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3화 (3/148)

3화

“멜리, 고모한테 오렴.”

어쩐지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냉큼 손을 뻗었다. 마침 딱딱한 책상 위에서 엉덩이가 배기기도 했고.

고모님은 나를 안고 소파에 가 앉았다. 나는 고모님 무릎에 얌전히 앉았다.

“아까 그것, 얼핏 봐도 꽤 크던데요. 애 이 썩습니다.”

그러면서 고모님은 테이블 위에 놓인 마카롱을 내 입에 물렸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행동 같지만 아무렴 어떠랴? 맛있으면 그만인 것을. 마카롱 최고다.

고모님은 어미 새처럼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내 입 앞에 마카롱을 날랐다. 할바마마처럼 토닥거리지도 물고 빨지도 않았다.

사실 고모님이 할바마마처럼 우쭈쭈 소리를 냈다면 훨씬 충격이 컸을 것 같긴 하다.

나는 마카롱을 먹으며 할바마마와 고모님의 대화를 들었다. 딱히 재밌는 것도 없었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역사가들이 평가하길 똥고집 황제와 얼음 마녀 황제라는 이 둘의 대화가 몹시도 궁금했다.

“그래서 올해는 행궁에서 황후가 뭐라던가요?”

“아아, 매년 똑같지. 황태자 자리를 너무 오래 공석으로 두면 안 좋지 않겠느냐고.”

“아바마마는 어쩌시게요? 볼테르는 황태자감은 아니에요. 사심처럼 들리겠지만 전 냉정하게 생각했습니다.”

고모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볼테르가 적통이라고는 해도. 음…… 아니다. 어쨌든 내 기준에선 멜리가 적통이야.”

“네? 누가 적통이라고요? 그리고 일단 아바마마 기준이란 거 잘 모르겠는데요. 멜리가 적통이면 저는요? 왜 아빠 딸인 나는 건너뛰고 곧장 얘한테로 넘어가는데, 그게!”

고모님이 눈매를 찌푸렸다.

“멜리! 우리 멜리. 이 할애비가 황제로 만들어 줄 거야.”

“얼씨구? 그 자리에 이 애를 앉힌다고요? 돌아가신 어마마마와 오라버니가 퍽이나 기뻐하시겠군요. 그리고 황후도 멜리를 그 자리에 앉히라고 그딴 망언을 한 줄 압니까?”

“아니…… 그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래도 망언이라니…….”

할바마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면서 어쩔 줄 몰라했고 고모님의 눈매는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장담컨대 황후는 제 아들이 황제가 되지 못하면 멜리를 죽여서라도 볼테르를 황제로 만들 겁니다. 그년은 그러고도 남아요.”

그걸 본 할바마마가 합죽이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눈만 끔뻑거렸다.

“아, 아니, 그래도 명색이 네 새어머니한테 그 말이 좀…….”

“왜요? 내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아무도 안 보는데 뭐 어때요?”

“내가 보잖아. 내가.”

“그리고 누가 내 어머니야? 내 어머니 돌아가셨거든요?”

아무리 보는 시종들이 없다지만 황제와 황녀의 대화치곤 둘 다 상당히 막 나가고 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황위를 볼테르에게 주자는 말이냐? 그건 아니잖으냐.”

“그래서 아바마마 결론은 뭔데요? 얘한테 줘서 귀족들 갈기갈기 찢어서 패싸움시키게요? 허수아비 황제 만들기 딱 좋네요!”

둘은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하기야, 어린애가 들어 봐야 얼마나 알아듣겠으며 또 얼마나 기억하겠는가.

“그래도 볼테르는 안 돼. 키옌 황후는 허영심이 많고 교활하며 이기적이야. 볼테르 황자는 제멋대로에다가 매사에 도가 지나치며 참을성이 부족해. 둘 다 태후든 황제든 어울리지 않는다.”

할바마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렇다고 이 핏덩이를 황태자에 봉하게 되면 애 다 크기도 전에 황후가 멜리를 암살해 버릴걸요.”

고모님이 내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고모님의 가슴에 얼굴이 푹 파묻혔다. 고모님의 몸에서는 향긋한 장미 냄새가 났으며 몹시 포근하고 따뜻했다.

