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1. 엔조이 영유아 라이프!
회귀 전의 내가 어린 시절에 대해 기억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을 즈음, 이미 황제는 내 고모님이었다.
할바마마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늘 초상화로만 보았고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나와 같은 황금색 굽이진 머리카락 사이로 희끗희끗 센 은발이 보여 조금 더 신비로운 색감을 자아냈다. 눈동자는 여름의 싱그러움을 담은 에메랄드빛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적당히 팬 주름, 꾹 다문 얇은 입술은 정말 소문처럼 고집의 표본 같았다.
나이 많은 시종들이 말해 준 적이 있다. 황제 폐하는 무섭고 고집이 세셨고 뒤끝이 길었다고. 고집불통. 쪼잔함의 극치. 감히 황제에게 갖다 붙이기에는 불경한 표현이었지만 요약하자면 그랬다.
그리고 근엄 진지 위엄으로 똘똘 뭉친 역대 황제들과는 다르게 나를 정말 예뻐했었다고. 내가 황제 폐하의 아픈 손가락이었다고.
그 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느덧 할바마마는 나를 내려놓고 책상에 앉아 정무를 보셨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장아장 걸으며 주변을 탐색했다.
황제의 집무실은 온통 종이와 쇠 비린내 같은 잉크 냄새가 가득했다.
책상은 침대가 아닐까 헷갈릴 정도로 광활했다.
그 위에 쌓인 서류의 탑은 만일 한번 무너져 그 밑에 깔리면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 압사할 정도로 높았다.
“와아……!”
입에서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거대한 책장이 보였다. 표면에는 옻을 칠해 흑색에 가까운 진한 고동색이 은은하게 빛났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여긴 어디, 난 누구?
“윰모!”
유모를 부른다는 것이 그만 입에 너무 힘이 들어가 버렸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신체가 여러모로 불편했다. 게다가 아기의 몸이라는 건 생각보다 힘을 섬세하게 조절하기 힘들었다.
“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
“저녁때까지요. 폐하께옵서는 겨우내 온천 행궁에서 머물며 정사를 돌보셨습니다. 그제 본궁으로 돌아오셨고요. 행궁에는 황손녀 저하를 데려가고 싶어하셨답니다. 행궁에서도 눈가에 암암하다 수시로 말씀하셨다는데 저하는 할바마마를 뵙고 싶지 않았었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유모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모, 그거 36개월짜리에게 하는 말 맞아?’
나는 이걸 알아들은 척을 할까 못 알아들은 척을 할까 순간 엄청난 딜레마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 알아떠!”
고민하느라 다소 대답이 늦어졌지만 유모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못 알아들었지만 알아들은 척을 하는 세 살짜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책상에 앉은 할바마마의 발치로 아장아장 걸었다. 할바마마가 나를 그렇게 예뻐했다니 조금은 애교를 부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구중궁궐 온갖 모략에 둘러싸여 적아가 뒤엉킨 세상에서 살다 죽었던 내게 할아버지는 신선한 충격이고 그리운 온기였다. 그걸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슬며시 할바마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할바마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아아아! 우리 멜리가 나한테 왔어! 봤나? 마론 백작?”
할바마마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할바마마의 시종장, 마론 백작을 불렀다.
“예. 봤습니다. 잘 보입니다.”
“우리 멜리가 나한테 안아 달라고 하는 거지, 그렇지? 그럼 나 잠깐 쉰다.”
마론 백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와서는 일어나려는 할바마마의 손을 붙잡아 책상 위로 꼭 붙들어 두었다.
“아니, 왜요! 이건 다 끝내고 쉬셔야죠, 폐하!”
“괜찮네. 날 새우면 돼.”
“폐하께서 날 새우시면 저희는 퇴근 안 합니까?”
“칫. 쪼잔하기는.”
“쪼잔이요? 그런 말씀, 폐하께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백작이 절규하거나 말거나 할바마마는 잽싸게 잡힌 손을 뺐다. 그러고는 그대로 나를 안아서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흔들었다.
