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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38화 (238/240)

238화

"까아악!"

도망치려다 내게 엉덩이를 물린 물의 산이 뻑뻑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너 진짜 미쳤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크아아앙!”

개 중에서도 최강의 미친개가 울부짖었다!

내가 멍멍 짖으며 달려드니 기겁한 물의 신이 마구 손을 휘저었다.

“오지 마!"

투명한 물의 막이 앞을 가로막자 나는 곧바로 유턴해서 장식대에 놓여 있는 잔과 책 따위를 덮쳤다. 기물 파손은 강아지의 의무죠.

"까아악! 안 돼!"

"돼!"

다 엎어! 때려 부숴! 찢어 버려!

내가 보는 족족 물어뜯고 파괴하자 당황한 신들이 힘을 써서 나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잽싸게 몸을 놀려 피해 버렸다.

천공신이 날리는 번개에 책 하나가 완전히 새까맣게 타 버렸다. 그러자 물의 신이 울먹이며 지원군을 불렀다.

“셋째 언니,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말려 봐!"

“가만히 있는 나는 왜…….”

“그럼 계속 저렇게 날뛰게 내버려 둘 거야?!"

막내의 닦달에 한숨을 쉰 불의 신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붙잡기만 할 거니까 피하지 마라.”

불의 신이 불꽃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내게 던졌다. 나는 불꽃을 라면처럼 호로로 빨아들인 다음 사방팔방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으악, 이게 뭐야!“

화염 방사기처럼 불꽃을 뿜어 대는 나를 보고 신들이 기겁했다.

“뭐 해! 빨리 불 꺼!"

“아니, 이게 왜 안 꺼지지?"

“잠깐 비켜 봐!"

“악! 하지 마! 불 더 커지잖아!”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나와 병아리처럼 빽빽거리는 동생들을 보고 맏이인 대지신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만!”

짝짝 박수 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리 오렴, 이블린.”

대지신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른 불을 끈 다음 쪼르르 뛰어가서 대지신의 품에 쏙 들어갔다.

“이제 알았겠지. 이 아이는 너희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대지신의 무릎에 달랑 올라앉은 나를 보고 나머지 세신들이 입을 떡 벌렸다.

“이블린은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력의 사도. 너희의 틀에 박힌 생각으로는 결코 붙잡을 수 없다.”

“자, 잠깐! 큰언니 , 설마 우리를 배선한 거야?!"

"배신이라니.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나는 씨익 웃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저와 동맹을 맺으신 거죠. 우린 목표가 같거든요."

나를 지상으로 돌려보내 세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대지신의 목표였으니까.

‘무엇보다 대지신은 우리 엄마가 방치당한 일과도 관련이 없고.'

맏이인 대지신은 매번 동생들이 친 사고를 수습해야 했다. 그중 천공신이 제일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거기에 질려 버린 대지신은 더 이상 도와주지 않겠다고 손을 털었는데, 하필 그때 우리 아빠가 쪼개지는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결국 대지신이 도와주지 않자 수습을 못 한 천공신이 일을 키워서 결국 이 지경까지 온 거였다.

‘어휴, 천공신 진짜 언제 철드나.’

내가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을 눈치 챘는지 천공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사도면서 신을 모시지 않고 네 멋대로 살겠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당연히 가능하지.

나는 사도이자 신수였다. 아빠가 몸의 반쪽과 신수의 힘을 물려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로운 몸이었다. 세계수에도, 신에 게도 속하지 않고 양쪽의 꿀만 빨아먹을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저는 지상을 덮친 재양 욕망을 해결한 대가로 전령선의 자리를 요구합니다!"

“전령산?"

전령신은 신계의 심부름꾼으로, 그리 고위직은 아니지만 저승까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신과 세계수 양쪽에서 꿀을 빨기에는 최적의 위치였다.

아빠가 내게 남겨 준 기억 속에 있는, 아마도 내가 그렇게 되길 바랐을 것 같은 자리.

무엇보다 전령선이 되면 지금처럼 신들이 부른다고 힘없이 끌려오지 않아도 된다. 거부권이 생기는 것이다.

천공신은 ‘이 자식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라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람들의 신앙을 받지 못하는 신은 결국 소멸될 뿐이다. 그런 데도 전령신이 될 데냐?"

