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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39화 (239/240)

239화

* * *

이블린이 사라지자 신들은 인간의 탈을 벗고 광휘로 돌아갔다.

천공신은 순식간에 희미해지는 감정에 아쉬움을 느꼈다. 이블린이 있을 때는 그토록 선명하던 것들이, 지금은 먼 바다에서 흔들리는 그림자 같았다.

"안 되겠어. 역시 이블린을 가져야겠어.”

이블린은 여러 가지로 특이한 존재였다.

그녀는 신의 힘에 짓눌려 꼭두각시로 변하고 마는 다른 사도들과 달랐다. 아마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영혼을 갖고 있어서인 듯했다.

뿐만 아니라 신들에게 진심으로 저항할 정도로 무모 했고, 꾀를 써서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교활함도 있었다.

무엇보다 혼자 까불까불 노는 모습이 귀여워서 계속 옆에 두고 지켜보고 싶었다.

어떤 존재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 이 대체 몇 백  년만의 일일까?

영원을 사는 이들에게 이블린은 너무나 자극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권태에 찌든 세계수까지 직접 부리를 뻗어 이블린을 뻗어 가려고 난동을 부리는 것 아닌가.

‘어떻게 좀 빨리 데려올 수 없나?'

고민하는 천공신에게 대지신이 의지를 전해 왔다.

“아스트라이아, 이블린을 내버려 두어라.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를 소유할 수는 없을 것이니.”

“내가 고작 하급선 하나를 갖지 못한다고?"

이블린이 난동을 부릴 때도 차마 다치게 할 수가 없어서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힘으로 짓눌렀다면 금방 제압할 수 있었다.

“그 아비가 자식의 눈앞에서 목숨을 끊었다.”

대지신의 빛이 안타까운 듯이 반짝였다.

“너는 고작 미물의 원한이라 하찮게 여겼겠지. 하지만 그것은 뱀이었고 제 자식을 물어 한이라는 독을 남겼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이블린은 천성이 다정한 아이다. 사랑을 주면 자신도 돌려주려 애쓰지. 네가 오랫동안 잘해 문다면 마음을 열었을 것이나, 뱀은 그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뱀은 자산을 희생했다.

이블린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누구의 손에도 붙잡히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결국 그는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식의 마음속에 한이 라는 벽을 남겼다.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도록. 그렇게 뱀은 죽어서도 자식을 지키고 있었다.

“그 마음이 갸륵하지 않느냐? 네게 조금이라도 뱀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다면 이블린에게 손을 대선 안 된다."

"네 말대로 고작 미물의 한이다. 천상의 군주인 내가 고작 그깟 독을 어쩌지 못할까싶으냐.”

아스트라이아는 장담했다. 이블린이 황송해할 정도로 은혜를 쏟아 부어 한이라는 것을 녹여 버리겠다고.

자청해서 호구가 되겠다는 선언에 대지신은 낙담했다.

세계수와번갈아가며 뜯어 먹힐 동생의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하지만 더 이상 충고를 할 기력도 없어서 그냥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대신 대지신온 눈을 돌려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인간들 속에서 별처럼 반짝거리는 이블린이 보였다. 그 옆에서 자신의 빛을 되찾아가는 세수 역시.

두 빛이 춤을 추듯 어울려 하나로 반짝이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대지신온 그들을 축복하며 오랫동안 지상에서 빛나기를 바랐다.

* * *

"허, 헉! 헉!"

조슈아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라리사 모어가 처형되는 날, 이블린의 잔인함을 비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에게 호용 해 줄 바람잡이들도 고용했다.

문제는 예상을 빗나가는 상황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혼자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잔금을 받지 못한 바람잡이들은 화를 내며 소란을 피웠고 곧바로 경비대에 잡혀갔다. 그들은 고용주인 조슈아의 인상착의와 그가 시킨 일들을 고스란히 자백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왕은 당장 조슈아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잡히면 안 돼 잡히면 이번에야말로 누님의 손에 죽고야 말 거야.'

조슈아는 이미 왕에게 많은 것들을 빼앗겼다. 영지와 작위까지 빼앗긴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목숨 하나뿐이었다.

두려움에 덜덜 떨며 도망치는 그의 앞을 곰처럼 덩치가 큰 기사가 가로막았다.

"비, 비켜! 당장 비키지 않으면……!"