둥개둥개. 응? 둥개둥개?
“꺄?”
“오구오구. 우리 이쁜 똥강아지. 이 할애비 보러 와쪄요?”
아직도 위엄 철철 넘치는 얼굴로 혀 짧게 내는 그 소리가 익숙해지질 않는다. 역시 고정관념이란 참으로 무서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고집불통에 쪼잔함의 극치라는 황제라도 그럴 수 있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바마마를 쳐다보자 할바마마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흔들었다. 둥개둥개.
그런데 이거 재밌긴 한데 좀 어지럽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저리 흔들릴 즈음, 내 유모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폐,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허! 송구할 말은 애초에 하지를 마라. 그렇지? 내 이쁜 새끼.”
“하, 하오나 그리 흔드시면 멀미를…….”
“뭣? 어이쿠, 그럼 안 되지! 그럼 안 돼. 진즉 말리지 않고 무얼 했느냐? 에잉, 쯧쯧.”
할바마마는 잽싸게 나를 유모에게 넘기며 책상 오른편의 서류를 번쩍 들어 바닥에 털썩 내려놓았다.
“뭣들 하는 게야? 어서 여길 치우지 않고.”
할바마마가 손가락으로 책상 오른편을 가리키며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구석에 서 있던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와 순식간에 할바마마가 가리킨 곳에 동그랗게 자리를 치웠다.
“애를 이리 내려놓게.”
유모가 잽싸게 그 빈자리에 나를 앉혔다. 침대처럼 넓어서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위에 서서 돌아다녀도 될 정도였다.
“여기서 이 할애비랑 놀자꾸나.”
“……?”
저기, 할아버님? 지금 여기 있는 종이들 전부 읽어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갖가지 결재할 서류며 상소며 이것저것 할 일 많으시지 않냐고요.
하지만 할바마마께서는 아무려면 어떠냐는 듯 나를 책상 위에 앉히고는 책상 밑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곱게 포장된 상자는 내가 안에 들어가서 앉아도 될 정도로 커다랬다.
“이거 뭐야요?”
“뭐긴. 우리 애기 선물이지. 행궁 다녀오는 길에 구했단다.”
“이녕?”
“인형같이 시시한 걸 넣었겠느냐?”
대체 회귀 전의 나는 할바마마와 무엇을 하며 놀았더란 말이냐!
입이 떡 벌어진 나를 흡족한 얼굴로 쳐다본 할바마마가 상자를 묶은 리본을 쭉 잡아당겼다.
“쨘! 보아라. 내 행궁에 다녀오는 길에 아주 재미난 것을 보아서 우리 손녀님 생각이 몹시 났단다.”
“이거 뭐…….”
일단 이 투명한 갈색 유리를 세공한 것 같은 거대한 궁은 둘째 치고 달달한 사탕 같은 냄새는 뭡니까?
어버버. 어버버.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할바마마를 쳐다보는데 할바마마가 껄껄 웃었다.
“허허허. 예쁘지? 내 우리 이쁜이 궁이랑 똑같은 모양으로 주문 제작을 했단다. 내 이걸 얻으려고 그 자리에서 공예 장인에게 내가 끼고 있던 백금 팔찌를 주었어.”
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황제가 끼고 있던 백금 팔찌라면 보통 팔찌가 아닐 게 분명한데…….
“으음…… 하바마마?”
그런데 대체 왜 내 기억에는 이런 대형 인형의 집 같은 내 모형 궁이 없는 것이지요?
이런 값비싸고 정교한 유리 세공 장난감이라면 내가 아주 적어도 열 살 때쯤까지는 가지고 있었을 거고, 그랬다면 분명 요 갈색 유리 궁이 내 회귀 전의 기억에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때 할바마마가 내 탐스러운 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떠냐? 마음에 드냐? 참으로 맛있어 보이지 않으냐?”
‘아, 그러게요. 먹기도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참 이쁜……?’
