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네?”
나는 갑자기 사이비 교주 같은 소리를 하는 세수를 멍하게 바라봤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라는 시선을 느낀 그가 쓰게 웃었다.
"누군가에게 들었어. 당신의 임무가 끝나서 더는 지상에 머물 수가 없다고.”
”에이,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는지 몰라도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세수를 두고 어딜 가겠어요?"
이제 겨우 흑막을 해치우고 편해지려는 참인데, 이럴 때 나를 신계로 끌고 간다고? 신에게 대가리가 있다면 그런 무리수를 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수 더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비, 전에 세계수와 계약을 했지?"
“네?”
“정령수의 첫 꽃을 받기로 했다고 들었어."
"······아!"
확실히 그런 계약을 하긴 했었다. 정령수를 살려 주는 대신 첫 꽃을 받는 것으로.
두 세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힘을 가진 꽃.
원래 나는 그걸로 세수를 죽은 형과 만나게 해 줄 생각이었다. 세수가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악령이 된 마거릿과 그녀를 막고 있는 아서가 아직 이승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첫 꽃은 두 사람을 해방시키는 데 쓰기로 계획을 바꾼 참이었다.
"당신이 아직 이곳에 있는 건 세계수와의 계약이 남아 있기 때문이야. 계약이 끝나면 지상을 떠냐야 해.”
“네?!”
나는 세수에게 세계수와 계약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눈치 빠른 남자가 내 의도까지 읽어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수 내가 말하지 않은 계약까지 알고 있었다. 누가 그에게 알려 줬는지는 몰라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진짜 신계로 끌려간다고?'
아직 세수 옷고름도 못 풀어 봤는데? 데이트도 몇 번 못 했는데? 충격을 받아 멍해진 내게 세수가 속삭였다.
"신계로 가면 아주 많은 보상을 받게 될 거야. 어쩌면 신들의 골칫거리를 제거해 준 대가로 새로운 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그는 피를 토하듯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떨리는 팔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붙잡고 싶어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해도 좋아.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아니, 뭐가 이기적이야? 절대 못 간다고 발목을 잡고 늘어져도 모자랄 판에. 부루퉁해진 내 이마에 입을 맞춘 세수가 말했다.
“사랑해, 이비.”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세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당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내 전부를 바쳐도 모자랄 정도로. 사랑하고 있어.”
세수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고백을 받는 것은 처음이라 느낌이 달랐다.
마치 심장 깊은 곳에 뜨거운 낙인이 찍힌 듯했다.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이곳에서 당신과 여름을 보고 싶었어. 하지만 내게 허락된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을 것 같아서.”
세수가 계절을 잊고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았다. 한 없이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렇게라도 행복을 훔치려고.”
다시 한번 나를 꼭 껴안은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배고프지? 이제 들어갈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몸을 돌려 저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세수 목을 끌어안았다.
“저기 세수, 있잖아요.”
늘 가슴에 담고 있었던 말인데. 입 밖으로 꺼내면 되는데. 이상하게도 입술이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고 뺨이 폭발할 것처럼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거의 쥐어짜듯이 고백했다.
"저, 저도 세수를 사랑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세수가 우뚝 멈춰 섰다. 괜히 움찔한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지, 진짜로요. 음, 세수를 위해서라면 흑막이랑 한 번 더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뭔가 낭만적인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이것이 나의 한계였다. 터질 것처럼 빨개진 나를 세수가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는 얼른 그에게 쪽 입을 맞췄다. 부족한 고백을 몸으로 때울 생각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인 세수가 얼굴을 붉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피하는 미남의 모습은 상상 이상의 파괴력이 있었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세수 중얼거림에 내 심장이 먼저 저세상으로 갈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난리 지.
나는 호려진 정신을 다잡기 위해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전 신계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개미 눈물만 큼도 없어요. 이민도 자기가 원해야 가는 거죠. 혹시라도 정말 신계로 끌려가게 되면 불 지르고 뛰쳐나올게요.”
세계수도 붙잡지 못한 나를 가둘 수 있을 거라 생각 하다니. 어떤 신인지 아주 꿈도 야무졌다. 그렇다면 화끈한 불 쇼로 대접해 주는 수밖에.
“하지만······."
“세수, 절 믿어요. 저 이블린이라고요."
큰소리를 탕탕 치며 가슴을 두드리자 세수도 흔들리는 듯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정말?“
"응응!”
“내게 돌아와 줄 거야?"
"천공신의 멱살을 털어서라도 돌아올게요.”
나를 꼭 끌어안은 세수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품에 기댄 채 칙칙한 회색에서 환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감정을 느꼈다.
* * *
혹시나 했는데 역시 저택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라곤 우리 둘뿐이었다. 그건 식사 준비도 직접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전생에 라면 끓여 먹은 기억이 전부라 좀 불안했지만, 먹고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각오를 다졌다.
세수 그런 나를 안고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탕 앞에 내려놓았다.
"혼자 씻을 수 있겠어?"
“다, 당연하죠!"
"감기 걸릴지도 모르니까 꼭 탕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나와.”
고개를 끄덕 인 나는 힐끗 세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럼 세수는요?"
“난 다른 곳에서 씻어야지.”
……옹, 그래, 별로 기대 안 했어.
입을 삐죽거리는 내 이마에 살짝 키스한 세수가 빠르게 나가 버렸다. 어휴, 진짜 예뻐서 봐줬다.
