의식 속.

한동안 다시 얻은 삶을 사느라 잊고 있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부디 소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목덜미에 날카롭고 차가운 것이 꽂혔다.

눈이 사르르 감겼다.

“이 불충은 목숨으로 갚을 터이니…….”

소름 끼치게 차가운 감각이 온몸을 뒤덮었다.

그의 품에 안겨 꺼져 가는 의식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꿈이라 그런 것인지 나는 주변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제삼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목덜미에 꽂힌 단도의 은색 빛깔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돌고래를 형상화한 유려한 곡선, 칼 손잡이 끝의 한쪽 면을 장식한 새파란 보석 장식이 인상 깊은 아름다운 단도였다.

목을 타고 축축하게 흐르는 피. 비릿한 냄새. 그리고 그 순간, 파지직!

단도 끝의 파란 보석에 쩌적쩌적 금이 가더니 가루처럼 부서졌다.

“윽!”

그 순간 어딘가로 강하게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강제로 내 몸을 구겨 반지처럼 작은 구멍 속으로 쑤셔 넣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을 때는 어느새 내 방 침대 위였다.

황급히 손을 눈앞으로 가져다 대자 고사리처럼 작은 손이 보였다. 꼬물꼬물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그 손은 분명 세 살의 내 것이었다.

한바탕 악몽을 꾸고 일어나니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과거이며 무엇이 미래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손바닥은 물론이고 등줄기까지 식은땀에 흠뻑 절어 있었다.

그런 나를 유모가 번쩍 들어 품에 안고는 등을 가만히 토닥거렸다.

“저런, 무서운 꿈을 꾸신 모양입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토닥토닥 두드리는 손이 내 등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포근했다. 그렇게 안겨 있으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르가 보고 싶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죽은 이후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먼저 죽은 내가 이기적이었던 걸까?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 주었던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이번 삶에서는 볼 수나 있을까?

내가 만약 미래를 바꾸겠다며 하게 될 사소한 행동 하나로 이번 삶에서는 그를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민티아와의 일로 깨달았다. 어쩌면 내 행동이 불러올 나비효과 때문에 내 의도와 상관없이 그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이다.

사실 회귀 전의 아르와는 열 살 때 우연히 처음 만났으나 그것이 그가 내 호위기사가 되었던 이유는 아니었다. 어쩌다 그가 내 호위가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어른들이 붙여 준 대로 곁에 두고 있었을 뿐.

그날 그와 우연히 만났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한다면 다시 한번 우연을 가장해 그날 그 자리에 다시 찾아가 만나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마저도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역사 수업을 땡땡이쳤던 어느 화창한 날이라는 의미 없는 기억뿐이다.

내가 미래를 바꾸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난 삶과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과연 그때와 같은 인연을 다시 이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흐윽!”

“아이고. 얼마나 무서운 꿈을 꾸셨으면 이리 서럽게 우실까……. 쉬이- 그저 꿈일 뿐이에요.”

유모가 내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래, 아르를 찾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났다.

***

보름가량 질질 끌던 대전 회의 결과가 나왔다. 황태자 자리에 관한 이 길었던 대전 회의는 에오넬 황녀가 황태녀가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황궁 안팎으로 황태녀 즉위식 준비로 한창 바쁘고 들뜬 요즘 같은 시기에 황궁에서 유일하게 서릿바람 휘날리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황후궁이었다.

은은한 허브향이 감도는 황후의 다과실. 황후에게서는 무언가 하나 걸리기만 한다면 그 자리에서 찢어발길 것처럼 살기가 풍겼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몹시 평온했다.

볼테르는 그런 제 어미 앞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슴을 졸였다.

‘차라리 빨리 혼나고 싶다.’

그는 자신에게 황제가 되라고 말하는 어머니가 부담스러웠다. 그저 황자로, 황족으로 일생 편안하게 놀고먹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는 그에게 제왕학을 공부하기를 강요했다. 제국의 제2황자로서 훗날 형님을 도와야 한다며 정치에 대해서 이것저것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이곳 다과실에서 남몰래 정치학과 제왕학 같은 책을 읽게 했다.

그때는 황태자였던 형님도 버젓이 살아 있을 때였다.

멍청하긴 해도 어머니에 관해서만큼은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갔다. 그만큼 그녀의 앞에만 서면 긴장을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당시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볼테르는 제 어미의 의중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형님을 돕는 착한 아우라는 자랑스러운 일이라면 제왕학은 형님과 함께 아바마마 밑에서 배우면 되지 않겠는가! 왜 어머니는 저에게 몰래 가르침을 내렸겠는가. 그것은 형님을 밀어내고 저를 황태자 자리에 앉히려고 어미가 수를 쓰는 것이 아닐까?

그걸 명확하게 깨달은 건 처음 공부를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열세 살 때였다.

그 나이도 사실 스스로 판단하고 강압적인 어미에게 대들 수 있을 만큼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머니 뜻대로 황제가 되면 이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이고 나자 거짓말처럼 편해졌다. 어머니도 그에게 자애롭게 웃어 주었다.

험한 것은 어미가 다 치워 줄 터이니 너는 어미를 위해 황제만 되어 달라고, 어미를 이 제국의 태후로 만들라고.

어머니를 받아들이니 매 순간 가슴을 옥죄던 목줄이 느슨해지고 드디어 숨통이 틔었다.

모든 것은 일사천리였다.

어느 날 모든 것이 예견되었다는 듯 배다른 형님은 마차 사고로 명을 달리했고 아직도 그 진상은 규명하지 못했다. 그것이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정인 후작가와 그를 따르는 무리의 소행일 것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증거도 증인도 그 무엇도 남지 않았을 뿐.

그렇게까지 해서 만들어 낸 황태자 자리의 공석.

볼테르는 머리가 어지러워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조심스레 키옌의 눈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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