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웬 이사? 토끼 눈이 된 황제를 빤히 쳐다보며 볼테르가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듯 답했다.
“형님이 쓰시던 황태자궁이 새 주인을 맞으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는 대놓고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애초에 스스로가 속내를 드러낸다는 자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 태도가 몹시 자연스러워 자칫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할바마마는 그런 볼테르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걸 왜 네가 신경을 쓰느냐?”
“예? 당연히 신경을 써야죠.”
“그게 어째서 너에게 당연한 일이냐 물었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챌 법도 하건만.
볼테르가 지금 열여덟. 내가 회귀 전에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가 열여덟, 다시 말하면 이는 현재 내 정신적 나이다. 그러니까 딱 지금의 볼테르와 같은 나이였다.
나도 지금 할바마마의 말을 대충 알아듣겠는데! 저런 멍청이에게 당했던 과거의 내가 너무나 수치스럽다.
죽어랏! 과거의 나! 흑흑. 아, 과거의 나는 이미 죽었구나.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물먹고 있는 볼테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속이 가라앉았다.
황제가 다시 일갈했다.
“누가 그러더냐? 황태자 책봉식이 이번 여름 전에 있을 거라고.”
그제야 볼테르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어, 어마마마께서……. 아직 비밀이라는 거 압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황제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 옆에 선 마론 백작은 그 아무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왜 네 멋대로 생각하느냐?”
황제의 말대로 시종장인 마론 백작도 황태자 책봉에 관해서는 오늘 처음 듣는 사실이었을 거다.
그도 그럴 게 고모님과 이야기할 때 마론 백작을 내보냈으니까.
그래도 마론 백작은 아마 내가 날마다 여기 와서 그 카드 게임을 하고 노는 걸 보면서 어렴풋이 할바마마의 심중을 깨달았을 거다. 그리고 때가 머지않았음을 짐작했을 것이고.
할바마마가 나와 카드 게임을 하고 ‘놀아 주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황제’와 황실 적통 핏줄, 황태자의 자식인 ‘황태손’이 애초에 귀족들의 후계자 교육용으로 고안된 전략게임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이 보고, 소문을 내는 것이 중요한 것. 그러므로 황제가 마음속에 정해 둔, 황위를 물려줄 자식은 황자도 황녀도 아닌 황태손, ‘아멜리아 플라티나 체르무트’라는 것.
그런데 지금 열여덟이나 먹은 황족이 그걸, 눈앞에 펼쳐진 나와 이 카드 더미에 대해 못 알아챈다는 건 좀 심각한 문제였다.
황실 물을 18년이나 처먹었으면 황제의 말이 없더라도 이 행동이 나타내는 의미를 알아 처드셔야 한다고!
할바마마의 호통에 볼테르 숙부는 입을 꾹 다물고 마론 백작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마론 백작은 오늘 안 사실조차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 얼굴에 볼테르의 얼굴이 종잇장 구겨지듯 구겨졌다.
“그게 중요합니까? 누가 안다고 한들 뭐가 바뀝니까?”
아이고야……!
갈수록 가관이다! 그걸 귀족들이 알면 바뀌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정치가, 황실이 아주 그냥 개 난장판이 될 거라고!
할바마마가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갈 듯 휘청였다.
“폐하!”
“하바마마!”
“아바마마!”
볼테르도 놀라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가 책상을 짚은 두 팔이 자연스레 내 코앞으로 와 있었다.
‘저걸 확 물어뜯을까?’
난 세 살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주 찰나의 충동이 실행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려 볼테르의 팔뚝을 있는 힘을 다해 물어뜯었다.
으드득!
아주 만족스러운 소리였다.
“끄아아아악!”
볼테르가 비명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동시에 그 팔을 물고 있던 내 몸도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앗! 이걸 생각 못 했네.
그래도 등 뒤에 푹신하게 깔린 방석 위로 엎어져 다행이었지만 아픈 건 아픈 거였다.
혈기 왕성한 18세 남자가 휘두르는 팔에 냅다 뒤로 넘어갔으니 안 아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울었다.
“으애애애애앵!”
이게 바로 영유아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수틀리면 운다.
