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아버님은 마치 사형대에 오르는 죄수처럼 질질 끌려 왔다.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이 올줄 알았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아버님, 대체 무슨 소리세요. 누가 들으면 제가 불효라도 저지르는 줄 알겠어요."
한심함을 가득 담은 내 눈빛에 아버님은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거짓말 나를 고문하고 학대할 생각이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서……!"
"귀찮게 왜 그런 짓을 해요."
대지신에게 삐삐치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나. 내 심드렁한 반응에 아버님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그럼 나를 왜 끌고 온 거냐?"
“아주 좋은 곳으로 모셔 가려고요. 이른바 효도 관광이죠."
효도 관광 거기에 불꽃이 더해진.
“기대하셔도 좋아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테니까."
싱긋 웃는 나를 보고 아버님은 더욱 격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벌써 떨면 나중엔 비명을 지르겠는데?
어깨를 으쓱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여기에 전부 모여 있었다. 그래서 꼭 돌아오고 싶었다.
-구르르르······.
까미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걱정스러운 울음소리에서 어디 갈 생각이냐고, 함께 가고 싶다는 뜻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번 일은 나 혼자 해내야 해."
까미가 못마땅한 듯 콧김을 내뿜었다. 나는 그녀의 콧잔등을 슬슬 쓸어 주었다.
"금방 다녀올게.”
더 이상 나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까미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복실이를 향해 쉭 소리를 냈다.
-뿌······.
세수 목에 달라붙어 있던 복실이가 반항했지만, 까미가 다시 숴 하고 울자 미적거리며 떨어졌다. 복실이가 떨어지자 코코도 자동으로 탈락이었다.
나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두 녀석을 달랬다.
“미안, 지금 가려는 곳은 착한 아이들은 들어갈 수가 없거든.”
리얼 유령의 집을 겪기엔 애들이 너무 어렸다. 시무룩해진 복실이가 꼬물꼬물 다가와 내 뺨에 입을 콕 찍었다. 그것을 본 코코도 똑같이 따라 했다.
“아이고, 예쁜 내 새끼들."
나는 두 녀석을 끌어안고 양껏 쓰다듬은 다음 놓아 주었다. 이것으로 마음의 준비도 모두 끝냈다.
“세수, 이제 가요."
내 부름에 묵묵히 고개를 끄떡인 세수가 다가왔다.
한 팔에 토끼 인형이 안겨 있어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워 보였다.
“아버님도 이리 와서 제 팔 잡으세요.”
그러자 쭈뻣쭈뻣 다가온 아버님이 내 팔을 잡았다. 세수는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이동 때문이니 어쩔 수 없이 참는 듯했다.
나는 곧바로 왕의 길을 열었다. 황금의 길은 순식간 에 우리를 불타 버린 폐허 앞에 내려놓았다.
해가 넘어가서 주위가 온통 캄캄했기에 나는 정령수의 꽃을 물어 올렸다. 꽃이 은은한 빛을 내뿜자 어둠속에 가려져 있던 흉터와 같은 흔적들이 나타났다.
마거릿 공녀가 살해당한 곳. 바로 엘마이어 본가의 별채였다.
"여기는…….”
어리바리하게 서 있는 아버님과 달리 세수는 단번에 여기가 어딘지 눈치챈 것 같았다. 그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세수와 만나게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세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짐작한 것 같았다.
품에 안고 있는 인형, 마거릿이 사망한 별채, 본가에서 마주친 악령까지. 단서는 아주 많았으니까.
눈치 빠른 그가 지금껏 깨닫지 못한 것도 동생이 편안한 안식을 얻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겠지.
“이비, 나는…….”
세수는 가여울 정도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용기를 내요, 세수. 그녀는 지금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
나는 고개를 숙인 세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를 이끌듯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우리의 뒤를 쫓아오는 아버님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이 밤중에 누굴 만나. 아니, 여긴 길이 왜 이래?"
이런 상황에서도 눈치가 없을 수 있다니. 아무래도 아버님은 돌아가자마자 재교육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아버님의 목을 조르는 심정으로 꽃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꽃이 내뿜는 빛이 더욱 밝아지면서 현실과 다른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리는 아름답게 꾸며진 저택 안을 걷고 있었다. 아버님이 뒤늦게 기겁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히이익! 이게 뭐야!"
반면 세수는 죽은 사람 같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자꾸 분위기를 깨는 아버님을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아들 앞에서 얻어터지긴 싫었는지 아버님은 대번에 조용해졌다. 나는 다시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나를 따라오던 세수가 앞으로 나섰다. 점점 다급해지는 걸음이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이윽고 우리는 별채의 주인이 있는 방에 도착했다. 세수가 굳게 닫힌 문을 멍하게 바라봤다.
타오르는 불과 연기 속에서 잠겨 있던 문. 끝내 열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이제 열릴 거예요.”
나를 돌아본 세수가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은 온통 분홍빛으로 꾸며진 방이었다. 거기선 아주 조그마한 소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마거릿?"
세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마거릿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빠?”
갈색 기리에 커다란 푸른눈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소녀였다.
하지만 내 예상보다 더 어렸다. 마거릿은 열 몇 살 정도에 죽은 걸로 아는데, 지금은 대여섯 살 정도로만 보였다.
“왜 여기서 울고 있어?"
세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마거릿은 제게 다가오는 세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오빠야?"
"······응.“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세수가 속삭이듯 답했다. 그러자 마거릿은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미안해, 오빠. 오빠가 준 인형 잃어버렸어. 마거릿은 나쁜 아이야.”
"······아니야.”
세수는 떨리는 손으로 품에 안고 있던 토끼 인형을 내밀었다.
"오빠가 새 인형을 가져왔어.”