“꺄하!”

나도 모르게 터진 비명에 고모님의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할바마마의 눈동자도 나를 향했다. 애틋함이 가득했다.

“그렇게 못하도록 해야지. 내가 그리할 것이다.”

그 시선이 몹시 따뜻하면서도 어쩐지 날카로웠다.

“어떻게요?”

“잘. 어쨌든 잘. 이 아비가 알아서 하마. 그리고 황후가 교활하고 독살 맞은 건 나도 알아. 그땐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비어 버린 황후 자리에 급하게 앉힌 건 인정하겠는데……. 어쨌든 나는 그런 여자를 장차 이 나라의 태후로 만들 수 없다. 내 결정은 멜리야. 이건 안 변해.”

아주 단호하게 못을 박아 버렸다. 확고한 의지가 그 말 안에 들어 있었다.

한참 생각에 잠긴 듯 고요하던 고모님이 드디어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요, 아바마마.”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고모님을 슬쩍 쳐다본 할바마마가 시선을 우물쭈물 피하며 황급히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 내 생각에 반대할 거면 말도 꺼내지 말거라.”

“반대는 이따 할 거고요. 이거나 좀 여쭙시다. 황후가 그런 성정인 거 미리 아셨던 거네요?”

고모님이 화사하게 웃으면서 할바마마와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웃음 속에서 살기가 느껴졌지만 할바마마는 마주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이 아비가 사람 보는 눈이 썩 좋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본능이 머릿속에서 외쳤다.

‘할아버지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야!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거 아냐!’

나는 할바마마를 향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둘렀다.

도리도리도리도리도리!

급기야 등 뒤에서 식은땀까지 삐질삐질 흘렀다.

내 귀가 닿은 고모님의 가슴에서 심장이 더욱 거세게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폭발한다!

3, 2, 1…….

펑!

“아바마마? 그럼 대체 그 황후와는 볼테르 그놈을 왜 만드셨습니까?”

실로 뼈를 때리는 말이었다.

할바마마의 머리 위에서 황관이 텅! 하고 떨어져 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고요하고 넓은 집무실 안에 황관 구르는 소리만 우렁차게 메아리쳤다.

텅! 데구루루-.

할바마마는 떨어진 황관과 고모님을 번갈아 보면서 눈만 크게 떴다.

그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나 같아도 아마 그럴 것 같아.

입을 꾹 다문 할바마마를 속 시원하다는 듯 쳐다본 고모님이 책상에 기댄 몸을 쓱 일으켰다.

꼿꼿이 든 고개, 하지만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 끝은 바닥에 떨어진 황관에 닿았다.

“아바마마의 뜻을 잘 알았으니…….”

고모님은 심호흡을 했고 할바마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모님을 쳐다보았다.

“흐음?”

“저 황관은 제게 물려주시죠.”

쿠궁!

이렇게 나는 회귀 전 고모님이 황제가 된 이유를, 역사 뒤에 감추어졌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놀랍게도 다름 아닌 내가 있었다는 걸 오늘 깨달았다.

아, 정말 내 인생 무엇…….

***

할바마마가 온천 행궁에 다녀오신 지도 꽤 되었고 오늘도 날씨는 화창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할바마마와 마주 앉아 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미래에 죽을 것을 안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고작 세 살짜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많지 않다.

차라리 이렇게 과거로 돌아온 김에 예닐곱까지는 할바마마 옆에서 재롱이나 떨면서 효도하며 지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할바마마와 열심히 놀아 드렸다. 할바마마는 반대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만.

나는 손에 든 게임용 카드를 내려놓았다.

귀족들이 즐겨 하는 전략 보드게임인데 이게 은근히 정치적인 게임이라 후계자를 키울 때 놀아 주면서 하는 게임이라나?

그래 봤자 나는 할바마마가 다 봐주면서 하고 있지만.

“하바마마, 이거 이거!”

“이거? 이거 필요하냐?”

“웅웅!”

나는 적당히 어린아이인 척 굴며 내 패를 다 까발렸고, 할바마마는 또 그에 맞추어 내 짝맞추기 놀이를 도와주었다.

“우아! 이겨따!”

