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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8화 (8/148)

8화

“자세히 말해 보아라.”

“아가씨가…….”

시녀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는 동안 키옌은 이성을 놓지 않기 위해서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맙소사, 황족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니!

황후는 분노와 초조함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일단 애를 옆방으로 데려가 치료하게.”

당장에라도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아냐며 궁둥이를 발가벗겨 찰싹찰싹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황궁이고 보는 눈이 많았다. 게다가 볼테르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이 순간, 친정 식구와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도 좋을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황후에게는 사교계 대리인으로 민티아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

민티아가 치료를 받으러 옆방으로 건너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차츰 이성이 돌아왔다. 황후는 시녀들 앞에서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너는 지금 당장 후작저로 가서 아버님께 이 사실을 알려라. 오늘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돼.”

“예.”

시녀 하나가 공손히 대답하며 이 살얼음판 같은 자리에서 도망치듯 나갔다.

“너는 아멜리아의 궁에 포션을 세 병 가지고 가서 이번 일이 잘 넘어가도록…….”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황후 마마, 에오넬 황녀님이 들었습니다.”

키옌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계모와 의붓딸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올해로 서른이 넘은 에오넬과 곧 마흔을 바라보는 키옌은 황궁에서도 알아주는 견원지간이었다.

키옌이 소설 속 영악한 계모처럼 자신을 거부하는 의붓딸에게마저 상냥한 계모를 연기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에오넬도 그녀처럼 사교계에서 구를 만큼 굴러서 되받아치는 것이 몹시 능숙했다.

무엇보다 애초에 둘의 나이 역시 모녀지간보다는 나이 차가 좀 있는 친구 사이에 더 어울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둘을 나란히 놓고 보게 되면 모녀 사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잊곤 했다.

그 덕분에 키옌의 이미지는 다 큰 제 또래의 의붓자식들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는 이상한 계모가 될 뻔했다.

다행히 늦기 전에 키옌은 에오넬과 황궁 안에서 기 싸움을 하는 것을 포기했고 간신히 후작 영애 시절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건 키옌은 서둘러 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자리에 앉아 표정을 관리했다.

“들어오세요. 황녀.”

***

한 시간 전, 에오넬이 점심을 먹을 때 즈음에 황궁에서 소식이 하나 날아왔다.

“멜리는? 아바마마 말씀처럼 정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피떡이 되었다더냐?”

“어…… 그것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셨다고……. 되레 맞자마자 그 자리에서 마주 따귀를 때리고 귓불을 잡아뜯어서 민티아 아가씨를 울렸다고 하던데요. 저하는 음…… 지금은 멀쩡하시대요.”

오늘 밤 경기는 아마 체리에 후작가의 민티아 아가씨가 일으키지 않을까요? 시녀는 그런 뒷말을 꾹 삼켰다.

그때 에오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화, 황녀 전하?”

“아아, 역시 내 조카야.”

에오넬이 눈가에 찔끔 흐른 눈물을 손끝으로 훔치며 키득거렸다.

“때린다고 마냥 얻어터지면 황족이 아니지. 잘했다. 은혜고 원수고 뭐든지 되로 받으면 말로 갚아 줘야 하는 법이야. 이 고모만 믿어라. 고모가 뒤처리는 알아서 다 해줄게.”

그리 말하며 에오넬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황후의 궁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키옌 황후의 궁.

여기 오는 길에는 아바마마의 시종과 마주쳤는데 그가 전한 깨소금 같은 황명도 함께 들고 왔다. 에오넬은 그 깨소금을 황후의 면전에 직접 뿌려 주리라 다짐하며 황제가 보낸 시종을 기어이 돌려보냈다.

에오넬은 황후가 올 때까지 안내받은 방에 앉아 황후를 기다렸다. 시녀들이 준비해 준 과일차를 4분의 1 즈음 마셨을 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황후가 들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공작 부인.”

황후는 부러 에오넬의 황녀 지위가 아닌 공작 부인이라는 작위를 언급하며 인사를 했다. 사실 맞는 말이긴 했다. 게다가 애초에 혼인을 포기하고 공작 부인으로 봉작을 받아 출궁하는 것을 선택한 건 에오넬 본인의 의사였다.