"네, 의뢰를 받고 그 대가로 신앙을 얻으면 되니까요."

신앙은 포인트처럼 옮기거나 나눠 주는 게 가능했다. 이 정보의 출처는 당연히 대지신이다.

”의뢰? 누가 너한테 의뢰를 한다고……."

“신이나 세계수에게 받으면 되죠. 사도를 보내는 대신 저에게 일을 맡기고 싶은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사도를 만들고 내려 보내는 것에는 많은 신앙이 들어간다. 그런데 나한테 의뢰를 넣으면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해결된다.

내 말이 제법 그럴싸했는지 천공신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내친김에 앞발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저한테 의뢰하고 싶은 분 없으세요? 지금 계약하시면 반값으로 처리해 드릴게요.”

"······."

내 난동에 휩쓸려 꼬질꼬질해진 신들이 대놓고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머쓱하게 앞발을 내렸다.

“뭐, 싫으시면 그냥 세계수에게 가 보고요.”

“지금 양다리를 걸치겠단 소리야?!"

"양다리라뇨? 그럼 친가랑 외가가 있는 사람은 다 양다리를 걸친 게 되는 건가요?"

내가 업신여기는 표정을 짓자 물의 신이 발끈했다.

“너 나한테만 태도가 불손하잖아!"

”에이, 착각입니다. 호갱님.”

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고 물의 신을 꼬시기 시작했다.

“이런 의뢰는 어떨까요? 아스트리아의 수도에 호갱님의 이름을 딴 ‘탈랏사’라는 배달업체를 만드는 겁니다."

"······배달업체?"

"호갱님은 물과 흐름을 관장하시니 이동이 활발해지는 것만으로도 신앙을 얻으시죠? 이거 잘만 되면 수도 전체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성공하면 전국 확산도 가능하고요. 저한데 맡겨 주시면 책임지고 성공시키겠습니다."

나는 꼬리를 흔들며 물의 신을 유혹했다. 그러자 물의 신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톱을 씹어 찍다. 가만히 앉아서 신앙을 벌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이어서 나는 천공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바친 축제는 마음에 드셨나요? 저와 계약해 주신다면 초반엔 4년 주기, 후반에는 1년 주기로 축제를 정착화 시키겠습니다. 매해 새로운 축제, 새로운 볼거리와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

천공신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불의 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불의 신이 말했다.

"난 그냥 아무 조건 없이 계약할게. 내 무녀가 너한테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지금 너한테 붙어살고 있는 성화도 그렇고.”

“정말요?"

이어서 대지신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 신도들이 너에게 신세 진것이 많으니 아무 조건 없이 계약하마.”

”와, 감사합니다!"

기뻐서 덩실거리는 나를 본 물의 신이 입을 삐쭉였다.

“난 절대 조건 없이는 안 돼 네가 아까 말한 거 전부 다해 줘야해.”

"예, 호갱님.”

어차피 하려던 신규 사업인데, 물의 신의 이름만 붙였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거저먹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천공신을 힐끔 바라봤다.

분명 내 제안은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선뜻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음식에 돈을 내라는 소리를 들은 얼굴이었다.

‘까다롭게 구네 하지만 여유 부릴 시간이 없을 텐데?’

내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쿠르릉하고 공기가 울리며 윙윙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공신! 지금 당장 내 신수를 내놓아라!

기다리고 있던 마지막 멤버, 세계수의 등장이었다. 그래, 내 소식을 듣자마자 뛰어올 줄 알았다. 탈주한 노비를 붙잡을 기회인데 놓칠 리가 없지.

세계수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방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쿵쾅쿵쾅 흔들렸다. 물의 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저 미친 나무가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야!"

“아스트라이아! 설마 이대로 이블린을 내줄 생각은 아니지?"

불의 신의 닦달에 천공신 역시 흔들리는 표정이었다. 이대로 나를 세계수에게 빼앗기느니 일단 지상으로 보내자는 생각이 드는 듯했다.

그때를 기다리던 나는 대지신에게 미리 맡겨 두었던 계약서를 받아 착 내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여러분께서 찬성하신다면 여기에 도장을 받고 싶습니다.”

