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황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는 죽은 전 황후의 친정인 파피란 공작가와 죽은 황태자비의 친정인 세르피스 후작가가 그 ‘사고’에서 ‘사건’의 냄새를 맡기 전에 볼테르를 황태자로 만드는 일만 남았다.
일단 볼테르를 황태자로 만들어 중립을 지키는 귀족들을 끌어들인 다음 파피란 공작가와 세르피스 후작가의 기세를 눌러야 했다.
그들의 기세를 눌러야 자신들이 안전할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세 살짜리가 걸림돌이 되다니.
“젖비린내 나는 애새끼 주제에! 씩씩!”
키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방을 엉망으로 만들며 제 분풀이를 했다.
***
볼테르, 그 멍청이가 돌아가고 나서도 할바마마는 카드놀이를 멈추지 않았다.
나도 이젠 제법 이 놀이에 익숙해졌다.
물론 게임 규칙에 익숙해진 게 아니라 승부에 초연해져 멍하니 짝을 맞추며 세 살짜리 지능을 흉내 내는 것 말이다.
이번에도 내가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내가 이겼다기보다는 할바마마가 아슬아슬하게 져주었다고 해야 하려나?
“아이고. 우리 애기를 할애비가 정말 못 당하겠구나. 껄껄!”
할바마마가 카드를 내려놓고 나를 덥석 끌어안아 품에 가두고 부비부비 볼을 문질렀다.
“꺄아! 이꺼 시뎌.”
할바마마가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얼렀다.
“아니, 왜?”
왜긴요. 이미 나는 지쳤다고요.
“잼엄서.”
아무리 생각 없이 해도 거저 이기니 영 재미가 없다. 게다가 이미 아무 생각 없이 짝만 맞추는 놀이에는 질릴 대로 질려 버렸다.
나는 나를 앞에 놓고 어쩔 줄 모르는 할바마마와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하바마마 모태. 시시해.”
“이 할애비가 너무 못해서 시시해?”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러니 그만하시지요. 할바마마!
내가 할바마마와 그렇게 기 싸움을 벌이고, 그 사이에 콕 끼어 버린 시종장 마론 백작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으며, 카드 섞기 담당으로 들어온 시종은 책상에 흩어진 카드를 쳐다보고 ‘이걸 섞어 말아?’ 하며 안절부절못할 때 즈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폐하.”
모두를 구원하는 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방문으로 쏠렸다.
“크로이젠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느냐? 들여라!”
크로이젠 공작.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크로이젠 공작 가문은 개국 공신 가문이었다. 내가 회귀하기 전에 마지막까지 황실에 충성을 바쳤던 가문.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그런데…….
저 할아버지는 누구?
내 기억 속의 크로이젠 공작은 지금 눈앞의 저 할아버지에 비해 훨씬 젊은 사람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분은 어리셨을 적에 황태자였던 아버지의 예동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저 할아버지는…… 아무리 봐도 우리 아빠 친구는 아닌 것 같고. 설마 그 전 공작?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온 공작은 지팡이 없이는 한 발짝도 걷기 힘들어 보였다.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세었고 암갈색 눈동자는 살짝 백내장 기가 있어 언뜻 회색처럼 보였다.
“폐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아직 건강하지. 어서 앉게나. 자네는 요즘 괜찮은가?”
할바마마가 묻자 공작은 시종이 막 가지고 온 의자에 털썩 앉았다.
“허허허. 저야 늘 똑같지요. 조만간 아들놈이든 손자놈이든 작위 물려주고 영지 별장으로 내려가렵니다.”
“에잉! 자네가 그 말만 10년째일세. 이젠 안 믿어.”
할바마마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아닙니다. 할바마마. 제 기억이 맞는 거라면 크로이젠 공작이 내년이든 내후년이든 바뀌어요. 우리 아빠 친구로.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으므로 나는 그냥 모르는 척 멀뚱멀뚱 공작을 쳐다보았다.
“이런! 황손녀님도 계셨군요.”
“허허! 예쁘지? 요즘 아주 부쩍 자란 게 보인다네. 이것도 참 잘하고.”
할바마마는 대놓고 카드를 공작에게 보였다.
그 말에 숨겨진 요지는 이거였다.
‘이 놀이가 뭔지 알지? 고로 나는 얘를 미래의 황제로 만들 생각인데 너도 알아들었으면 앞으로 누구 편에 붙을지 잘 생각해야 할 거야.’
노안과 백내장 기운이 있는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그것이로군요.”
“허허허! 제 아비를 닮아 제법 한 실력 한다네.”
할바마마가 껄껄 웃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게임의 추천 연령이 12세이옵니다. 너무 어려울 터인데 잘 노신다니 그것참 좋으시겠군요.”
공작이 알아들었으니 적당히 하라며 돌려 깠다.
하지만 우리 할바마마께서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추천인 게지 꼭 그 나이에만 하라는 법 있는가? 내 새끼지만 좀 천재인 것 같네.”
잠시 말을 끊은 할바마마가 나를 안아 공작의 정면 자리, 책상 위에 앉혔다.
“크로이젠 공작. 이 애가 탐나지 않는가?”
응? 탐나? 뭐가?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나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할바마마를 쳐다보다 공작을 쳐다보았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여기서 성은이 왜 나와? 응?
“그래. 그래야지.”
할바마마가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손자놈 초상화와 단자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이거 뭐야? 기분 묘해! 초상화와 단자라니!
할바마마? 지금 당사자 의견도 안 물어보고 이러기 있기 없기?
내가 기억도 없을 때 정했던 정혼자가 사실은 고모님이 정한 게 아니라 할아버님이 정해 놓고 돌아가셨던 거란 말이야?
