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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35화 (235/240)

235화

* * *

나는 무표정한 세수를 보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는 내게 달려드는 라리사를 베어 버린 뒤로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도 침목을 지킬 정도였다.

평소라면 왜 그러냐고 물어봤을 텐데, 지금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잔인해서 질려 버린 건 아니겠지?'

라리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쳤다. 아무리 끔찍하게 죽어도 모든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엇보다 죽음의 고통은 아주 잠깐이었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의 시간을 생각하면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성녀를 통해 대지신에게 삐삐를 쳤다.

딱 36년 동안만 라리사를 저승에 받아 주지 말라고.

대지신은 ‘ㅇㅇ' 라는 아주 굴한 답변을 주었다. 나는 감사를 담아 복실이가 정성껏 그린 할머니 그림과 코코의 발자국 그림을 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라리사를 위한 지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주 호사스럽고 편안한 감옥을.

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계속 갇혀 있는 것보다 멘탈이 갈리는 일도 드물었다.

누구와 대화하지도 못하고 계속 방 안에만 갇혀 있는 것 아니면 찻값을 치르지 않고 달아난 죄로 죽지도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

라리사가 어느 쪽을 택하든 상관없었다.

이왕이면 10년쯤만 감금 생활을 즐겨 줬으면 했다. 양쪽을 고루 맛보는 쪽이 준비한 내게도 보람이 있으니까.

하지만 성격 급한 라리사는 내가 탑을 나서자마자 두 번째를 선택했다. 덕분에 준비한 멘트까지 알차게 써 먹을 수 있었다.

음, 그래도 남은 36년 동안 힘내, 파이팅!은 좀 사악해 보이니까 세수가 없을 때 말할걸.'

이미지 관리에 실패한 것을 후회하던 나는 문득 세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무표정한 조각상 같은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세, 세수? 왜 울어요?"

반사적으로 얼굴을 더듬은 세수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리 남편이 왜 울지? 누가 괴롭혔어요? 내가 혼내 줄게!"

나는 벌떡 일어나 세수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세수는 나를 확 끌어안았다. 나는 엉겁결에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비.“

"응, 저 여기 있어요.”

나는 세수 가슴을 토닥였다. 길 잃은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그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세수는 마음을 가라앉힌 것 같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뭘요. 살다 보면 갑자기 울고 싶어질 수도 있죠.”

미남 이즈 뭔들. 뭘 해도 예쁘고 잘생겼으니 괜찮다.

”······동생을 죽인 원수가 비참한 끝을 맞았는데 누구보다 기뻐해야 하는 순간인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어떤데요?"

"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아."

저런 WHO가 인정한 번아웃 증후군이군요.

"원래 그래요. 복수는 사실 남는 게 없거든요. 아주 허무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훨씬 나아요."

그래서 나는 아주 확실하게 복수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세수가 주먹을 불끈 쥐는 나를 보고 웃었다.

“당신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고마워, 이비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야."

아니, 이걸 이렇게 진지하게 말해 버리면 내가 좀 부끄럽잖아. 괜히 손을 꼼지락거리던 나는 아직 젖어 있는 세수 눈가에 입 맞췄다.

“이제 좋은 생각만 해요. 지금 세수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예요?"

"······하고 싶은 일?"

잠시 고민하던 세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깨끗하게 씻고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거?"

소박하지만 아주 마음에 드는 소원이었다. 세수가 비밀을 말하듯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과 한 담요를 나눠 덮고 있었으면 좋겠어.”

“음, 그거면 돼요?"

"풀죽은 나를 위해 키스를 해 준다면 더 기쁘겠지."

“그건 지금 당장해 줄 수 있는데."

히히 웃으며 쳐다보자 세수가 덮치듯 입을 맞춰 왔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감정들로 머리가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다.

아빠의 힘을 물려받은 후로 키스할 때 기절하는 일은 사라졌다. 하지만 진짜 기절만 안 하는 수준이었다. 기분이 좋아서 해롱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뇌에 힘을 주고 엇을 땐 괜찮지만, 키스하면서 뇌에 힘을 주는 건 저글링을 하면서 파전을 뒤집는 일과 비슷했다. 멀티가 안 된다는 뜻이다.

“이비, 숨 쉬어야지."

”응······."

세수가 정신을 못 차리는 나를 품에 기대게 해 주었다.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내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생각났어."

“뭔데요?"

“결혼식. 당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초대해서 식을 올리고 싶어.”

나는 가문의 전통대로 진행한 결혼식이 패키지 같아서 편했지만 세수에겐 아쉬움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신혼여행도 다시 갔으면 좋겠어.”

우리의 신혼여행은 정령수의 하이빔으로 허망하게 끝났다. 세수가 나바르 왕국으로 출장을 떠나는 바람에 여운을 즐기지도 못했다.

"좋아요. 까짓것 한 번 더 합시다."

세수와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여행을 즐긴다는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그런데 우리 둘이서만 가는 겉 힘들 것 같아요. 복실이와 코코를 데려가도 괜찮아요?"

"데려가는 게 좋겠지 이번에도 떼어 놓으면 돌아왔을 때 나를 잡아먹으려고 들 테니까.”

복실이와 코코는 아직도 나를 데리고 도망쳤던 세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우리가 좀 붙어 있을라치면 끼어들어서 난리를 치고, 잘 때도 내 목에 찰싹 붙어서 세수가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물론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는 녀석들이라 토닥토닥 재우기만 하면 문제없었다.

