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 * *
라리사 모어는 프리지어 궁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감히 나를 이런 더러운 곳에 가두다니! 나는 왕자비야! 왕족이라고!"
처음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며 난동을 부렸다. 고문을 당해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꿋꿋이 버렸다.
그런 라리사가 무너진 것은 카스티야의 괴물, 흑막이 이블린에 의해 소멸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마, 말도 안 돼 주인님께선 신이나 다름없는 분이야! 절대자라고! 그깟 계집의 손에 당했을 리가 없어!"
“내 말이 거짓이라면 네 주인이 이미 이곳을 무너뜨렸겠지.“
그림자 기사단장, 모리스가 냉담하게 말했다.
그제야 제 처지를 깨달은 라리사가 휘청거렸다. 철장을 움켜쥐고 가까스로 몸을 지탱한 그녀가 쥐어짜듯 외쳤다.
"조슈아를! 지금 당장 클라멘스 백작을 만나게 해 줘!"
조슈아라면 자신을 여기서 꺼내 줄 거다. 간절하기까지 한 그녀의 외침에 모리스가 픽 웃었다.
“아, 그 평민이 된 백작 말인가?"
“조, 조슈아가 평민이 되었다고?"
라리사는 크게 당황했다. 조슈아가 평민이 되었다면 자신을 여기서 빼내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모리스는 그런 고녀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남자가 재판에서 뭐라고 했는지 아냐? 자신은 사악한 마녀에게 속았을 뿐이라더군. 네가 마녀라는 증거까지 제출해서 그를 처벌하려던 폐하도 물러서실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고작 작위만 박탈당하고 끝났다."
“그럴 리가 없어, 조슈아가 나한테 그럴 리가……."
마녀라니, 조슈아가 나를 마녀로 몰다니.
충격에 부들부들 떨던 라리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을 본 모리스가 그림자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라리사의 몸이 형틀에 강제로 앉혀졌다.
“다시 시작하지 이번엔 모든 것을 자백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다.”
"······."
모든 희망을 잃은 라리사 모어는 순순히 자신이 저지른 죄를 털어놓았다.
어린 마거릿 공녀를 학대하고 살해한 것, 흑막의 도움을 받아 공작 가문의 친딸인 척 위장한 것 외에도 수 많은 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증언을 받아 적던 기서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심문이 끝나자 라리사가 힘없이 물었다.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화형이라도 당하나?"
"네 처분은 마님께서 결정하실 거다."
무뚝뚝한 대답에 순간 라리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상하네. 그 계집이라면 분명 나를 긁기 위해 직접 찾아왔을 텐데, 지금껏 머리끝도 보이지 않다니 말이야.”
"건방지군. 감히 그분의 행동을 네 좁은 판단으로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하! 사실은 그 계집도 죽은 거지? 그렇지? 죽지 않았어도 사경을 헤매고 있는 거군!"
“닥쳐라!"
모리스가 윽박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라리사는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천벌을 받은 거야! 이블린, 감히 노예 따위가 왕족의 자리를 노리다니! 분수도 모르는 천한 것!"
모리스의 손이 라리사의 뺨을 후려쳤다. 하지만 라리사는 악독하게 소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죽어!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지금 당장 죽으라고!"
"저 것의 입을 막아라!"
그림자 기사들이 라리사의 입에 천을 쑤셔 넣었다. 하지만 라리사는 끝까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라리사를 노려보던 모리스가 핵 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선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처분은 이블린의 몫이었다.
“얌전히 죽을 날을 기다려라.”
그는 이블린이 라리사에게 딱 맞는 처분을 준비해 뒀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리스는 곧장 별궁으로 넘어왔다. 주군인 세수에게 보고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이블린의 방에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세수였지만, 그렇다고 보고를 빼먹을 수는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던 모리스는 별궁 입구에서 세 사람을 발견했다.
