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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화 (1/148)

<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 >

1화

프롤로그

며칠째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비가 내리는 창문 밖이 흐린 탓인지 오늘따라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또렷하다.

요 며칠 사이 부쩍 마른 얼굴. 화려하게 굽이치던 금발은 눈에 띄게 푸석해져 있다. 루비를 닮은 맑고 붉은 눈동자는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거울을 보자 자조 섞인 한숨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하아……. 초라하구나, 아멜리아.”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나왔다. 불을 때지 않은 냉궁은 몹시 추웠다.

온기라고는 손끝에 닿은 찻잔의 것뿐이다. 황금빛 노란 찻물은 달달한 벌꿀향을 풍겼다.

사약이다.

나는 옆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던 호위기사를 쳐다보았다.

“아르.”

그는 감정이라곤 쌀알 한 톨만큼도 들어 있지 않은 눈으로 날 가만히 쳐다본다. 그래도 어서 이 차를 마시라 재촉하지는 않았다.

열이 넘던 호위기사들이 다 떠나도 내 곁에 남은 아르. 그는 이 궁에서 가장 많은 세월을 나와 함께한 이였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미안…… 아르.”

“무엇이 미안하단 말입니까. 황녀 전하.”

“내가…… 힘이 없어서…….”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부덕하여 주군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니 미안하다는 말씀은 거두십시오.”

지극히 교과서적인 답변에 교과서적인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그래서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올곧고 강직한 이였다.

아무런 연줄이 없어 실력이 있음에도 천대를 받는 이.

황녀의 호위기사라는, 어렵사리 얻은 자리마저 잃고,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는 불명예를 떠안고 살아가야 할 기사.

그마저도 모시던 그 주군이 반역자였다는 수치를 안고 재능을 썩혀야 할 불행한 기사.

나는 다시 창문 밖을 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잠시 잦아들었다.

그때 밖에서 시녀들의 목소리가 방음이 잘되지 않는 방문을 넘어 들어왔다.

“시간만 질질 끌고 뭐 하는 거람? 어휴, 추워.”

“다 들리겠다. 목소리 좀 낮추렴.”

“다 들으라지? 어차피 죽을 계집애.”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내 사람은 아닐 거라는 거. 어느 날 하나둘 시녀들이 바뀌더니 새로 온 그녀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불손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하려 했던 진실이 내 귓속을 후벼팠다.

“황족 시녀라고 해서 황금 동아줄인 줄 알고 들어왔더니 순 썩은 동아줄이잖아?”

나는 이미 차게 식은 노란 찻잔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돌이켰다.

참으로 바보 같았다.

아바마마는 황태자 자리를 노린 숙부의 손에 살해당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황위는 조금 더 적통에 가까웠던 고모님께로 넘어갔다.

그러자 숙부는 황태자 부부를 살해한 자신의 죄를 여황제로 즉위한 고모님께 뒤집어씌웠다. 그러고는 내게 살갑게 다가와 아바마마의 복수를 종용했다. 나는 멍청하게도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고모님을 배신했고.

그것이 숙부의 계략이었다. 이번에는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여황제를 제거하면서 나까지 반역자로 만들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피비린내 짙은 황위 다툼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이 황금빛 사약 한 잔.

나는 이미 식어 버린 찻잔을 잡아 빙글빙글 돌렸다. 황금색 회오리가 잔 안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비가 그쳤다.

막 그것을 입가로 가져가려던 찰나, 아르가 내 손목을 잡았다. 단 한 번도 황녀인 내게 제 맨손을 댄 적이 없을 정도로 곧은 이가.

“전하. 늦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

나는 그의 짙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온갖 감정이 그 안에 있었다.

그가 내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안다.

‘도망치십시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것을 되찾고자 하면 많은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자면 그 첫 번째 피는 네가 되겠구나.”

아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죄인의 최후를 옆에서 지켜보라는 새 황제의 명을 지키지 못한 죄. 반역자를 도망치게 한 죄.

그 과정에서 진실은 아무런 상관도 없으리라. 설령 진실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평민 출신의 존재감도 뒷배도 없는 기사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힐 것이다.

“너는…… 살아 다오.”

다른 피는 몰라도 그의 피를 밟고 올라선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내 발밑에는 고모님의 피가 이리도 흥건하여 매일 밤 악몽 속에 나를 찾아오는데…….

“오래전에 네가 내게 말했지. 사람은 누구나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고.”

오래전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황족이라는 사실을 숨기자 그가 했던 말이었다.

당시 그는 견습 기사였고 나는 고모님 몰래 역사 수업을 땡땡이치고 도망 나왔을 때였다.

그때 그는 쥐죽은 듯 고요한 연무장을 혼자 청소하고 있었고 나는 그 고요한 연무장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그에게 걸렸다.

멋대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신분을 밝히라 말하는 그에게 열 살의 나는 “나의 신분은 비밀이니 묻지 말거라.”라며 지극히 황족다운 말투로 대꾸했다.

그 당시 그는 쿡쿡 웃으며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으니 묻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랬습니까?”

알면서도 그는 모르는 척 말했다. 몇 번이나 내가 그때의 일을 들먹이며 깔깔 웃었으니 설령 기억나지 않을지언정 모를 리는 없다.