황후의 인사를 받은 에오넬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 오래 기다린 건 아닙니다. 황후마마.”

에오넬 역시 황후를 어마마마라고 예의상으로도 부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황궁에는 어쩐 일입니까?”

이미 이유를 알면서도 황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저야 늘 그렇듯 아바마마께 문안을 드리려 입궁했다가 오랜만에 황후마마도 뵐 겸 왔지요. 딸이 아버지 집에 오는 데 특별한 이유랄 게 있겠습니까?”

내가 너를 보러 왔겠냐? 에오넬의 눈초리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둘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스파크가 파지직 튈 것 같았다.

“그렇군요. 기왕 걸음을 했으니 멜리도 보고 가세요. 나와 그 아이가 서로 피가 통하지 않았다 하여도 할미로서 그 아이가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랍니다. 그대도 들어 알겠지만 오늘 멜리가 많이 마음이 상했을 거예요. 제 편을 들어 줄 이를 손꼽아 기다릴 겁니다.”

“그리 이르시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습니다. 부모도 ‘할머니’도 다 잃고 이 넓은 황실에 혈육이라곤 할아버지와 고모 둘만 남은 아이를 친고모인 제가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긴답니까.”

.

그렇게 말하면서 에오넬은 아멜리아의 혈육의 범주에서 볼테르 황자를 은근슬쩍 빼버렸다.

황후의 표정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자 에오넬은 적당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곤 갑자기 떠오른 듯 말했다.

“아, 오는 길에 아바마마의 시종이 전하려던 황명을 제가 대신 가져왔는데…….”

“황명?”

키옌은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멜리아는 언제나 황제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 아멜리아 때문에 황제가 대체 무슨 황명을 내린 걸까.

키옌은 침을 꼴깍 삼켰다.

“별것 아닙니다. 그저 민티아 영애의 입궁을 사교계 데뷔 전까지 금지한다고 하는 겁니다. 황족에게 손찌검한 것치고는 엄청난 선처이지요. 하긴, 아직 어려 뭘 모르지 않습니까. 황후 마마께서 자주 불러 담소도 나누고 마마께서 이것저것 가르침을 내린다는 소문을 들어 아이가 몹시 조숙한 줄 알았습니다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인가 봅니다.”

네가 가르쳤다는 교양 수준이 타인에게 다짜고짜 따귀를 날리는 것이었냐며 에오넬은 그 틈새를 노려 다시 황후에게 훅을 날렸다.

키옌의 멘탈은 에오넬이 툭 던진 공격에 순식간에 깎여 나갔다.

에오넬은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려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리 귀애하시는 친정 조카를 이제 볼 수 없게 되어 어찌하면 좋습니까. 마마의 적적함을 달래 줄 유일한 아이라 소문이 자자했는데.”

에오넬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연기를 했다. 둘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척이나 진심 어린 위로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에오넬의 비아냥거림을 알아들은 황후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불러 주신다면 제가 자주 들러서 대신 말벗을 해드릴 터이니 이 딸을 자주 불러 주세요. 어마마마.”

드디어 에오넬의 입에서 제 계모를 어마마마라 칭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키옌의 마지막 정신력도 파사삭 깨져 버렸다.

“황녀야말로 출궁하여 넓은 저택에 혼자 사는 것이 적적하고 외로울 텐데 자주 와서 이 어미와 담소도 나누고 그래요. 아직 어린 볼테르와 멜리가 있어서 황궁은 언제나 활기차답니다. ‘황녀는 모르고 있겠지만’ 사실 아이가 있으면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몰라요.”

황후가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감추며 인자하게 웃었다.

“예. 어마마마. 자주 찾아뵐게요. 그나저나 아직 아바마마께 문안 여쭙기 전인데…….”

에오넬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후는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화를 참지 못하고 일어나는 것인가? 에오넬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에오넬은 키옌의 기대대로 일어나기는커녕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다.

“제가 이따가 아바마마께 가서 어마마마의 친정 조카님에 대한 아바마마의 노여움이 풀리도록 잘 말씀을 드릴 터이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아바마마께서 ‘다른 이’의 말은 몰라도 제 말은 잘 들어주시잖습니까.”