모리스를 보고 재빨리 정원수 뒤로 숨은 사람은 바로 선대 공작인 케인 엘마이어였다. 그는 주인을 잃은 늙은 고양이처럼 틈만 나면 별궁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 넋을 놓고 있는 이는 이블린의 호위였던 제스터였다. 시체나 다름없는 안색을 보면 숨은 쉬고 있는지 궁금했다.
"흑, 흐어엉, 주인님!"
마지막으로 제스터의 옆에서 질질 짜고 있는 말라크가 보였다. 마지막 전투에서 이블린을 지키지 못했던 그는 충격을 받았는지 며칠째 통곡하고 있었다.
‘백탑주와 차기 성녀는 마님을 대신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말이야.'
이쯤이면 일하기 싫어서 계속 저러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저 꼴을 보기 싫어서라도 마님께서 빨리 깨어나셔 야 할 텐데.'
사실 모리스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 더 간절하게 이블린이 깨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이블린이 눈을 뜨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프리지어 궁의 분위기도 침체되어 갔다. 모두가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면서 가까스로 버티는 중이었다.
모리스는 엘마이어의 심장이 이블린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눈이 있다면 지금껏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조금은 외면하고 있었다.
"주군은 당신을 마음에 두선 게 아닙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죽은 형님의 대신으로 당신을 구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보처럼 굴지 말고 당신 몫을 챙기라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헌신하다간 나중에 후회할 테니까요.”
이블린을 볼 때마다 제가 그녀에게 지깔인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불쑥 밀려드는 수치심에 근처의 기둥을 때릴 뻔한 모리스는 가까스로 행동을 멈췄다.
‘마님께서 깨어나시면 그때의 참견을 무릎 꿇고 사죄드리자. 어쩌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실지도 몰라.’
모리스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순간이었다.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며 이블린의 전담 시녀인 안 나가 뛰쳐나왔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 쳤다.
"큰일 났어요! 기사들 좀 불러 주세요! 지금 당장 성 전체를 수색해야 해요!"
"무슨 일입니까?"
"마님께서 겨우 눈을 뜨셨는데, 곧바로 전하께 납치 당하셨어요!“
"······예?"
뜬금없는 말에 모리스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 * *
나는 까마득한 아래를 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얀 모래가 데굴데굴 움직이고 저 끝에선 새파란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겁먹은 나를 뒤에서 꼭 끌어안은 세수가 속삭였다.
"준비됐어?"
"······으으?“
내가 되묻는 소리를 긍정으로 받아들인 세수가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우리를 태운 썰매가 모래 언덕을 미 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나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비명을 지르며 세수 팔을 쥐어짰다. 슈우웅 하고 미끄러진 썰매가 모래 언덕 아래에서 스르르 정지했다. 나는 멍하게 입을 벌린 채로 눈을 깜박였다.
“이비, 괜찮아?"
세수가 걱정스럽게 나를 불렀다. 나는 그를 핵 돌아보며 물었다.
“우와, 또 타도 돼요?"
눈을 깜빡인 세수가 작게 웃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다시 모래 언덕을 올랐다.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모래를 보자 아빠가 떠올랐지만, 슬픈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세수도 나를 위로해 주고 싶어서 여기 데려온 것일 데니까. 또다시 눈물을 터트려서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그날 그렇게 쓰러져 버려서 다들 걱정하고 있을 텐 데.
제스터도 안심시켜 줘야 하고, 마리아한테 해명도 하고, 집에 박아 둔 라리사 모어도 처리해야 하는데. 꼭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불안해하면서 노는 기분이었다.
‘일단 나는 납치당한 입장이긴 한데.'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납치범을 힐끗 쳐다봤다.
침대에서 꼬물거리던 나를 덜렁 들고 여기까지 도망친 남자는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썰매를 둘러매고 있었다.
평소보다 가벼운 옷차림 때문에 유독 근육이 부각되어 보였다. 나는 티 나지 않게 그의 가슴을 훔쳐보며 언덕 꼭대기까지 올랐다.
