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 * *
“아직도 이블린을 못 찾았단 말이냐?"
왕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보고를 하던 기사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소, 송구하옵니다. 수도 전체를 샅샅이 뒤졌으나 아직 공비 전하의 흔적을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꼬박 이틀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동안 작은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왕은 말 그대로 펄펄 뛰었다. 보다 못한 근위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공작과 함께 성검도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국외로 이동했을지도 모릅니다. 기사들의 잘못이 아니니 부디 노여움을 가라앉히십시오.”
이어서 시녀장인 피오나가 왕을 달랬다.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두 사람에겐 별일이 없을 겁니다. 실종 직전에 이블린이 깨어났다는 증언도 있지 않습니까.”
“세수가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이블린이 깨어난 것을 직접 본 사람이 없지 않느냐. 미련한 몸이 정신도 못 차리는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이블린이 걱정되어 프리지어 궁을 찾았던 왕은 끝내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세수가 왕의 방문까지 거부하고 방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그때도 썩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이블린을 잃은 녀석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어.'
세수라면 이블린을 따라서 죽어 버리고도 남았다.
왕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을 찾아야 한다. 모든 인원을 수색에 동원하고 영주들에게도 협조를 요청해라!"
* * *
“아이고, 나 죽는다."
힘세고 좋은 아침에 나는 몸살로 꿍꿍 앓는 중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온몸의 근육들이 삐걱삐걱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근육통으로 다 죽어 가는 나를 세수가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아, 아야! 팔! 내 팔!"
“미안해······."
깃털처럼 부드러운 손길에도 온몸이 부서지듯이 아팠다. 세수 내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묽게 쑨 미움을 떠먹였다.
하지만 삼킬 기운이 없어서인지 미움이 입가로 주르륵 흘러나왔다. 당황해서 내 입을 닦아 주는 세수를 보자 억울함에 눈물이 터졌다.
"히잉……."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는데, 위장이 작아서 한 입밖에 못 먹는 느낌이었다.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퐁퐁 흘렀다.
“이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흐, 흐윽, 어어엉…….”
“미안해 울지 마 울면 더 아파. 응?"
"흐어엉, 남들은 사흘이든 나흘이든 침실에 처박혀 있던데 왜 나만……!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죄책감에 파스스 부서지던 세수 그제야 내가 억울해서 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겠다.
“내가 너무 서툴러서 싫었던 게 아니야?"
"좋았으니까 지금 억울해서 우는 거죠!"
싫은 건 내 저질 체력이었다. 이 망할 놈의 몸뚱이. 어떻게 나를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지?
“다행이야. 당신에게 안 좋은 기억을 줬을까 봐 걱정 했어.”
세수 정말 안심한 듯 내 이마에 키스했다. 나는 지나치게 청순한 남편의 옷을 꽉 움켜잡았다.
"죽 말고 고기 먹을래요.”
지금 죽 따윌 먹을 때가 아니다. 빨리 회복해서 저 옷고름을 풀어야 했다.
빠득빠득 이를 가는 나를 보고 세수가 작게 웃었다.
“지금은 안 돼. 약 먹고 괜찮아지면."
“치이……."
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그가 떠먹이는 미움을 전투적으로 씹어 삼켰다. 세수 고런 나를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왠지 심장이 간질간질해졌다.
-찌이이엑!
-꾸르르르! 삐이이익!
그때 괴상한 소리가 창밖에서 들렸다. 놀라서 눈을 깜빡이는 나를 세수가 다독거렸다.
“섬에 사는 새들이야 위험하진 않아."
"소리가 좀 이상할 정도로 가까운데요?"
"창가에 앉은 것 같은데, 쫓아낼까?"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이 섬의 손님이잖아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닥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그게 하나둘이 아니었다.
"잠깐만.”
나를 내려놓은 세수가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창문가에 오색빛깔의 새들이 다닥다닥 앉아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우리를 향해 반짝였다.
"우와, 새가 엄청나게 많네요. 그런데 재들은 원래 사람을 안 무서워해요?"
“아니, 나도 이런 건 처음 봐.”
그런데 침대에 앉아 있는 나와 세수를 번갈아 본 새들이 갑자기 서로를 향해 짹짹거리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가 왠지 ‘했네, 했어.’라는 수군거림이 들리는 것 같은데 나를 힐끗거리는 새들의 눈빛도 굉장히 음흉하게 느껴졌다.
“······이비, 우리 다른 방으로 옮길까?"
커튼을 도로 친 세수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두말없이 동의했다.
스토커 같은 새들은 새로 옮긴 방의 창가까지 따라 왔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놈들의 짹짹거림을 무시했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정성 어린 안마를 받자 가출 했던 관절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세수가 급하게 사 온 약도 효과가 좋아서 몸이 많이 편해졌다.
좀 살 만해지자 심심함을 느낀 나는 산책을 나가자고 세수를 졸랐다. 그러자 세수 나를 담요로 꽁꽁 싸매서 품에 안아들었다.
"저 혼자 걸을 수 있는데.”
"무리하다가 또 아프면 안 되니까.”
세수 나를 안고 꽃이 활짝 핀 과수원을 지나 바닷가까지 걸어갔다. 우리는 삐롱거리며 뒤를 따라오는 새들을 못 본 척했다.
그런데 바다에 도착하자 또 다른 불청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몰려든 돌고래들이 우릴 향해 뻑뻑거리며 물을 뿜어 댔다. 지느러미를 펄럭거리며 박수를 빡빡 치는 모습이 왠지 놀리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삑삑거리고 팩팩거려서 도저히 산책을 즐길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도망치듯 저택으로 돌아왔다. 현관 앞에 처음 보는 동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만, 세수가 가차 없이 발로 슥슥 밀어냈다.