"토끼!"
깜짝 놀란 얼굴로 인형을 받아 든 마거릿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토끼 예뻐! 고마워, 오빠!"
인형을 꼭 끌어안고 뺨을 비빈 그녀가 웃었다.
“인형이 있으니까 이제 라리사도 안 무서워."
그 말이 간신히 참고 있던 세수를 무너뜨렸다. 고개를 폭 숙인 그가 오열하듯 어깨를 떨었다. 그러자 마거릿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오빠 왜 울어? 아파?"
“······아니.“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른 세수가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거릿, 라리사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그녀는 높은 탑에 갇혀서 다시는 못 나와.”
“진짜?“
“응, 저기 있는 예쁜 언니가 가뒀어.”
세수 말에 마거릿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자 내 옆에 멍하게 서 있던 아버님이 반응했다.
"마, 마거릿!"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마거릿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재빨리 세수 뒤에 숨은 그녀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마거릿, 아빠다. 응? 무서워하지 마.”
“아니야! 우리 아빠 아니야!"
애가 탄 아버님의 외침은 마거릿을 크게 울리는 결과만 낳았다.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마거릿 공녀의 기억엔 아버님이 남아 있지 않아요. 아버님은 항상 그녀의 옆에 없었으니까요.”
"······."
아버님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딸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겠지만, 마거릿에게 그는 모르는 사람이다. 잘못했다고 빌어 봤자 불편하고 무서울 뿐이었다.
“그게 바로 아버님이 지은 죄예요.”
내 말에 얻어맞은 것처럼 휘청거리던 아버님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이블린.“
나는 감격으로 떨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머리의 소년, 아서가 나를 보며 울먹이고 있었다.
"약속······ 지켜 줘서 정말 고마워요.”
“천만에요."
어깨를 으쓱한 나는 어서 들어가라는 의미로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아버님이 쓸데없이 먼저 뒤를 돌아봤다.
“아, 아서냐?"
아서의 얼굴에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총 맞은 새 같은 표정이 된 아버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서, 내 아들아!"
“아버지.”
아서는 달려와서 저를 끌어안는 아버님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죄송해요. 이렇게 빨리 죽어 버려서요."
"흐, 흐으윽. 내 아들, 이 불쌍한 것!"
오열하는 아버님을 계속 토닥이던 아서가 그를 밀어 냈다. 그리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뭐든 말해라 뭐든."
눈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서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 죽음은 세수 잘못이 아니에요. 쓰러지는 기둥에 운 없이 제가 깔려 버린 탓이죠. 세수가 없었어도 전 마거릿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을 거예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
예상과는 너무 다른 말에 아버님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변했다.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쳐다본 아서가 한 숨을 쉬었다.
"저는 늘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죠."
“아, 아니야. 아니다 나는 너를…….”
“아버지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끝나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아서, 얘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아서가 아버님을 뒤로한 채 세수에게로 걸어갔다. 나는 아서에게 달려들려는 아버님을 막았다.
"방해하지 마세요.”
아서와 세수를 만나게 해 주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아버님이 멋대로 시간을 허비하게 둘 순 없었다.
“하지만 아서가······."
나는 안타까움에 허우적거리는 아버님을 붙잡고 두 사람의 대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세수와 아서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세수 뒤에서 얼굴을 쏙 내민 마거릿이었다.
"큰오빠?"
“응, 마거릿.”
“왜 그렇게 작아졌어?"
"마거릿이랑 놀려고.“
“진짜?”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은 아서가 세수를 바라봤다.
“미안해, 세수.”
"······형?“
느닷없이 튀어나온 사과에 세수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아서는 담담하게 고백했다.
“나는 나보다 뛰어난 너를 질투하고 있었어. 너와 마주하면 내 부족함이 느껴져서 힘들었거든. 너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네 앞에만 서면 내가 덜떨어진 인간이 되는 것 같아서 피해 버렸어.”
"······."
“그렇지만 너는 내 자랑이기도 했어. 너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네가 내 동생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너를 질투할 때도 네가 밉거나 싫었던 적은한번도 없었어.”
아서는 모든 짐을 덜어 낸 사람이 그러하듯 홀가분하게 어깨를 늘어드렸다.
“미안해 이런 부족한 인간이 네 형이라서 정말 미안하다. 세수.”
“그런 말 하지 마. 형은 내게 최고의 형제였어.”
세수 대답에 어깨를 들썩인 아서가 그를 끌어안았다. 세수 그보다 작아진 형을 마주 안아 주었다.
“너는 앞으로도 잘할 거야.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이내 포옹을 푼 아서는 마거릿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거릿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셔 이제 우리는 어머니를 만나러 갈까?"
“엄마가?"
마거릿은 엄마를 찾는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아서가 나를 돌아봤다.
“정말 고마워요, 이블린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무사히 저쪽으로 건너가는 게 저한테 은혜를 갚는 거예요.”
나는 점점 빛이 희미해지는 정령수의 꽃에 남은 힘을 닥닥 긁어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꽃이 다시 한번 섬광을 내뿜었다.
방 전체를 하얗게 물들이는 빛 속에서 또 다른 문이 열렸다.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두 영혼이 굴레를 벗고 날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꼭 보답할게요.
아서가 남긴 속삭임이 귀에 닿는 순간, 두 사람을 받아들인 문이 쿵 하고 닫혔다. 동시에 정령수의 꽃이 시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슬아슬했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은 다 했다. 하얗게 불태웠어.
사라지는 빛 속에서 세수가 나를 돌아봤다. 그는 눈물 젖은 얼굴로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달래 줄 시간이 없었다. 꽃이 완전히 시드는 순간, 내 의식은 어디론가 획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