"둘 다 진짜로 세수를 미워하진 않아요. 세수에게 화를 내다가도 안 보이면 몰래 찾아다니거든요.”

"알아.“

하긴 눈치 빠른 남자가 꿈실꿈실 파닥파닥 따라오는 녀석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미움 받아도 어쩔 수 없지. 난 지금도 당신을 독점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거든.”

세수가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웃었다. 유혹적인 미소에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낀 나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우, 우리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요?"

"당신은 어때?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음, 사실 아는 곳이 별로 없어서요.”

막연히 생각해 둔 곳도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세수 때문에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부로 갈까. 조금 있으면 레몬 축제가 열릴 거야. 아니면 조용하게 쉴 수 있는 서부나 아예 사막으로 가는 것도 괜찮겠군."

"죄다 먼 곳 같은데요?"

“신혼여행이니 몇 년이 걸려도 상관없어.”

세상에, 일만 알던 우리 공작님이 달라졌어요!

내가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자 세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당신에게 뭘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해 봤어. 그리고 깨달았지. 당신을 너무 오랫동안 내 옆에 가둬 두고만 있었다는 걸.”

"······."

“당신에게 내 세상을 주고 싶어. 내가 본 아름다운 풍경들을 당신도 가졌으면 좋겠어.”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참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다.

울면서 키스하는 나를 세수는 가만히 안아 주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진정한 나는 눈물을 닦아 주는 세수 손에 뺨을 비볐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요.”

“그 말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당신은 절대 모를 거야."

세수는 엉망진창일 내 얼굴을 정말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나는 쑥스러움에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달콤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프리지어 궁에 도착하기 무섭게 우리는 정령수에 꽃봉오리가 맺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 * *

정령수의 꽃봉오리는 아직 녹색이었다. 하지만 꽉다물린 위쪽에서 꽃잎이 살짝 엿보였다.

“흰 꽃이네요."

아직 열리지 않은 봉오리인데도 은은한 향기가 흘러 나왔다. 감탄하는 나와 달리 세수는 굳은 얼굴로 꽃을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불태워 버리면······."

"꽃이 없어지면 바로 신계로 끌려갈지도 몰라요."

세수를 다독거린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백탑주를 돌아봤다.

"꽃이 언제쯤 활짝 필까요?"

“개체에 따라 다르지만 제 예상으로는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라 나는 세수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는 좀처럼 진정이 안 되는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요. 씻고 벽난로 앞에 앉아야죠.”

나는 세수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몸이 마치 허깨비처럼 내게 끌려왔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정령수의 꽃에 못 박힌 채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새로운 화제를 꺼내기로 했다.

“참, 세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곧바로 내게 시선을 돌린 그가 뭐든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토끼 인형을 만들어 줄 수 있어요?"

"토끼 인형?"

“세수가 직접 만든 토끼 인형이 필요해요.”

말을 하면서도 혹시나 세수가 눈치챌까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토끼 인형은 세수 동생, 마거릿 공녀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내가 만든 건 아무래도 어설플 텐데."

”에이, 그래서 좋은 거죠."

”······만들어 줄게 .”

"진짜죠? 저 매일 기다릴 거예요?"

세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인형이 왜 필요한 거냐고 물어봤을 텐데. 지금은 정령수의 꽃 때문에 정선이 없는 것 같았다.

왠지 세수를 속이는 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도와 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동생이 악령이 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하면 쓰러질지도 모른다.

일주일 동안이나 악령으로 변한 동생과 형을 걱정하며 속을 태울 세수를 생각하니, 제일 마지막에 알게 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세수가 이 이상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천이랑 솜 같은 재료는 이미 다 준비해 놨어요."

“그렇게 갖고 싶었던 거야?"

"네, 굉장히요.”

인형을 찾아 헤매다가 악령이 될 정도로.

지금도 밤마다 어두운 복도를 헤매고 있을 마거릿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도 모르게 씁쓸한 표정을 지었는지 세수가 내 손을 꼭 쥐어 왔다.

* * *

일주일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나는 그동안 루시아가 모아 온 신들에 대한 자료들을 읽었고, 세수는 그런 내 옆에서 인형을 만들었다.

문제는 인형을 완성하고 난 뒤였다. 세수는 마치 불안증에 걸린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래 서 나는 다른 토끼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토끼 가족들이 늘어나는 동안 세수는 한시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한 몸처럼 꼭 붙어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꽃이 피는 날이 왔다.

나는 노을이 지는 정원에서 천천히 벌어지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기가 수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둥지에서 잠을 자던 날고양이들은 물론, 까미와 흑룡까지 구경을 나왔다. 정령수의 붙박이인 코크 곰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줄을 정리했다.

그레이들은 감격의 눈물을 홀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불렀다. 이국적인 멜로디 속에서 꽃송이가 활짝 벌어졌다.

마치 목련과 장미를 섞어 놓은 것 같은 꽃이었다. 순결한 흰 꽃잎은 거의 야광에 가까운 빛을 냈다.

정령수를 향해 손을 내밀자 절로 툭 떨어진 꽃이 내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이비……."

세스가 걱정스럽게 나를 불렀다. 그의 불안감을 느낀 복실이와 코코가 위로하듯 뺨을 비비적거렸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활짝 웃어 주었다. 아직 세계수와의 계약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아버님을 끌고 와.”

이제 결판을 낼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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