나를 전령신으로 임명하고 어떤 간섭도 하지 않으며 지상에서의 활동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게 유리한 항목만 줄줄이 쓰여 있는 계약서를 본 천공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런 날강도 같은…….”

바로 그 순간, 거대한 뿌리가 벽을 퍽 뚫고 들어왔다.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세계수의 부리를 본 신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세계수에게 가야지.”

내가 주섬주섬 계약서를 챙기자 불의 신이 팍 소리 나게 뺏어 들었다. 고리고 꾹 손도장을 찍은 후 대지신에게 넘겼다.

대지신은 묵묵히, 물의 신은 입을 삐쭉이며 손가락을 눌렀다. 마지막으로 한숨을 쉰 천공신이 말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네?“

"계약 기간은 세수 엘마이어가 살아 있을 때까지다. 그가 죽으면 너도 지상을 떠나야 한다.”

오, 뭐야. 생각보다 괜찮은 조건인데?

“대신 세수를 죽이려고 하거나. 세수 수명에 손을 대면 안 됩니다. 간접 살인도 금지고요.”

"백 년도 안 돼서 죽을 인간인데 그런 짓을 왜 해? 그리고 피시스가 그걸 용납할 것 같으냐?"

대지신을 힐끗 보자 괜찮다는 얼굴로 과계를 끄덕여 준다. 그래서 나도 추가 조건에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천공신이 지장을 찍자 내 등에 작은 날개가 돋아났다. 전령신의 상징이었다.

오, 이거 뭔가 느낌이 특이한데? 신기해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내게 천공신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걸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널 반드시 손에 넣을 것이니.”

“네네, 감사합니다. 도장이 아주 선명하게 찍혔네요.”

계약서를 받아 털 사이에 잘 숨긴 나는 대지신을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대지신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아이를 잘 부탁하마.”

네, 제가 가서 열심히 해치겠습니다!

나는 대지신이 열어 준 문을 통해 지상으로 향했다. 날개를 열심히 파닥거리며 경계를 넘자 어디론가 쑥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순간, 나는 익숙한 품으로 돌아와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세수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조금 움찔했다.

“세수?"

설마 지금까지 계속 내 얼굴을 보고 있었던 걸까?

물어볼 틈도 없이 세수 입술이 나를 덮쳤다. 애절 함을 넘어서서 필사적으로 키스하는 그에게 휩쓸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폭풍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술을 떼어 낸 세수가 눈물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약속, 지켜 줘서 고마워.”

그 말이 얼마나 아프게 들리던지.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초췌해진 세수를 보니 너무 미안했다.

“제가 다 끝내 버리고 왔어요.”

"······응.”

"두 번 다시 이렇게 울리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내 말에 세수가 울듯이 웃었다. 다시 한번 부드럽게 입맞춤한 그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나는 대답하듯 그에게 입 맞췄다. 그는 몇 번이고 내 뺨을 쓰다듬었다. 마치 내가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더 자주 이렇게 말해 주지 못한 걸 후회했어. 당신을 정말 사랑해. 이비."

“세수.”

“당신은 내 세상이야. 내 전부고. 난 이제 당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 이런 날 가없게 여겨 줘.”

계속되는 고백 공격에 두 귀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너무 좋으면서도 세수를 해치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야, 참야 지금은 때가 아니야.

흠흠 헛기침을 해서 충동을 가라앉힌 나는 씩 웃으며 속삭였다.

“세수, 그거 알아요? 우리 오늘부터 영혼의 짝이 됐어요.”

”······영혼의 짝?"

“평생 행복하게 살다가 남겨진 사람이 외롭지 않도록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숨을 거두는 거예요.”

말하다 보니 문득 세수가 싫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를 보는 내 손을 끌어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춘 세수가 웃었다.

“당신과 영혼이 이어지다니, 꼭 꿈을 꾸는 것 같군.”

그 웃음이 어찌나 예쁘던지. 누가 내 심장을 세게 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더 이상 흑심을 참지 못하고 세수를 슬쩍 밀어 눕혔다.

"혹시 졸려요? 저 오늘은 세수 안 재우고 싶은데.”

세수 그런 내게 키스했다.

또 한 번. 다시 한번. 영원히 계속할 것처럼.

나는 그에게서 전해지는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며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건 분명 이런 모양을 하고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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