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 * *
정령수의 꽃에서 빛이 사라지는 순간, 이블린이 힘없이 무너졌다.
“이비!"
세수 다급히 고녀를 안아 들었다. 품속에서 축 늘어지는 작은 몸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제발…….”
기도하듯 중얼거린 그는 이블린의 코끝에 손을 댔다. 다행히 색색거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가 절로 악물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지켜봐야 하다니.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이, 이블린! 얘, 얘야! 어떻게 된 거냐!"
그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케인이 소리쳤다. 그는 세수와 달리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사방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얘야! 대답해라! 이블린!"
덕분에 멍하게 서 있던 세수도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재빨리 겉옷을 벗어 이블린의 몸을 감쌌다.
“서, 설마 나를 여기 버리고 간 건 아니지?"
"······."
겁먹은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수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날아오른 작은 빛이 케인의 눈앞을 밝혔다.
케인은 세수 품에 안겨 있는 이블린을 보고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애가 왜 갑자기 쓰러졌……."
“다가오지 마십시오.”
싸늘한 목소리가 케인을 가로막았다. 케인은 새파란 눈을 번뜩이는 세수 모습에 멈칫했다.
상처 입은 맹수 같은 눈빛.
아무리 구박하고 미워해도 묵묵히 참기만 하던 아들이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찢어발겨질 것 같은 두려움에 얼어붙었던 케인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하다 세수."
"······."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 내가 바보라서, 너무 멍청해서…….”
케인은 환상이 사라져 다시 폐허로 변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 나는 두려웠다. 네가 너무 뛰어나서 무서웠어. 내가 겪은 일올 아서가 똑같이 겪을까 봐."
케인의 동생, 트리스탄 엘마이어는 어릴 때부터 영특한 아이였다.
케인의 아버지는 병약하고 예민한 장남보다, 건강하고 영리한 둘째를 편애했다. 그러자 트리스탄은 날이 갈수록 오만해져서 형인 케인을 무시하고 짓밟았다.
케인의 아버지는 그런 둘째의 만행을 용납했다. 트리스탄이 온갖 사고를 치는 망나니가 된 뒤에도 마찬 가지였다. 그의 사랑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둘째에게만 향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캐서린 공주의 선택을 받지 않았다면, 케인은 결코 공작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동생과 나는 서로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다. 결국 동생은 내 명령으로 처형당했지. 네가 네 형보다 뛰어남을 알았을 때 나는 똑같은 비극이 반복될 거라 생각했다."
케인은 처음부터 그 싹을 뽑아 버려야 한다고 생각 했다. 세수가 공작 작위에 대한 미련조차 갖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밀어내자고.
“나는, 내 두려움에 눈이 멀어서 너희를 똑바로 보지 못했어."
케인은 자신이 옳은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자신의 상처 때문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의 자식들은 모두 불행해졌다. 그가 사랑한 아서, 가슴 아파서 외면한 마거릿, 철저하게 미워했던 세수까지.
“그게 바로 아버님이 지은 죄예요.”
어디선가 이블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똑같은 비극을 낳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은 결국 또 다른 비극을 낳았을 뿐이다. 그것을 이제야 겨우 인정 할 수 있었다.
“정말 미안하다. 네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미안하다, 얘야."
재와 섞인 폐허 위에 케인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무릎 끓은 아버지를 보는 세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저한테 뭘 바라시는 겁니까? 용서요?"
“아, 아니다 내가 용서받을 자격도 없다는 건 안다."
“제 용서가 필요하다면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다가오지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도 마십시오.”
희미한 빛 속에 드러난 세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아들을 알아챈 케인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얘, 얘야"
“가까이 오지 마!"
덫에 걸린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놀라 굳어 버린 케인을 향해 세수가 적의를 쏟아 냈다.
“당신들은 그녀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 기다리고 기다려서 겨우 내게 와 준 사람인데, 이제야 내 옆에 있어 주겠다고 말해 줬는데…….”
세수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른 이가 이블린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이블린에게 다가오려는 케인의 목을 조르려고 할 정도로.
“다시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 절대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선언한 세수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케인은 차마 그를 붙잡지 못하고 멍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여보, 캐서린.”
케인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지켜 주구려. 저 애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도와줘요. 나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 아무것도······.“
아들이 무너져도 그는 떠받쳐 줄 수가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저 어둠 속을 헤매는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할 뿐.
그리고 밤은 이제야 막을 올렸다.
* * *
세수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께 혼나고 숨을 곳을 찾았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그는 지금처럼 홀로 걷곤 했다.
나중에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거리는 가지 사이에 숨어서 슬픔을 삭이면 모 든 것이 괜찮은 듯이 느껴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도 숨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그의 세상이었기에.
“그럼 세수를 잃어버리면 제일 먼저 커다란 나무를 찾아야겠네요.”
"당신은 어디에 있을 건데?"
“전 덤불이나 돌 사이에 끼여 있을 것 같은데요.”
과거에 장난스럽게 주고받은 대화가 떠올랐다.
하지만 어떤 덤불이나 돌 사이를 뒤져도 그녀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이블린의 몸은 그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영혼은 아니었다.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미칠 것 같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는 너무 다정해서, 무정할 정도로 상냥해서, 제 손에 쥐여진 마지막 보물까지 그를 위해 쓰고 가 버렸다.
해묵은 상처까지 보듬어 주려 했던 이블린에게 광기로 무너진 모습을 보여 줄 순 없기에. 세수 지옥 같은 심정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비…….”
잠든 듯이 눈을 감은 이블린은 너무 평온해 보였다. 아무런 미련도 없어 보이는 얼굴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당신을, 사랑해.”