“엥?”
잠깐. 뭐라고요? 팔든 미? 맛있어? 이게?
나는 나보다 덩치가 큰 모형 유리 궁을 한참이나 멀뚱히 바라보았다.
“껄껄! 사탕이란다.”
“사땅?”
허어억!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요?
황제가 끼던 백금 팔찌를 엿 바꿔 먹는다고요?
내가 기함한 사이 할바마마가 유리 궁, 아니 사탕 궁의 귀퉁이를 손으로 뚜걱 분질러 내 입에 쏙 물렸다.
“사탕 공예라고 하더구나. 장인의 솜씨가 어찌나 좋던지. 그래서 내 돌아오는 길에 거기 잠시 머물며 제작해 왔단다.”
달달한 사탕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혀를 자극하는 달콤한 맛에 침이 턱을 타고 줄줄 흘렀다.
유모가 냉큼 손수건으로 내 입가를 닦았다.
“우리 똥강아지가 잘도 먹는구나. 더 줄까?”
더요? 더 먹을까? 맛있다. 할바마마 사랑해요!
아기가 되고 나서 어째 회귀 전보다 단것에 더 구미가 당긴다. 분명 회귀 전에는 달콤한 것보다는 향이 짙으면서 살짝 쌉싸름한 디저트를 좋아했는데, 몸이 어려지니 입맛도 어려지는 모양이다.
내가 막 사탕 궁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내 손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유모였다.
“아니 되옵니다.”
나와 할바마마가 동시에 유모를 쳐다보며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므엥?”
“으잉? 거 또 왜애?”
“폐하. 저하가 단것으로 배를 채워 끼니때 식사를 거부하게 되면 건강한 성장에 문제가 생기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유모의 단호한 말투에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을 부풀렸다.
나는 잔뜩 긴장했다.
뭘 하려는 거지? 무엄하다고 막 소리 지르려나?
할바마마 고집불통이라며. 쪼잔함의 극치라 뒤끝도 장난 아니라며!
내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 할바마마가 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휴, 어쩔 수 없구나. 잘 두었다 내일 또 가지고 오너라.”
“예. 폐하.”
나는 시종들이 사탕을 깨끗한 유리 상자에 넣어 가지고 나가는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할바마마, 고집 어디로……? 미래의 내가 들었던 것과 상당히 다른 분이신데? 역사라는 게 사람이 기록하다 보니 상당히 많은 부분 왜곡되거나 과장되는 모양이다.
시종들이 막 사탕을 치웠을 무렵 집무실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에오넬 황녀 전하가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고모님이?
“들라.”
곧 문이 열리고 내 기억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고모님이 들어왔다.
그 모습이 꼭 초상화 속 돌아가신 내 할마마마, 전 황후를 닮았다. 가느다란 눈매와 빨간 입술, 오뚝한 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서른이 넘은 나이라고 보기에 몹시 젊었다. 특히나 시리도록 푸른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빛이 나서 마치 바다의 여신을 보는 것 같았다. 다만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전 황후였던 할마마마가 아니라 황제인 할바마마를 닮았다.
고모님은 간략하게 예를 표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바마마, 온천 행궁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럭저럭 잘 다녀왔단다.”
“아까 시종들이 들고 나가던 그 유리 세공품은 멜리 것인가요?”
고모, 그거 유리 아니야!
나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고모님을 쳐다보았다. 고모님의 질문에 할바마마가 대답했다.
“그거 유리 아닌데. 사탕인데?”
응응, 고모. 그거 사탕이야!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고모와 눈이 마주쳤다. 습관처럼 몸이 굳었다.
푸른 머리카락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초록 바다를 닮은 눈빛은 서늘했고 심장은 더 차가웠다. 냉혹한 군주의 모습 그 자체였다. 내게 시키던 후계자 교육도 몹시 엄한 편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 마주치는 눈빛은 사뭇 달랐다. 조금 더 온화하고 유순했다.
갸우뚱. 고개가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