슬그머니 저택 안으로 기어 들어온 새들도 세수 손에 붙잡혀서 쫓겨났다. 기분 탓인지 밖에서 짹짹거리는 소리가 더 커진 것 같았다.
“어제까진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난리일까요?"
“당산 이 여기 있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야. 처음에 기웃거리던 놈들을 내버려 둔 게 실수였어.”
”저요?”
"당신은 저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니까.”
그러고 보니 아빠의 힘을 물려받았으니 나도 반쯤은 신수구나. 깨달음을 얻은 나는 머쓱해졌다.
이름 모를 동물들이 현관을 박박 긁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우리를 엿보는 새들은 연신 부리로 창문을 콕콕 쪼아 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수,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갈까요?"
"······."
“그런 표정 짓지 말고요. 우리 둘만의 데이트가 아니게 되었잖아요.”
이미 ‘튀어나와요, 동물의 숲‘으로 장르가 바뀐 지 오래였다. 나는 시무룩해진 세수를 위로했다.
“이제 위험하지도 않으니까 주말마다 둘이서 데이트해요. 되도록 동물들이 없는 곳에서요.”
설마 바퀴벌레와 쥐까지 나를 구경하러 오진 않겠지. 꼭 그랬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조금 아쉬워.”
“그럼 여름에도, 겨울에도 여기 와요. 복실이랑 코코도 함께요.”
미래를 약속하는 내 말에 세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살짝 붉어진 눈가를 감추듯 내게 키스했다.
“사랑해.”
나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나와 함께 있길 바랐던 남자가 내 약속을 믿어 주었다. 이젠 내가 그의 믿음에 보답할 차례였다.
* * *
이블린의 실종 사건은 아주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를 보고 프리지어 궁의 사람들은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세수가 코코와 복실이에게 물어뜯기고, 밖을 헤매던 왕궁 기사들이 대거 귀환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왕은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고생한 기사들을 치하하는 것으로 기쁨을 표했다. 그리고 이블린에게 몸에 좋은 약재를 내리며 가까운 날에 입궁하라는 전언을 보냈다.
이블린은 바로 다음 날 입궁했다. 모든 사건의 원흉인 보석, 욕망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였다.
지배의 왕관에 박힌 욕망은 왕실보고 안에 봉인 당했다. 왕은 아스트리아가 존재하는 한 다시 왕관을 꺼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
사실 욕망에 깃든 힘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리고 라리사 모어의 처형식이 열렸다.
악녀 라라가 처형된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구경을 왔다. 처형식이 열리는 광장은 발을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레이디 메그가 실화라더니, 진짜 라라가 있었잖아.”
“세상에, 그럼 레이디 메그도 정말 살해당한 거네.”
“아서 경도 라라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제발 화형 보다 더 끔찍하게 죽었으면 좋겠군!"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마침내 죄인을 태운 수레가 도착했다. 칙칙한 죄수복을 입은 라리사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처형대 위에 올랐다.
회색의 죄수복과 처형대를 덮은 하얀 천이 대비되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내 집행인이 라리사의 죄목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나자마자 라리사가 광소를 터트렸다.
"거짓말!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야! 하찮은 노예 계집이 공작 부인이 되고 싶어서 나한테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운 거야!"
뜻밖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람들이 동요하는 것을 본 라리사가 더 크게 소리쳤다.
“이블린 엘마이어! 그 여자의 짓이야! 국왕 폐하께서도 그 여자가 노예라는 사실을 인정했단 말이다!"
“그래? 그럼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한번 볼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인데도 이상하게 귀를 사로잡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처형대로 다가오는 여자에게 쏠렸다.
반 묶음을 한 분홍색 머리 위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관이 얹혀 있었다. 금사로 수놓은 하얀 옷자락이 마치 날개처럼 휘날렸다.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무구하고 아름다우며 평온한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신녀님……."
“신녀님이시다."
모든 신들의 사랑을 받는 총아, 천공신의 대천사를 소환한 신녀, 걸어 다니는 기적, 이블린 엘마이어였다.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며 처형대의 계단을 오른 이블린이 라리사 모어에게 다가갔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진 라리사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뭐, 뭐야. 넌 뭐야! 다가오지 마!"
라리사는 이블린에게 공포를 느꼈다. 인간이 아닌 끔찍한 무언가가 자신을 노리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라리사 모어.“
"까아악! 이거 놔!"
이블린의 손에 붙잡힌 라리사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무서웠다. 왜 이렇게 무서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신들의 이름으로 네 죄악을 모두의 앞에 알린다.”
“아악! 안 돼! 싫어!"
이블린은 발버둥치는 라리사의 손을 붙잡아 처형대 위에 눌렀다. 그러자 하얀 천 위에 새까만 글자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라리사가 지금껏 저지른 수많은 죄악들을 낱낱이 밝히는 내용이었다.
순식간에 처형대를 뒤덮은 글자는 광장의 바닥으로 번지며 일그러진 꽃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추악하고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악의 꽃이었다.
”으아아악!”
”으웁! 우웩!"
꽃에서 풍기는 기괴한 느낌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토악질을 했다. 다들 치를 떨며 라리사를 노려보았다. 저 가증스러운 여자에게 속을 뻔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마녀!”
"마녀를 죽여라!"
"당장 화형시켜!"
성난 외침이 광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당장 마녀를 죽이라고 소리 지르던 사람들은 이블린이 손을 들자 즉시 조용해졌다.
"여러분, 이 여자가 받을 벌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