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 * *
"원래라면 이블린은 이미 신계로 떠나야 했어.”
이블린은 어머니인 사도로부터 사명을 계승받았다.
천공신의 타락한 보석, 욕망을 봉인하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 훌륭하게 그 사명을 이뤄 냈다.
“몇 백 년 동안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지 신계로 가면 신들에게 많은 보상을 받았을 테고, 신이 되는 것을 노릴 수도 있었을 거야."
-음음!
기사의 말에 영원의 뱀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에 대한 자부심으로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대신 인간의 생은 그걸로 끝이다. 두 번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수는 없어. 그런데 우리 아가씨가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해 놨단 말이야?"
배반의 기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뱀과 세수 눈이 동시에 가늘어졌다.
-우리 아가씨?
"누구 마음대로 우리라는 겁니까?"
”에이, 친구 딸이 곧 내 딸이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손을 획획 내저은 기사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블린은 세계수와 직접 계약을 맺었다. 이건 모든 세계를 통틀어서도 아주 드문 일이야.”
세계수는 수많은 세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나무였다. 그런 지고한 신격이 한 인간과 계약하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 라 두 가지였지. 하나는 종료됐지만 다른 하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어."
“그게 뭡니까?"
세수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보다 더 이블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상대에 대한 질투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씩 웃은 기사가 답해 주었다.
“정령수의 꽃이다. 세계수는 정령수의 첫 꽃을 이블린에게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이 그녀를 지상에 묶어 두고 있지.”
“그 약속이 끝나면?"
“그때는 뭐 자동으로 끌려가는 거지 별수 없어.”
기사가 멋쩍게 턱을 긁적였다. 답이 없다는 말에도 세수 절망하지 않고 캐물었다.
“정령수의 첫 꽃에는 어떤 힘이 있습니까?"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는데, 불가능하다. 정령수의 첫 꽃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지상에서의 일에 불과 하니까. 아니면 계의 경계를 아주 살짝 호리게 하는 정도지.”
계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면 신계로 뚫고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민하는 세수 등을 기사가 팡 내리쳤다.
“아서라 그 꽃은 이블린의 거니까. 넌 네 여자의 보물을 가로챌 생각이냐?"
"······."
“그녀는 이미 그 꽃을 어디에 쓸지 결정했다. 그건 네가 손댈 일이 아니야.”
냉정한 말이었지만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세수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 네가 꼭 해야 할 일올 알려 주마.”
배반의 기사가 손가락 하나를 들고 진지하게 말했다.
“꼬셔라. 남은 기간 동안 전력을 다해서 이블린을 유혹하는 거다. 이왕이면 애도 하나 만들어.”
"······."
세수 쓰레기를 보듯 제 조상을 바라봤다.
-이 미친놈아! 죽어!
분노한 뱀이 있는 힘껏 기사의 목을 휘감았다. 단번에 목을 분지르려는 것인지 우득우득 소리가 났다.
“아, 잠깐! 후손아! 도와줘!"
-죽어! 죽어! 죽으라고!
"난 이미 죽었다고!"
이성을 잃은 뱀이 진정되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필요 했다 세수가 워낙 성의 없이 말린 탓도 있었다. 간신히 뱀의 공격에서 풀려난 기사는 제 머리를 쪼는 까마귀를 휘휘 쫓아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이블린에게 지상에 대한 미련을 남기는 거다. 유혹하기, 매달리기, 꼬시기, 육탄돌격 할 수 있는 건 다해 봐라.”
“그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까?"
"없다."
딱 잘라 내뱉는 말에 세수 움찔했다. 뻣뻣이 굳어진 그의 얼굴을 보고 기사가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답답하겠지 . 하지만 선택하는 것은 이블린이다. 네가 아니야.”
"······.“
“너는 그저 매달리고 매달려서, 너덜너덜한 걸레가 될 정도로 붙잡고 늘어져서, 신계에 오른 그녀가 한 번이라도 너를 돌아봐 주기를 빌고 또 비는 수밖에 없어. 그럼 이블린이 알아서 이 난관을 돌파할 거다. 안 되면 말고.”
갑자기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너무 무력해서 숨이 막혔다.
아득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세수 어깨를 기사가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도 네가 지금의 이블린을 데리고 답갈 수 있어야 가능한 거지만.”
”······무슨 뜻입니까?"
"음, 그게 말이야 지금의 이블린에겐 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거든?"
기사는 아주 뻔뻔하게 말했다. 세수 잠시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너도 알다시피 이블린이 워낙 말을 잘하잖아. 그냥 내버려 두면 저 미련한 뱀이 그녀의 설득에 넘어갈 것 같았거든 고래서 일부러 깨어난 뒤에 기억을 되찾게 해놨는데."
이블린의 말솜씨에 영원의 뱀이 당할까 봐 기억을 돌려주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이블린이 깨어나길 거부하고 자신의 안에 틀어박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리도 걱정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있었거든 그때 마침 네가 온 거지."
"······.“
“내가 좋은 정보도 줬잖아. 수고 좀 해라.”
세수 제 조상을 둘도 없는 쓰레기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참, 이 녀석도 돌려보내야지."
배반의 기사는 제 머 리를 콕콕 쪼는 코코를 잡아서 어둠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는 손을 탁탁 털며 웃었다.
“괜찮지? 어차피 돌아갈 길은 필요 없잖아. 이블린을 설득하지 못하면 돌아갈 이유도 없고."
모든 것을 얻거나 모든 것을 잃거나.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극단적인 사람이었다.