세수 이블린의 이마에 키스했다. 평소 그녀에게 더 많이 말해 주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세수, 절 믿어요. 저 이블린이라고요.”
“천공신의 멱살을 털어서라도 돌아올게요.”
이블린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세수 그 약속을 믿었다.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기다릴게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돌아온다면 그녀가 돌아와 준다면 수십 년이든, 수 백 년이든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는 제 영혼을 바쳐서라도 신계로 향할 생각이었다. 하나뿐인 그의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 세수 이블린을 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의 과거가 잠들어 있는, 어두운 저택을 향해서.
밤의 어둠이 그림자처럼 그의 발아래 늘어졌다.
* * *
부드러운 손길이 나를 쓰다듬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몸을 뒤척이자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목소리였다.
“세상에, 너무 귀여워.”
"흥, 아직 새끼라서 그런 거겠지”
"큰언니, 나도 안아볼래!"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야?
짜증스럽게 눈을 뜬 나는 거안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하하! 재 털 곤두선 것 좀 봐. 밤송이가 됐어!"
파랑 머리의 거인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이상하게도 빨강 머리 카밀라와 닮은 얼굴이었다.
“정신이 들었어?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어?"
반투명한 베일을 쓴 금발 거인은 어딘지 마리아와 비슷했다! 마리아보다는 좀 더 요염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막 깨어난 애를 다그치지 마라.”
나를 안고 있는 갈색 머리 거인은 성녀님과 얼굴이 똑같았다. 내 등을 토닥거리는 손이 무척 다정해서 절로 안심이 되었다.
"홍, 저 요망한 눈을 좀 봐라. 저게 어딜 봐서 백 살도 안 된 새끼란 말이야?"
마지막으로 긴 검은 머리 위에 왕관을 쓴 거인은 왕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이쯤 되면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이 모두 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같이 내 지인들을 닮은 건 진짜 모습이 아니라 내 안의 이미지를 빌려 온 것일 테고. 하필 넷이라는 건······.
"혹시 사대선이신가요?"
대륙을 지배하는 네자매 신.
첫째가 대지신 피시스.
둘째가 천공신 아스트라이아.
셋째가 불의 신 헤메라.
막내가물의 신 탈랏사였지.
“그래, 알아보겠느냐?"
갈색 머리 거인이 상냥하게 웃었다. 답을 떠먹여 주는 이분이 대지신이겠지.
그럼 검은 머리 왕관이 천공신, 금발 베일이 불의 신, 파랑 머리가 물의 신이겠군.
누구에게 불려가도 상관없도록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설마 사대신들이 모두 모여 있을 줄이야.
습관적으로 뺨을 긁적이려던 나는 몽실몽실한 앞발이 내 얼굴로 다가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이게 뭐여!"
기겁하는 나를 보고 히죽 웃은 물의 신이 내 앞에 커다란 물거울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거울에 비치는 강아지를 보고 펄쩍 뛸 뻔했다.
세수 크라바트에 새겨졌던 황금색 강아지.
내가 밤마다 들여다보면서 정신 통일을 했던 뿌숭뿌숭한 털뭉치가 거울을 향해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신수의 자식이라서인지 이런 모습이 되었더라고. 마음에 들어?”
예?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개가 되었는뎁쇼?
어이없이 쳐다보자 물의 신이 생글생글 웃었다.
"난 마음에 드니까 됐어. 키우는 신수가 강아지면 귀엽고 좋잖아.“
누가 누굴 키워?
나는 코웃음을 치며 앞발을 흔들었다.
“아, 됐고. 그래서 전 왜 부르셨는데요?"
“네 사명이 끝났으니까.”
이번에 답한 것은 천공신이었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한테 사명이 있었나요?"
“너는 네 어미에 이어 우리의 사도가 되었지. 그리고 훌륭하게 네 사명을 완수했기에 상을 주려 부른 것이다.”
와, 여기서 우리 엄마 이야길 꺼내? 엄마를 그렇게 죽게 만든 게 누군데, 양심 어디?
나는 반정거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협상을 시도했다.
“그럼 지상으로 내려가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시는 건 어떨까요? 저한테는 그게 제일 큰 상일 것 같은데요.”
“지상은 사도가 사명을 이루기 위해 내려가는 곳. 아무런 사명도 없는 자가 머무를 수는 없다.”
“그럼요?"
"네가 모실 신을 정하면 그에 맞춰 적당한 대가를 주마. 너에게도 결코 손해는 아닐 것이다.“
아하, 그러니까 지상으로 보내 줄 수는 없고 푼돈이나 적당히 쥐여 줄 테니까 노예 짓이나 해라?
"날 주인으로 택하면 섭섭하게 대하진 않을게. 어때?"
"흠, 천상의 왕인 나를 택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나는 카밀라를 닮아서 낄낄빠빠를 못하는 물의 신과 저를 선택하길 강요하는 천공신을 번갈아 봤다.
그때 날 안고 있던 대지신의 팔이 살짝 느슨해졌다. 그것을 느낀 나는 송곳니가 드러날 정도로 씩 웃었다.
“예, 재안 감사히 들었고요. 제 대답은요.”
다음 순간 나는 대지신의 품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다 필요 없고 내 주둥이 미사일을 받아라!
"푸확!“
내 필살 어택에 안면을 강타당한 천공신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천공신을 밟고 튀어 올라 물의 신을 향해 앞발 16연타 공격을 날렸다.
"꺄아악! 이게 뭐야!"
내 이름은 이비. 미친개죠.
오늘 내가 여기서 개판 오 분 전을 열고야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