“너에게도 비밀이 있을 것 같구나.”

그때 그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는 이유다. 그에게도 비밀이 있을 것 같다는 직감.

“별것 아닙니다.”

“그렇담 그 비밀, 다음 생에서나 알려 주렴.”

나는 미련 없이 손에 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안에 든 달콤한 황금빛 물을 입안에 머금었다.

눈을 꾹 감고 꿀꺽 삼켰다.

속에서 불이 일었다. 뱃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잠식했다.

하지만 녹아 버린 목구멍에서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쓰고 짠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울컥울컥 목구멍에 비린내가 치밀었다.

목과 명치를 움켜쥐고 꺽꺽대는 나를 아르가 바짝 끌어안았다. 새하얀 기사의 제복이 붉게 물들었다.

“부디 소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목덜미에 날카롭고 차가운 것이 꽂혔다.

드디어 눈이 사르르 감겼다.

“이 불충은 목숨으로 갚을 터이니…….”

***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만에 감았던 눈이 뜨였다.

분명 사약을 먹었는데 죽지 않았나? 살아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숙부가 무슨 수를 써서든 다시 죽였을 텐데?

훈훈한 기온과 눈이 편안한 연녹색 벽지, 높은 천장으로 미루어 보아 냉궁은 아니다. 몸을 감싸는 푹신하고 보드라운 천도 느껴졌다.

설마 아르가 나를 데리고 도주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할바마마의 충신 중 살아남은 어느 귀족의 저택이나 별장일지도 모른다.

잠시 후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할바마마? 초상화로만 뵀던 할바마마다.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할바마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저승에서 날 마중을 오신 건가?

‘역시. 난 죽었구나. 고모님은 어디 계시지?’

곧 저승에서 뵙겠지. 내가 할바마마를 향해 환하게 웃자 할바마마도 마주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멜리가 이제 낯도 안 가리는구나!”

꼼지락꼼지락 손을 움직였다. 사약을 원샷 한 상태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손에 힘이 넘친다. 나는 할바마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어라?

손이 이상하다.

‘이게 대체…….’

무엇이 이상한지 사고하는 데 걸린 시간은 0.1초. 나는 그 자리에서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으애애앵!”

내 손이 왜 이래?

이건 무슨…… 완전 애기 손이잖아!

뽀얗고 통통하고 작은 손.

작고 통통했던 아이의 손과 꼭 어울리는 아주 작은 아이. 내 어린 시절이었다.

버둥버둥 움직이는데 나를 꽁꽁 두른 비단이 꽤 무거웠다. 게다가 다리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으으, 으아!”

그러자 저승에서 마중 나온 할바마마가 안절부절못하더니 갑자기 혀를 쑥 내밀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대기 시작하셨다.

“우리 멜리가 뭐가 불편한 게냐? 응?”

하, 할바마마?

내가 대답 없이 놀란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자 할바마마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유모, 유모 들어오너라! 애가 왜 이러는 게냐?”

황급히 들어온 유모가 나를 번쩍 안았다. 순식간에 유모의 얼굴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유모는 또 왜 이렇게 젊어졌어? 아니, 그보다 죽지 않았나?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유모는 숙부가 일으킨 그 피바람 속에서 냉궁으로 유배되어 가는 나를 감쌌다. 그러다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 나갔는데 그 이후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들은 바가 없다. 아마 질질 끌려 나가던 그 몸뚱이가 이미 시체였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앞의 유모는 아무리 보아도 10년은 더 젊었고 얼굴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원래 아이들은 나쁜 꿈을 꾸면 자다가 깨서 놀라기도 한답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아이? 웬 아이? 나?

“우앵?”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데 혀가 익숙하지 않아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할바마마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인형을 흔들었다.

“오구오구, 놀래쪄요? 울 애기가 잠에서 깨서 깜짝이야, 해떠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러니까 내 살아생전, 시종들 말이 할바마마는 근엄하고 고집이 세셨고 자비로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고…….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죠? 이 어마어마한 괴리감과 등골 오싹할 정도의 부조화는 대체 어쩔 거냐고!

“으으으!”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눈물까지 날 것 같다.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헤헤! 에헤헤헤!”

‘푸하하하하!’ 같은 웃음이 나올 줄 알았는데 어린아이 같은 높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이구, 웃었다! 봐라, 애가 웃었다! 멜리는 할애비가 좋아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한 와중에 나는 방에 걸린 달력을 발견했다.

제국력 703년. 뭐? 703년? 제국력 703년이면 내가 만으로 세 살 때.

그 순간 살아 돌아온 할바마마, 젊어진 유모, 아기가 되어 버린 내 신체 그리고 달력까지, 퍼즐이 하나둘 끼워 맞춰지면서 머릿속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이내 내 멘탈은 다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내가, 내가 과거로 돌아오다니이이이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응?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네? 신이시여, 대답 좀? please!

대체 날 왜 과거로 보낸 건지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내 인생은 정말 거지 같았거든요? 그걸 다시 살라고요? 미쳤음?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시궁창, 아니 피바다였단 말입니다. 네?

아니면 내가 뭐 엄청나게 잘못했나요?

하지만 신은 내 부름에 끝내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두 번째 삶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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