“폐, 폐하! 어의! 어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백작을 할바마마가 불렀다.
“되었다. 소란 떨 것 없다. 아이고고.”
할바마마가 손을 휘적휘적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노기마저 서린 음성이었다.
할바마마는 입 모양으로만 울고 있던 나를 허벅지 위에 앉힌 채로 다리를 둥개둥개 흔들었다.
둥개둥개.
자, 이제는 마저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내가 얌전히 앉아 있자 할바마마가 볼테르 숙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할바마마의 얼굴에 대놓고 쓰여 있는 네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할많하않.
볼테르 숙부는 도무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모양새로 엉거주춤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이 뭔진 몰라도 크게 잘못했다는 걸 알긴 아는 눈치라는 것이다.
“말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황후에게 물어보거라.”
“어마마마께요?”
“그래. 황후한테. 나는 네게 해줄 말이 없구나. 내가 대놓고 흑심을 드러내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무에 있겠느냐. 네가 네 무덤을 판 것을. 오늘 일을 많은 궁인이 보았다. 그들이 떠들겠지. 네가 오늘 황제의 진노를 샀노라고. 몹시 경솔했다고. 황태자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바마마가 이것이 자기 생각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실 방금 말한 생각, ‘볼테르는 황태자감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진심이리라.
처음부터 황위는 내 것이었다. 할바마마가 황제였을 때부터.
지난 삶에서는 그것이 고모님의 뜻인 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일찌감치 알았던 게 아니라 죽을 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나가 보거라.”
할바마마가 볼테르 숙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시종장 마론 백작이 황자를 문밖으로 안내했다.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때마침 고개를 들던 숙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볼테르 숙부를 향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히죽히죽 웃었다.
볼테르의 두 주먹에 꾹 힘이 들어갔다.
그가 이를 꽉 물고 밖으로 나가는 동안 나는 할바마마의 무릎 위에 앉아 둥개둥개 흔들렸다.
“우리 멜리야. 잘 보고 배워 두거라. 이번 여름 전에 황태자 책봉식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누가 안다고 한들 무엇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저놈 말은 사실이 아니란다.”
나는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경청하고 있었다.
“애요?”
왜냐고 물으려던 발음이 새어 버리는 바람에 내가 세 살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런, 실수.
아니, 그보다 이런 얘기가 세 살짜리한테 무릎에 앉혀 놓고 들려줄 이야기야?
“황태자 책봉이 여름 전에 이루어질 것을 귀족들이 알면 패를 나눌 것이다. 차기 황태자 자리에 누구를 앉힐 것인지를 놓고.”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나는 미래에서 이미 겪은 사실이었으나 할바마마에게는 아니다. 나는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할바마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나의 다음 대 황제로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떠보겠지. 어느 줄에 서야 할지 재어 보기 위해서. 혹은 자신이 지지하는 황족을 위해서 지지하지 않는 황족을 음해하며 온갖 권모술수와 모략이 판을 칠 게다. 너와 에오넬과 볼테르 셋 중 어느 쪽이 정치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사라져야 그 싸움이 끝이 나겠지.”
할바마마는 본 적도 없는 미래일 터인데 마치 나와 같은 것을 본 듯 생생하게 그려 내는 읊조림에 불현듯 눈앞이 새빨개졌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황궁의 벽은 늘 피로 물든 것처럼 새빨갰고 하늘은 언제나 새카만 비명으로 가득했다.
고관대작부터 빨래터 하녀까지, 자의든 타의든 이 정쟁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절반 이상 목이 잘렸다. 목뿐 아니라 혀를 자르고 손목을 자르고 인두로 지지는 것도 숱하게 보았다. 궁에서 가장 넓은 호수 정원이 딸린 빈 전각에서 익사한 시체가 발견되는 일은 예사였다.
누군가는 한날한시에 다 함께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고, 누군가는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니 사라진 상태였다.
방 안에서 얌전히 사약을 마시고 죽은 내가 그중 가장 곱게 죽은 편이었다.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네가 어른이 되기 전에 이 할애비가 전부 정리해 주마. 그러니 아무 걱정 말거라.”