“자, 그럼 후손아. 우린 너만 믿는다!"
-이거 놔 나는 아직 내 딸을 지켜봐야……!
기사는 싫다고 발버둥 치는 뱀을 질질 끌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세수 한숨을 쉬었다. 절벽으로 떠밀린 기분이었지만,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녀를 돌려받지 못하면, 이대로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결국 자신은 이렇게나 이기점이다. 그녀의 애정에 길들여져서. 어린애처럼 막무가내로 매달리고, 당신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고, 그러니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이나 하는.
눈을 꾹 감은 채로 자신에 대한 경멸을 이기려고 애쓰던 세수 문득 낑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부모 품에서 강제로 떨어진 어린 짐승이 낑낑거리며 우는 것 같은 소리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홀린 듯이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발견했다.
"밀대 걸레?"
“아니, 자세히 봐.”
"손잡이 없는 빗자루?"
”······강아지.“
이블린을 처음 만났을 때, 무심코 떠올렸던 조그맣고 귀여운 형상.
제 본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 같아서 부끄러웠던 그 날의 강아지가 꼬물꼬물 돌아다니고 있었다.
넋을 잃고 강아지를 바라보던 세수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분명 환상은 아니었다.
‘신수인 거겠지?'
영원의 뱀의 힘을 이어받은 신수가 자신의 망상 때문에 이런 모습으로 변한 것 같아서 죄책감이 느껴졌다.
‘아주 잠깐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 시킨 세수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비······."
* * *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세수 얼굴이었다.
그 위로 겹쳐지는 다정한 누군가의 모습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눈물을 뚝뚝 홀리는 나를 보고 세수가 당황했다.
“이비?"
"흑, 흐윽, 세수······!"
나는 세수를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 억울해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에, 지금의 나라면 아빠를 설득할 수 있었을 거라는 확신에, 너무나 안타깝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 고렇게 보내선 안 됐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미안해, 이비. 정말 미안."
"흑······."
“내가 당선을 지키지 못했어.”
세수가 그런 나를 꼭 안고 달래듯이 이마에 키스했다. 위로가 담긴 다정한 입맞춤에 나는 조금씩 진정되었다.
”······키스해도 돼요?"
오늘은 좀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면 기절하든가 내 속삭임에 세수가 조금 웃었다.
깃털 같은 입맞춤이 아주 가볍게 내 입술에 내려앉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과 기분 좋은 황홀감이 나를 감쌌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꽃잎에 폭 파묻힌 것 같은 감각에 오싹 소름이 돋는 순간, 세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응?“
뭐지? 기절을 안 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수를 쳐다보자 그도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키스하려고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피해 버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도리질을 쳤다.
“아, 아니! 싫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서······.”
3년 상은 못 지내도 지금 이렇게 좋아라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내 거부에 움찔한 세수가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
으앙,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내가 쓰레기야.
나는 죄책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세수가 그런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세수, 진짜 변명이 아니라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세수 품에 코알라처럼 안긴 채로 보석 안에 서 아빠를 만났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세수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 주면서 내게 레몬을 넣은 물을 먹이거나 따뜻한 수프를 떠먹였다.
나는 세수가 주는 것을 꼴깍꼴깍 삼키며 가끔 훌쩍거렸다.
“그분은 당신을 정말 사랑하셨던 거야.”
“하지만 전 고맙다는 말도 못 했어요."
“그런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숨을 쉬는 게 당연하듯, 당신을 사랑하는 게 당연해서."
세수가 부드럽게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빠가 그랬을 거라고 말하는 건데, 어쩐지 세수가 그렇다고 고백하는 것 같아서 귀가 화끈거렸다.
“하지만 나라면 당신의 행복을 빌며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했겠지. 그것 때문에 이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
“이런 내가 혐오스럽지 않아?”
세수 목소리엔 자괴감이 담겨 있었다. 마치 내 손을 놓지 않는 것이 크나큰 죄라도 된다는 것처럼.
나는 조금 전까지의 결심도 잊고 그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세수가 깜짝 놀란 듯이 나를 바라봤다.
계속 키스하자 취기가 확 올라왔다. 나는 알딸딸한 기분으로 세수 뺨을 콕 찔렀다. 전보다 수척해진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어, 세수······ 음, 그냥 생각을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
“그냥 세수 하고 싶은 거 다 해! 싫으면 내가 싫다고 말해 줄 테니까!"
“이비, 당신 지금 취했어.”
세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낮았다. 그게 또 섹시한 맛이 있어서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나 안취했는데?"
“나한테 뭐든 다 하라고 허락하면 후회할 텐데.”
"음, 나 후회 안 할 것 같은데?"
“정말로?"
세수가 내 귀에 쪽쪽 입 맞췄다. 그게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린 나는 작게 웃었다.
"응, 날 끌고 가서 가둬 놓지만 않으면 상관없는데?"
"······."
세수 손끝이 살짝 내 입술과 뺨을 건드렸다. 그에게서 안타까움과 갈등, 초조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정말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요. 내가 허락해 줄 게."
갑자기 끼긱 하는 소리가 났다. 세수 손아래 눌린 침대가 죽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그럼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나랑 함께 있을래?"
마치 빨간 모자를 유혹하는 복대처럼 세수가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목을 꼭 껴안았다.
"응, 그럴래.”
“내가 내일 죽는다고 해도 같이 있어 줄 거야?"
"응, 계속 같이 있을래.“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세수가 나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내게 매달렸다.
그리고 나는 세수에게 홀라당 납치당했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