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보고 싶어서?"
세스가 민망한 듯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브란이 진짜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얼른 우리 불쌍한 세수 손을 잡아 주었다.
“나도 세수가 보고 싶었는데 이왕 이렇게 됐으니까 같이 입장할까요?"
“아, 진짜. 누나! 자꾸 그렇게 봐주면 어떡해!"
브란이 퉁퉁거리며 불만을 표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했다. 세수가 그런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나는 그의 손이 조금 차갑다는 것을 느끼고 속삭였다.
“괜찮아요?"
"······응.”
내가 신계로 끌려갔다 돌아온 후로 세수에게는 약간의 불안중이 생겼다.
처음엔 나와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힘들어했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다가오면 발작적인 분노를 나타냈다.
이제는 증세가 거의I 사라졌지만, 가끔 넋 나간 얼굴로 나를 찾아다닐 때가 있었다. 지금도 혼자서 참고 참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와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세수 상처가 다 아물고 새살이 돋을 때까지 계속 핥아 주고 돌봐 줄 생각이었다. 앞으로 우리에겐 아주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 분명 회복될 수 있을 거다.
나는 손끝으로 아직 차가운 세수 손바닥을 간질이며 장난을 쳤다.
“우리 세수, 오늘부터는 여보라고 불러야겠네요. 아니면 자기가 좋아요?"
그러자 세수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셋을 번갈아서 불러 줘.”
“네?”
"난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좋거든. 여보, 자기도 좋지만 이름도 계속 불러 줬으면 해서."
앗, 지금 빨개지면 안 돼. 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란 말이야.
내가 달아오른 얼굴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사이, 우리는 장미가 가득 피어 있는 정원의 식장에 도착했다.
나는 우리의 결혼식을 하얀 장미 저택에서 올리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기에 가장 좋은 곳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까미와 흑룡, 코크 곰, 날고양이들이 모두 참석할 수 있는 장소에서 결혼하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정원의 입구에서 서성거리던 제스터가 인사를 건댔다. 하객처럼 차려입었지만 식장을 나와 버린 모습에서 그의 갈등이 느껴졌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줘서 고마워요.”
“당분간 뵙지 못하겠지만 멀리서나마 두 분의 행복을 빌겠습니다."
제스터는 멀리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일로 실력의 한계를 느꼈다고, 좀 더 배우고 돌아오겠다며 내 호위에서 사퇴했다.
오늘 이후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제스터 씨, 언젠가 웃는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예, 반드시.”
"건강해라."
“너도.”
마지막약속을주고받은우리는제스터와헤어져 식장에 들어섰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 들이 우리를 보고 활짝 웃었다.
“아니, 왜 둘이 같이 들어오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빨강 머리 카밀라와 새침한 마리아가 보였다. 다이애나에게 뭔가를 소곤거리는 핀. 벌써 뭔가를 퍼먹고 있는 곰탱이와 그런 그를 말리는 벨라도.
앤과 루시아는 다프네에게 붙잡힌 채로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색이 된 얼굴을 보면 이번에 새로 낸 25금 신간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작게 키득거리니 세수가 의아해했다. 절대 말해 줄 수 없는 내용이라 순간 입이 꾹 다물렸다. 그러자 세수가 더욱 궁금해 하는 눈을 했다.
-꾸우우~!
-까갓갓!
다행히 화동인 복실이와 코코가 날아와서 난처한 순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까악! 귀여워!"
“세상에, 너무 예쁘다. 복실이.”
오늘을 위해 리본으로 한껏 멋을 낸 복실이와 귀여운 모자를 쓴 코코는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복실이를 칭찬하자 흑룡이가 자랑스럽게 킁킁거리다 까미에게 혼나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두 화동이 뿌려 주는 꽃잎을 맞으며 주단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우리를 축복해 주었다.
“어흐흐흑, 주인님. 이 마커스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어허형, 주인님!"
한쪽에선 마커스 씨와 말라크가 스프링클러처럼 눈물을 뽑아내고 있었다.
첫 번째 결혼식은 귀족들만 참석할 수 있었기에 마커스 씨를 초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 결혼식에 초대받은 그는 지나치게 감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라크는 대체 왜 우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백화점 및 사업 총괄 책임자와 선기의 주인이라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 두 사람이 왜 같이 앉아서 통곡하는지도 의문이었다. 당황한 백탑주가 그들을 말리기 위해 달려갔다.
조금 멀리 떨어진 구석에선 아버님이 친구들 속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사실 아버님을 초대하기로 결정한 것은 세수였다.
“당신이 받을 축복 중에 하나라도 빼놓고 싶지 않아. 그리고 선대가 없으면 당신이 사교 활동으로 더 바빠 질 데니까.”
왠지 후자 쪽의 이유가 더 큰 것 같았지만, 덕분에 아버님은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다.
곰탱이의 부모님인 러셀 백작 부부가 아버님께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라하는 아버님의 모습에 절 로 쓴웃음이 나왔다.
‘아버님은 진짜 세수에게 절하면서 살아야 되는 데…….'
주단의 마지막에선 우리의 진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프리지어 궁의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총관 할아버지와 리드 부인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시종장은 외알 안경까지 벗은 채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코크 곰의 머리 위에 앉은 성냥이가 반갑게 손을 흔들더니 주례석의 촛대에 단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오늘의 주례를 맡은 왕이 단상 앞에 섰다. 마지막까지 왕과 주례 자리를 두고 다뤘던 성녀님이 한숨을 쉰 건 덤이었다.
왕은 나란히 선 우리를 바라봤다. 잘 키운 자식들을 보는 것처럼 뿌듯하고 기쁜 얼굴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그대들은 참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왕의 말에 나도 모르게 세수를 쳐다보았다. 세수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좁은 우리에 갇힌 더러운 노예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수는 그런 나를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내가 어둠을 무서워하는 것을 알았을 때, 세수는 급하게 커튼을 걷었고 매일 밤 나를 위해 등불을 켜 주었다.