나는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굴까? 하지만 가만히 올려다본 할바마마의 곧은 얼굴,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말았다. 차마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옥좌라는 것이 몹시도 높게 느껴졌다.
막연하게 숙부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고만 느끼던 감정이 차츰 또렷해져 갔다.
황제가 되어야지. 위엄 있고 지혜로운 황제, 혜안을 가진 황제가 되어야지.
그것이야말로 제법 멋진 복수가 아닌가. 사약을 먹이고 목을 치는 것이 꼭 복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숙부가 빼앗아 갔던 나의 것을 되찾아 저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볼 것이다.
애초에 내 것이었던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고 남의 것을 탐하던 네가 속물이었다는 듯 한껏 고고하게.
할바마마가 내게 눈을 맞추었다.
“멜리야, 성군이 되어 다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황후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부숴 버릴 듯 세게 닫아 버렸다.
방금 전 온실에서 드레스숍과 액세서리숍 마담들을 불러모아 카탈로그를 훑으며 쇼핑을 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한참 사치를 즐기던 중 황제의 궁에 심어 둔 시녀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시녀의 귓속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들이 온실에 들이닥치더니 황제 집무실에서 있던 일을 A부터 Z까지 주절주절 토해 내며 어리광을 부렸을 때는 머리에서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
제국에 황자는 이제 볼테르밖에 없으니 제 아들이 황태자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제가 아니라 해도 귀족들이 볼테르를 황태자로 밀어붙여 줄 테니까. 황녀가 황제가 된 선례는 없었다. 그래서 안심했다.
그런데 황제가 행궁에서부터 보이던 수상한 행동 고분고분 그녀의 말대로 황태자 책봉식을 올해 하겠다던 그 말이 사실은 전부 그녀를 기만하는 행동이었다니.
‘그 늙은이가 나를 속였어!’
잰걸음을 놀려 방에 도착할 때까지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머리 꼭대기에서 열이 뻗쳤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시녀들을 물렸다. 방에는 친정에서부터 그녀를 보필했던 오래된 시녀 한 명과 늙은 유모만 남았다. 그러자 키옌은 화장대 위를 두 팔로 쓸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익숙한 듯 시녀는 구석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유모도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체리에 후작가 영애 시절부터 보여 왔던 그녀의 본모습이었다.
바깥에서는 자신의 이미지를 몹시도 끔찍하게 아끼는 키옌이었다. 그런 만큼 잔뜩 죽여 왔던 성질머리는 꼭 방에 돌아와 터졌다. 그걸 감당하는 건 언제나 친정에서부터 함께해 와서 본모습을 아는 이 둘뿐이었다.
“감히! 애미애비도 없는 것이 무슨 뒷배가 있다고 황위를 넘봐?”
키옌은 화장대를 엉망으로 만들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꽃병을 집어 벽에 던졌다.
챙그랑!
도자기 조각이 사방으로 튀고 카펫이 물에 젖었다.
“내가 뭣 때문에 그 늙은이 비위를 맞춰 주며 사는데! 황제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보석함을 화장대로 집어 던지자 거울이 깨졌다.
와장창!
산산조각 난 거울이 바닥에 떨어져 날카롭게 빛났다. 보석함의 진귀한 보석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조각난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자신을 쏙 빼닮은 아들도 그 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볼테르가 아까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바마마께서 마론 백작과 그 핏덩이가 있는 자리에서 저를 욕보이셨습니다. 어떻게 늦둥이 막내아들에게 이리 모질 수 있단 말입니까?”
황태자 책봉식에 관한 이야기는 비밀이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그새를 못 참고 황제에게 가서는 기어이 미움을 사 오다니!
제 아들이지만 어찌 이리 답답할 수 있을까. 멍청해도 너무 멍청했다. 게다가 말은 앞뒤를 다 잘라먹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가 자신이 황제에게 미움을 샀노라고 궁인들이 다 보는 데서 발언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저를 황태자로 만들려고 겨우내 온천 행궁에서 늙은이의 수발을 다 들어 가며 구워삶았건만!
제 친정에 힘이 있을 때, 그녀가 힘이 있을 때, 빨리 황태자 책봉을 밀어붙여 볼테르를 황태자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고 황태자 부부를 살해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