그랬다. 미래(?)의 나에겐 사실 빌어먹을 약혼자가 있었다.
지금 눈앞에 앉은 크로이젠 공작의 손자, 그러니까 다음 대 크로이젠 공작의 차남인 로이드 폰 크로이젠. 그러니까 내게는 ‘아빠 친구 둘째 아들’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 새끼가 빌어먹을 새끼인 이유는 자유로운 영혼……. 자유로운 영혼이란 별명은 사실 심각하게 완곡한 표현이었다.
까놓고 얘기하면 그냥 바람기가 몹시 심했다. 본인은 바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얼핏 그의 변명을 들으면 바람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신은 그냥 세상 모두에게 친절했을 뿐. 모두에게 웃음이 지나치게 헤펐던 것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가 말하는 ‘모두’라는 사람의 범주는 레이디 한정이다.
그랬다. 그는 뭇 여자들을 착각하게 만드는(?) 마성의 힘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본인도 원치 않는 스캔들을 언제나 몰고 다녔고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만일 그가 공작가의 차남이 아니었고 내 약혼자가 아니었다면 사교계에서 바람둥이로 매장당했으리라.
그래, 거기까지는 아주아주 최대한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친절한 게 죄인가.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상대로 착각에 빠지는 여자도 어쨌든 정상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걸 보고 자기 일 아니라면서 저들 재밌을 대로 소문을 내고 부풀린, 입이 싼 자들도 마찬가지고.
내가 회귀 전에 그에게서 대신 떨궈 준 영애만 과장 좀 보태서 백 명은 넘지 않았을까?
로이드는 바로 이게 문제였다. 제가 스스로 떼어 내는 게 아니라 내가 대신 떼어 냈다는 것!
한 날은 내 앞에서 “로이드 님은 저를 사랑하세요. 저도 로이드 님을 사모해요.”라고 당돌하게 지껄인 백작 영애도 있었다.
로이드는 ‘대체 내가 언제?’ 하는 눈빛으로 나를 향해 울상을 지었다.
그렇담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오해라고 저 백작가의 정신 나간 여자애한테 말을 하라고! 이 머저리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나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보다 먼저 그 미친 여자가 외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파혼해 주세요.”
라고.
그 황당하고 무례하며 황족을 상대로 버르장머리까지 없는 요구에 나는 그만 두 연놈의 따귀를 양손으로 시원하게 쫙쫙 후려갈긴 다음 백작 영애가 쥐고 있던 양산을 냅다 빼앗아 로이드의 소중한 곳을 있는 힘껏 올려쳤다.
그러자 백작 영애는 “꺄악! 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고 로이드는 입에 거품을 물고 뒤집어졌다가 억울하다며 내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내 호위기사였던 아르는 그 자리에서 장갑을 벗어 로이드의 얼굴에 던졌다.
당연하게도 그날 정원에서 로이드는 아르의 손에 곤죽이 되었다.
이튿날 고모님은 백작가와 공작가에 각각 항의서를 보냈고, 공작가에서는 그 일을 조용히 묻어 달라고 고모님께 싹싹 빌었다. 그 덕분에 평민 출신 주제에 공작가 차남을 죽기 직전까지 팬 아르도 무사했다.
그런고로…….
할바마마! 이건 아니야. 그 새낀 똥마차야!
내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할바마마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자 할바마마가 내 얼굴에 자신의 볼을 부볐다. 볼이 눌려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부부부!”
“허허허. 이 할애비가 좋은 가문에서 좋은 신랑감 점찍어 놨다가 너 주마.”
아니야. 할바마마! 그거 굴러가지도 않는 똥마차라고오오오!
그렇게 내 나이 세 살. 미래의 훌륭한 쓰레기와 약혼이 정해졌다.
***
오늘도 나는 아침을 먹고 할바마마의 궁으로 향했다.
유모의 손을 붙잡고 아장아장 걸어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
응? 안 올라가?
계단을 향해 뒤뚱뒤뚱 달리려는 나를 유모가 번쩍 안아 들었다.
“오늘은 폐하의 집무실로 가지 않습니다.”
“그럼?”
“대전입니다.”
곧 내 앞에 육중하고 붉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질반질하게 칠한 나무로 테두리를 둘러싼 문은 가운데가 붉은 벨벳으로 덮여 있었고 문 하단에는 반짝반짝한 보석이 넝쿨처럼 박혀 있다.
그 거대한 문 앞을 흰 제복을 입은 기사 둘이 지키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수시로 지나쳤던 곳이었는데 그때는 이렇게 거대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내가 세 살로 돌아가 몸집이 작아지고 이 앞에 서니 이 거대한 위용에 짓눌리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곧 저만치서 발소리가 들리자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과 내 시녀들과 유모가 그곳으로 몸을 돌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일제히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숙이는 그 모습이 장관이라 나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둘러보았다.
곧 할바마마가 나를 향해 두다다다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이고오오! 내 이쁜 새깽이가 이 할애비보다 먼저 왔느냐? 춥지?”
아뇨. 난방이 빵빵해서 더운데요. 이 껴입은 드레스하고 여우 가죽 망토 좀 보세요.
내가 양팔을 쭉 벌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할바마마가 내 양 겨드랑이에 두 손을 쑥 집어넣고 들어 올렸다.
“들어가자!”
할바마마의 가슴팍에 기댄 채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시야가 우뚝 높아져 기분이 좋았다.
곧 시종이 대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황제- 폐-하 납-시오오오오오!”
커다란 나무 기둥 가운데가 쩍 갈라지며 안을 향해 두 짝의 문이 활짝 열렸다.
안에는 네 공작을 비롯해 여러 쟁쟁한 귀족들이 작위 순서대로 앉아 있다.
그런 그들이 문이 열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입구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