에오넬은 키옌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악착같이 끄집어내서 짓뭉개 버렸다.

하지만 키옌에게는 에오넬의 제안이 그 자존심도 잠시 접어 둘 만큼 솔깃한 것이 사실이었다. 황후에게는 민티아의 존재가 절실했으니까.

귀족들의 여론을 형성하기에 사교계만큼 좋은 곳은 없다. 그것도 굵직한 행사가 아니라 자잘한 모임 말이다. 오히려 커다란 모임보다는 작은 규모의 모임이 은근슬쩍 아군을 만들기에 유리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황후가 참석하기 힘든 사교계 모임이었다.

황후라는 존재는 사소한 사교계 활동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너무나 거물이었으니까.

역대 황후들은 그 일을 황녀를 통해서 했으나 키옌에게는 그 역할을 해줄 딸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아이가 민티아였고.

사람들은 으레 정치판을 공작이, 후작이, 백작이…… 대전 회의에 직접 들어 황제를 알현하고 정사를 제 손으로 돌보는 이들이 움직이는 줄, 그들끼리의 이해타산에 얽혀 움직이는 줄로 착각한다.

하지만 그런 권력자들을 움직이는 건 공작 부인, 후작 부인, 백작 부인…… 그네들의 안주인들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녀들이 작은 티파티에서 교류하며 물어 가고 물어 오는 고급 정보들이 그들의 남편을, 아들을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움직이게 했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제 자존심과 야망 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마음속에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나 눈앞의 의붓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어찌할까요?”

드디어 키옌은 결심을 했다. 순간의 자존심 때문에 대업을 망칠 수야 없지. 볼테르를 황제로 만들어 기필코 오늘의 일을 설욕하리라.

키옌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숨겼다.

“그래서 황녀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에오넬은 드디어 처음으로 꾸미지 않은 미소를 만면에 활짝 머금었다.

“동쪽의 라벤더궁을 아멜리아에게 주세요. 황태자 책봉에 관한 문제로 연일 대전 회의가 시작되면서 그곳을 정리하는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제 오라버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궁입니다. 아멜리아에겐 그리운 부모의 흔적이 있는 곳인데 그리 정리하면 아이가 몹시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라벤더……궁을?”

에오넬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해서 키옌은 순간 자신이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라벤더궁이 어디인가! 보라색 라벤더 후원이 딸린 동쪽의 커다란 궁. 황제의 궁과 가까운 몇 안 되는 궁 가운데 역대 황후들이 기거하는 궁 다음으로 거대한 궁이라 대대로 황태자들이 기거했던 궁이다.

황후의 얼굴이 단박 일그러졌다. 볼테르가 황태자가 되었을 때 그가 이유도 없이 라벤더궁을 두고 다른 궁으로 가게 된다면 모두가 의아해할 터였다.

그러나 에오넬의 제안을 거절하자니 조실부모한 불쌍한 의붓손녀에게 아주 못되고 매정한 계조모로 비칠 것 같았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키옌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볼테르를 화원이 없고 석정(바위와 자갈로 만든 정원)으로 꾸며진 수정궁으로 보낸 다음 꽃가루 알레르기든 뭐든 생긴 척하도록 하면 된다. 그러면 라벤더궁을 넘겨도 자존심이 구겨지지는 않을 거다.

황후는 계산을 마쳤다.

“그래요. 그렇게 하고말고요. 멜리가 어디 그냥 아이랍니까. 황제 폐하의 아픈 손가락이 아닙니까. 폐하 곁에 두면 폐하도 좋아하시겠지요.”

토해 낸 피를 다시 삼키어 내는 심정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아바마마께로 가보겠어요. 어마마마. 아 참, 아바마마의 눈에 띄기 전에 조카 따님을 얼른 퇴궐시키는 것이 좋을 거예요. 제가 기껏 설득해 드렸는데 괜히 아바마마 눈에 띄어 수포로 만들 수야 없지 않겠어요?”

에오넬은 마지막까지 키옌의 심장을 비틀어 뜯어 버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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