세수가 시키는 대로 탕에 들어간 나는 조개처럼 해 감부터 해야 했다. 빨리 씻고 나가고 싶었는데 온몸에 서 모래가 나와서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목욕을 끝냈을 때는 세수가 이미 완성된 음식들을 식탁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나는 쪼르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우와, 진짜 냄새 좋다.”
맑은 홍합 수프에 해물이 듬뿍 들어간 파에야, 토마토 샐러드, 바삭바삭 구워진 빵까지. 근사한 한 상이었다.
“이걸 다 세수가 만들었어요?"
“당신에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배웠어. 그보다 머리는 다 말리고 나와야지.”
새 수건을 가져온 세수가 내 머리를 말려 주었다.
수건이 슥슥 지나가는데도 목이 하나도 흔들리지 않고 시원하기만 했다. 나른한 기분이 된 나는 세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머리 말리고 있을 테니 얼른 먹어. 배고프지 않아?"
“음, 세수랑 같이 먹고 싶은데.”
한껏 어리광을 부리자 세수가 작게 웃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내 머리를 모두 말린 뒤에야 식탁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얼른 홍합 수프부터 한입 떠먹었다. 거의 홍합탕에 가까운 국물에 약간 매콤한 맛까지. 입에 아주 착 달라붙었다.
"마, 맛있어요.”
뭐, 뭐지? 왜 전생의 맛이야?
고향의 맛에 충격을 받은 나를 보고 작게 웃은 세 가 파에야를 듬뿍 담아 주었다.
“다행이군. 많이 먹어.”
"······."
이곳에서 처음 먹는 파에야까지 내 입맛에 딱 맞아서 좀 무서워졌다. 설마 내가 좋아하는 맛을 추리해서 만든 건 아니겠지?
나는 겉바속촉으로 구워진 빵조각을 우물거리며 세수를 훔쳐봤다. 그는 더없이 품위 있게 수프를 떠먹는 중이었다.
“그런데요, 세수."
"응?“
"혹시 제가 시한부라서 여기로 납치한 거예요?"
갑자기 입을 가린 세수가 쿨럭쿨럭 기침을 토해 냈다.
정답이었군. 어쩐지 선비처럼 점잖은 양반이 갑자기 풀액셀을 밟는다 싶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한 세수가 극악무도한 죄를 고백하듯 말했다.
"당산을 독점하고 싶었어. 잠시라도 좋으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랑 단둘이서만 있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를 독점하고 싶었다는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진작 말하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요."
“나한테는 무엇보다 이루기 힘든 소원이었거든."
아 참. 흑막 때문이라도 단둘이 있는 건 힘들었겠구나. 사람들로 둘러싸고 있어도 위험한 상황이었으니까.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나랑 단둘이 있는 거였다니. 너무 사랑스러웠다.
순간 머릿속에서 빨간 불이 깜박였다. 하지만 세상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수를 보니 지금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으으, 조금만 더 참자.’
나는 참을 인을 되새기며 토마토를 씹었다. 그런 내 심정도 모르고 뭔가를 망설이던 세수가 입을 열었다.
“이비.“
“네?”
“나랑 결혼해 줄래?"
나는 토마토를 씹다가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고 움찔한 세수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 이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었어. 잠깐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모습을 감췄다. 그제야 충격에서 회복된 나는 눈을 깜박였다.
‘아, 이거 프러포즈 식탁이었어?'
집으로 초대해서 근사한 요리를 먹이고 디저트와 함께 반지를 내놓는 그거?
술도 안 마셨는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진짜 남편으로 쳐 달라는 건 안 된다고 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잠시 후, 커다란 꽃다발을 든 세수가 ‘완전 낭패'라고 써진 얼굴로 돌아왔다.
“미안해, 좀 더 근사하게 하고 싶었는데. 내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야.”
중간 순서 생략하고 냅다 청혼부터 꺼낸 세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꽃을 내밀었다. 항상 침착하고 어른스럽던 남자가 이렇게 허둥거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꽃다발을 받았다. 파스텔
톤의 연한 핑크색 장미, 이블린 로즈였다. 이내 세수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블린 양, 부디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그가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심플하면서도 화려한 반지였다. 황금색 반지 표면에 은빛의 매듭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내가 커다란 보석이 달린 반지를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안 세수가 항상 끼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 같았다.
”……네.”
담담하게 대답하고 싶었는데 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춘 세수가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반지 위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
나는 그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붉게 물든 뺨을 어루만지자 세수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안해. 중요한 순간인데. 이렇게 실수하지 않았어야했는데.”
“전 세수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결혼하자고 했어도 기쁘게 승낙했을 거예요."
진심이었다. 세수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우리 결혼 할래?’라고 물어봤어도 분명 기뻤을 것이다.
"세수가 그러더군요. 아가씨의 옆에 있으려면 수 많은 가족들을 먹여 살릴 재력과 그들을 지켜 낼 권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공작으로 남을 결심을 했다고.”
세수 나를 위해 많은 것을 바꿨다. 모든 일이 끝나면 내려놓으려고 했던 공작의 자리까지 받아들였다. 그것보다 더 근사한 프러포즈는 없을 것이다.
“사랑해요, 세수."
나는 고개를 숙여 세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살짝 눈을 감는 남자의 뺨을 어루만진 나는 어리광을 부리 듯 속삭였다.
“그런데요. 저 배가 좀 고파요.”
“아, 조금만 기다려 새로 만들어 줄게.”
“아니, 그거 말고."
나는 벌떡 일어나려는 세수 옷을 슬쩍 잡아당겼다.
어리둥절해하던 세수가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침실로 밀어 넣었다. 오늘은 아 주긴 밤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