저 멀리 납치범의 본거지인 작은 저택이 보였다.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벽과 주황색의 기와지붕, 벽돌과 돌기둥으로 쌓아 올린 아치형의 문과 커다란 창문.
마치 ‘저는 휴양지의 숙소랍니다~'하고 자랑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처음 납치당했을 때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 얼떨떨한 기분으로 잠들어 버렸다.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떠서 세수가 차려 주는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산책을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썰매를 타는 중이었다.
“이비, 무슨 생각해?"
세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뺨을 긁적거렸다.
“음,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서요.”
“나사우 공국의 아르카 섬."
나사우 공국은 아스트리아에서 극도로 남쪽에 있는 나라다. 어쩐지 겨울의 바닷가인데도 따뜻하다 했더니.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이곳으로 종종 가족 여행을 왔었어. 형이 내 썰매를 끌어 줬지."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나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세수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내 과거가 항상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 남들만큼 기쁘고 즐거운 일도 많았지. 그걸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아.”
"······."
“이곳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었어.”
나는 여기서 아무런 근심도 없이 형과 뛰어놀았을 어린 세수를 상상해 보았다. 눈물 나게 귀엽고 조금은 가슴이 아릿했다.
“그럼 이제 우리만의 추억을 만들까요?"
슬그머니 깍지를 끼며 속삭이자 세수 귀가 빨개졌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입을 맞췄다. 몰아치는 바닷바람에도 더없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키스였다.
그 뒤에 우리는 모든 것을 놓고 신나게 놀았다. 나중엔 썰매도 없이 모래 언덕을 데굴데굴 굴러서 내려왔다. 세수 모래 범벅이 된 내 머리를 털어 주며 크게 웃었다.
나는 태양처럼 반짝이는 그를 보다가 문독 깨달았다.
‘이제 세수 정말 자유로워졌구나.’
라리사의 모함에서, 흑막의 위협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남을 두렵게 하던 주크의 기운까지 사라졌으니 앞으로 수 많은 이들이 그를 원할 것이다.
‘안 돼, 세수 내 건데!'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라이벌들에 대한 분노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런데 입을 삐죽이는 나를 본 세수 이상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배고파?”
"······."
할 말을 잃은 나를 대신해 내 배가 꼬르륵 울었다. 아니, 이럴 때 자기 주장하지 말라고!
배를 쓰다듬으며 민망해하는 나를 보고 슬쩍 눈을 흰 세수가 속삭였다.
“이 섬은 굴과 과실주가 유명한데, 가서 먹어 볼까?"
그리고 엉거주춤 앉아 있는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성큼성큼 저택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바다에도 가고 싶었는데.”
"시간은 많아. 앞으로 계속 여기서 지낼 거니까."
"여기서 계속이요? 언제까지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어딘지 씁쓸한 세수 얼굴을 보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고개를 돌린 세수가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감각에 손을 움츠린 나는 문득 코를 간질이는 화사한 향기를 느꼈다. 근처의 나무들이 모두 활짝 핀 꽃송이를 매달고 있었다.
“세수, 겨울인데 꽃이 피었어요.”
“마음에 들어?"
세수가 정말 사랑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여름이 오면 이 나무들에 열매가 맺힐 거야. 당신이 좋아하는 과일나무만 골라서 심었거든. 그때 여기 데려와서 보여 주려고 했는데…….”
아쉬운 표정이 된 그가 내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나는 온몸이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을 이겨 내려 애써야 했다.
‘음, 그런데요?"
보아하니 이곳의 꽃들은 자연적으로 핀 게 아니었다. 마법이나 다른 힘으로 강제로 피게 만든 것이다. 여름을 기다리지 못하는 세수에게선 초조함이 느껴졌다.
‘뭐가 그렇게 불안 한거지?'
라리사도 족치고, 흑막도 해치우고. 이제 모든 게 잘 끝난 것 같은데 의아해하는 내게 세수가 고백했다.
“이비, 당신은 곧 신의 부름을 받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