조슈아는 단검을 뽑아 들고 그를 위협했다. 그는 벌써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기사들을 따돌렸다.

한때 왕족이었던 조슈아가 이렇게 죽기 살기로 저항 하면 기시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물러나 주곤 했던 것이다.

"흥. “

하지만 그의 앞을 막은 것은 바로 테오 러셀, 이블린이 곰탱이라고 부르는 남자였다.

다음 순간, 테오의 주먹이 조슈아의 얼굴을 강타했다.

조슈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뒤늦게 달려온 핀이 개구리처럼 널브러진 그를 보고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기절한 조슈아는 그대로 하얀 탑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이상한 소리에 깨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끼이이-끼이이-하는 기묘한 소리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게다가 비릿하고 큼큼한, 뭔가가 썩는 것 같은 지독한 냄새까지 풍겼다.

“정신이 들었느냐?"

욱신거리는 얼굴을 부여잡던 조슈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왕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왕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누, 누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왕은 애절하게 애원하는 동생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한때는 이런 모습에 마음이 아파 어떤 죄든 용서해 주곤 했다. 터무니없이 무른 마음 안에 담긴 것은 동생이 누리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이었다.

“조슈아,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너를 용서해 주었다. 그러나 너는 계속해서 나를 실망시켰지. 이제 너를 용서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구나.”

"누, 누님 !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조슈아는 눈물을 홀리며 애원했다. 왕은 더없이 가련한 그의 얼굴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너를 죽일 생각은 없다.”

“아, 아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용서할 생각도 없다. 조슈아, 너는 이제 네가 지금까지 저지른 죄와 마주해야 한다."

조슈아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주제도 모르고 계속해서 이블린을 흔들려고 할 것이다.

왕은 동생이 이블린의 손에 짓이겨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스트리아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그것만은 피해야했다.

“조슈아를 이곳에 가둬라. 앞으로 무슨 말을 해도 내보내 주지 말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은 왕이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당황해서 엉거주춤 일어나는 조슈아를 향해 왕의 시녀장인 피오나가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조슈아 님. 라리사 모어를 도저히 놓을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그녀와 계 속 함께 있게 되셨군요.”

“어······?"

그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섬뜩한 느낌부터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어두운 방과 계속해서 들리는 끼이-거리는 소리까지 마치 누군가의 비명 같은.

“그럼 쉬십시오.”

“자, 잠깐! 잠깐만!"

조슈아는 방을 빠져나가는 피오나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과오나는 가차 없이 문을 닫아 버렸다. 이내 철컥거리며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문에 매달린 조슈아는 등 뒤에서 끼익끼익 하고 울리는 소리에 비명을 질렀다.

"시, 싫어! 싫어어! 내보내 줘! 여기서 내보내 달라고!"

하지만 하얀 탑은 죽음에서 내쫓긴 여자의 비명처럼 조슈아의 비명마저 삼켜 버렸다.

사홀 뒤, 하얀 탑의 간수장은 조슈아의 정신이 망가져 요양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올렸다. 왕은 조슈아를 따뜻한 남쪽 영지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 *

“어, 어때?"

나는 쭈뼛거리며 동생의 앞에 나섰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를 보고 입을 떡 벌린 브란은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진짜 누나야?"

“괜찮아? 예뻐?"

”와, 요즘 기술 진짜 대단하다. 누나인지 못 알아봤어.”

"죽을래?"

내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브란이 씩 웃었다.

"농담이고 진짜 예뻐 누나보다 예쁜 신부는 세상에 없을 거야."

동생의 입에서 처음 듣는 극찬이었다. 괜히 쑥스러워진 나는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괜찮아? 너무 수수하진 않고?"

"누나, 대체 어딜 봐야 그 옷이 수수하게 보일 수가 있는 건데?"

브란이 경악하며 되물었다. 나는 조금 억울한 기분으로 머리에 쓴 보석 화관을 가리켰다.

"처음엔 화관 전체가 보석이었어. 내가 너무 무겁다 고 불평해서 줄인 거야. 그리고 드레스랑 베일에도 보석이 달려 있었어. 다 떼게 하니까 그래도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너무 수수하지 않느냐고 세수가 걱정하잖아.“

"역시 그 사람은 어딘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뭔가 남들이랑 생각하는 방식이 좀 달라."