세수는 항상 그랬다. 내 부족함을 탓하는 것보다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한없이 다정한 사람. 그런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내게 있어선 가장 큰 시련이었어.
“서로의 손을 붙잡기 위해 수많은 일들과 싸운 끝에 겨우 이곳에 도달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마라.”
내 손을 붙잡은 세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의 파랗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나에게 수많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라 짐이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왕의 짧은 축사 끝에 반지를 교환하는 순간이 되었다.
신랑의 반지는 브란이, 신부의 반지는 과목이가 보관하고 있었다. 두 녀석은 서로를 경계하며 눈싸움을 하다가 왕의 주의를 받고서야 겨우 반지를 내밀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황금색 반지 위엔 은빛의 매듭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옛날엔 반지 대신 신랑 신부의 손을 여러 색의 끈으로 둘둘 말아서 손 매듭을 지었는데, 부부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오래된 전통이라 거의 사라진 것을 굳이 굳이 반지에 상감으로 새겨서 가져오는 세수 귀여움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이제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해도 좋다. 대신 저번처럼 굴었다간 짐에게 머리가 깨질 줄 알아라.”
왕의 경고를 들은 세수는 아주 점잖게 내게 키스했다.
키스가 끝났을 때, 나는 우리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였음을 실감했다. 그건 아주 따뜻하면서도 다정한 감각이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 ,나는 충동적으로 세수를 끌어당겨 다시 키스해 버렸다.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지더니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졌다.
한참 후에야 세수를 놓아준 나는 피오나가 이마를 짚고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아무래도 반성문의 각이 세게 선 것 같다.
둘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말을 얼굴에 써 붙인 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짐의 이름으로 이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이로써 나는 계약직에서 종신직으로 취업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시 한번 크게 박수를 쳤다. 악사들이 즐거운 음악을 연주하고 그레이들이 축하의 꽃을 뿌렸다.
마탑주가 준비한 축포를 하늘에 터트리자 흥분한 날 고양이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아주 즐거운 개판이었다.
"여러분, 신부를 위해 잠깐만 물러서 주십시오. 부케를 던지는 의식이 있겠습니다. 잠시만 진정하시고······ 야! 금사자! 얌마!"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던 선배님이 사방팔방으로 샴페인을 뿌려 대는 네빌 경을 보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
선배님의 성대를 아낌없이 희생한 결과, 이곳에선 좀 생소한 부케 던지기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친구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거리를 가늠했다. 내 목표는 다이애나에게 주는 거였는데, 안 보고 잘 던 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던져!"
성격 급한 빨강 머리 카밀라의 재촉에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부케를 뒤로 던졌다.
까악~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놀라 돌아본 나는 부케를 들고 눈을 껌벅이는 곰탱이를 발견했다.
“아이고!"
왜 하필 거기로 갔담. 안타까워하는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곰탱이가 부케를 덥석 핀의 품에 안겨 주었다.
"악! 이게 무슨 짓이야!"
얼굴이 벌겋게 변한 핀이 회를 냈다. 그러자 사람들 이 껄껄 웃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니, 왜 박수 쳐! 박수 치지 말라고!"
버럭 거리던 핀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치는 다이애나의 모습에 완전히 절망했다. 참으로 가없고 딱한 자로다.
그때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온 마리아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결혼 축하해요."
"헉!“
냉기가 감도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언제 해명을 하러 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내 아파서 누워 있다더니 갑자기 결혼식을 올린다네?"
"마, 마, 마리아. 그게요…….”
“오늘은 축하의 자리니까 이쯤 해 두죠. 다음엔 변명을 생각해 오세요."
”······네."
기죽은 나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세수가 다가왔다. 그러자 마리아는 눈꼴시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치며 떨어져 나갔다.
마치 바통을 이어받듯 이번엔 다이애나가 다가왔다. 언제나 다정한 내 친구는 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너무 예뻐요, 이블린. 이번엔 진짜인 거죠?"
"······네?!”
"저번 결혼식은 왠지 가짜 같았거든요. 제가 아는 이블린이라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어떻게 해서라도 뜯어고쳤을 테니까.”
사려 깊은 갈색 눈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였다. 나는 다이애나가 내 생각보다 더 나를 잘 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당부했다.
“꼭 행복해야 해요.”
"네, 그럴게요.”
내 대답에 다이애나는 안심한 듯이 웃었다. 그 모습이 정말로 아름다워서 나는 이유 없이 핀이 미워졌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누구보다 잘 먹고 잘 살 애한테. 차라리 그 시간에 내 걱정을 해 달라고.”
빨강 머리 카밀라가 악담인지, 축하인지 모를 투덜거림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앤은 쑥스럽게 웃었다.
“이블린은 잘하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주세요. 상담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저, 저도요.”
부끄럼쟁이 벨라도 겨우 한마디를 보랬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담아서 감사를 전했다.
부케 던지기의 소란이 가라앉자 세수와 나는 신랑 신부로서 하객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세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자니 왠지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황홀한 기분이었다.
아주 먼 훗날, 시간이 우리를 거두어 갈 때까지 이 황홀함 속에 푹 잠겨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 무슨 생각해?"
“음, 세수 생각?"
솔직한 내 대답에 세수가 웃었다. 그는 부드럽게 내 이마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이비, 당신을 정말 사랑해."
나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내가 오랫동안 간절히 찾아 헤매던 것을 발견했다.
한때 나는 영원히 남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모든 것이 허망했고, 죽음으로 지워질 내가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고 싶었다. 그것이 영원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당신의 안에서 한없이 영원에 가까운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