나는 카드를 머리 위로 던지면서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나는 기쁘다. 할바마마를 이겨서 너무 기쁘다! 와 씨, 이게 어떻게 기쁘지? 아니야, 나는 매우매우매우 기쁘다아아아!’

그리고 내 노력이 빛을 발하여 할바마마는 나보다 더 크게 웃으며 카드를 내려놓았다.

“허허허! 우리 멜리가 이 할애비도 이기고 정말 똑똑하구나.”

거참 효도하기 힘들다.

시종장, 마론 백작은 게임이 끝나자마자 책상 위에 널린 카드를 내 앞으로 대충 쓱쓱 밀어냈다.

“이제 게임 세 판 다 끝났습니다. 약속한 대로 지금 일을 시작하시지요, 폐하.”

마론 백작이 책상 위에 서류뭉치를 한 아름 내려놓았다.

“재무부에서 올라와서 오늘까지 폐하의 확인을 마쳐야 하는 서류들입니다.”

쿵!

종이뭉치에서 무슨 쇳덩어리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할바마마가 첫 번째 서류를 가져와 훌훌 뒤로 넘겼다.

“뭐 이렇게 많아?”

“원래 많았잖습니까.”

나는 할바마마께서 일하는 것을 구경하며 내 궁전 모양 사탕 공예 걸작을 양손에 쥐고 쯉쯉 빨아 먹었다.

“이거 어떤 놈이야? 대가리가 장식품이야? 어전 회의 때 대체 내 말은 귓등으로 처들었나. 어떻게 내가 한 말을 다 알아들었다 해놓고도 이딴 결과물을 가져와?”

그러면서 서류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심지어 외운다.

“이름이 뭐냐……. 이놈이야? 얜 지난달에도 이러더니. 매번 이래, 매번. 녹봉이 아깝구먼.”

하고 외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할바마마는 역사서에 나온 것처럼 쪼잔하고 고집불통에 뒤끝 작렬이 맞다.

그때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황자 전하가 알현을 청합니다.”

“들라 해라.”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순식간에 머리가 차갑게 식고 어깨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손에 땀이 흘렀다.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은 행복 속에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없다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슴속에서는 영원히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얼굴이기도 했다.

내 미래이자 과거의 원수. 잠시 행복에 겨워 잊고 있던 복수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열여덟의 볼테르 황자는 내 기억 속 서른셋 때보다 훨씬 젊었다. 아니, 어렸다.

볼살은 통통히 올라 있고 사춘기의 나이답게 붉은 여드름이 군데군데 있었다. 하지만 관리를 잘 받은 탓에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제 어미인 황후를 닮아 정열적인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아바마마!”

그는 황제가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손으로 문을 열고 달려 들어왔다.

그러다 책상 위에 앉아 카드놀이를 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우뚝 멈추었다.

“얘는 왜 여기 있습니까?”

숙부님? 지금 나랑 마주친 사실이 불쾌하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탕을 쥔 내 손에 까드득 힘이 들어갔다.

나도 숙부님이 상당히 꼽거든요?

내 황제가 되면 반드시 숙부의 죄를 밝혀 아바마마의 원수를 갚을 거거든.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증좌가 없다. 증좌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회귀 전의 숙부로부터 ‘사실 내가 죽였단다.’ 하는 말만 들었을 뿐.

그 목소리가 다시금 소름 끼치게 귓가에 맴돌아 나는 그만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이가 갈리고 목이 멨다.

그러자 할바마마가 냉큼 나를 책상에서 내려 품에 안았다.

“아이쿠. 애기가 낯을 많이 가리는구나.”

둥개둥개.

내가 낯을 가릴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그런데도 할바마마는 내가 진정이 될 때까지 흔들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볼테르가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바마마! 여름이 되기 전에 황태자 책봉을 하실 거란 말씀이 사실입니까?”

표정은 좋지 않아도 목소리는 어딘지 황홀하게 들떠 있었다.

“오래 비워야 좋지 않으니. 아마 그럴 듯하다. 왜 그러느냐?”

“왜냐니요? 이사 준비를 해야지요.”

“이사?”

나와 할바마마가 동시에 볼테르를 쳐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