브란이 심각한 얼굴로 가슴 앞에 팔짱을 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나는 손을 획획 내저었다.

“아냐 그냥 인간관계에 서툰 것뿐이고, 오히려 그런면이 귀엽기도 하니까."

“뭘 또 그렇게 필사적으로 해명해 이제 와서 내가 결혼식을 막을 것도 아닌데."

브란이 피식 웃었다. 결혼식을 알렸을 때 녀석이 깽판을 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조금 뜨끔했다.

“전에는 절대 안 된다고 했으니까.”

“당연하지. 누나가 가족의 허락도 없이 납치당하듯 결혼해서 신분까지 숨기고 사는데, 어느 동생이 그렇게 만든 매형을 좋아하겠어? 난 지금도 그 사람이 싫어!"

반쯤은 억지였지만 그래도 놀라고 속상했을 브란의 마음은 이해가 됐다. 나는 동생을 살짝 안아 주었다.

“그렇게 싫은데 왜 괜찮다고 한 거야?"

"누나가 장갑을 안 꼈으니까.”

브란이 웅얼거리듯 답했다. 내가 선뜻 알아듣지 못 하자 녀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란 가문에 있을 때는 잘 때도 장갑을 꼈잖아. 누가 다가오는지 경계하고 내 손이 닿는 것도 무서워했지. 하지만 지금의 누나는 안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 만큼 잘해 준 거겠지.”

"아······."

그러고 보니 아스트리아에서 살게 된 뒤로는 장갑을 끼고 다닌 적이 없었다.

누구도 무례하게 나를 만지지 않는데다가, 적의를 숨긴 사람을 건드려서 알아내기가 편했으니까.

언제부터 그랬더라.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렸다.

“일하는 데는 아무 문제없어요. 절 싫어하는 사람이 만져도 참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만두라는 뜻이 아니야. 참을 이유가 없다는 거지."

"네?"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당신을 만지지 못할 테니까.”

아니, 이게 진짜 세수 때문이었어? 괜히 귓불이 뜨끈뜨끈해졌다.

“그리고 뭐 난 그 사람이 싫지만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짜처럼 보이더라. 그래서 반대하지 않은 거야.”

시선을 아래에 둔 브란이 바닥을 툭툭 찼다. 그 모습에서 나를 보내는 서운함이 느껴져 미안하고 고마웠다.

"브란, 정말 고마워."

나는 손을 뻗어 브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끄러워하며 내 손길을 받은 브란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누나, 이제 나도 다 큰 남자니까 이렇게 머리 쓰다 듬고 하면 안 돼. 알겠지?"

”뭐?”

아직 쥐콩만 한 게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머리를 마구 헤집어 주자 브란이 왁왁 거렸다.

"악, 무슨 짓이야!"

“쪼끄마한 게 어른인 척하긴. 네가 아무리 커도 나한텐 그냥 아기 같은 동생이라고.”

내 말에 입술을 깨문 브란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것 봐. 아직 어린애면서 강한 척하긴.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을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다.

"브란 혹시 말이야 내가 친누나가 아니라도 괜찮아?“

조심스럽게 던져 본 말이었는데 브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상관없어. 나랑 피 한 방울 안 섞였다고 해도 누나는 내 누나야."

녀석의 단호한 태도에 나는 좀 감동받았다. 사실 브란의 누나가 아니라 조카인 셈이라 좀 미안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아. 인간이 아니면 뭐 어때 누나는 그럴 자격이 있어.”

"······응?"

브란이 민가를 오해하고 있는 느낌인데?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방해했다.

“저, 곧 식이 시작될 거라고 해서…….”

내 가짜 오빠인 레오디나스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와 함께 잠깐 자리를 비켰던 시녀들이 돌아와 내 드레스를 살피고 정리해 주었다.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뜻밖에도 세수가 서 있었다.

“세수? 무슨 일 있어요?"

지금은 신랑 대기실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내 물음에도 세수 아무 말 없이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 끝을 새빨갛게 물들인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예뻐 이비. 정말로.”

“고, 고마워요. 세수도 아주 멋져요.”

거짓말이 아니라 오늘의 세수 잘생김을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랬다.

서로를 깔끔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우리를 염병한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브란이 물었다.

“아니, 그래서 왜 왔냐고 누나가 묻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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