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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29화 (229/240)

229화

* * *

프리지어 궁은 수도의 축제 분위기와 달리 침목에 잠겨 있었다.

특히 별궁을 오가는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별궁의 주인인 이블린 엘마이어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커다란 마차에 실려 온 이블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꺼운 천에 감싸인 재였다.

그 모습에 놀란 시녀장이 당장 그녀를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수는 이블린을 안은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그는 시녀들의 간청에도, 시녀장의 애원에도 문을 열지 않았다. 주치의인 켄트 박사도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방문 앞에서 버티던 시녀장은 결국 탈진해서 쓰러졌다.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새하얀 마차가 별궁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것은 바로 신성 왕국의 성녀, 마르타였다.

“엘마이어 공작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나를 사도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세요."

* * *

"세수.”

성녀는 저를 맞이하는 세수를 보고 잠시 숨을 멈췄다. 죽은 사람처럼 생기를 잃은 얼굴이 안타까웠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하.”

감정 없는 목소리에 성녀는 재빨리 마음을 추슬렀다. 지금은 그녀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아니었다.

“사도님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고 했지요? 살펴볼 수 있을까요?”

잠시 말이 없던 세수가 성녀를 침대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분홍색 머 리를 흐트러뜨린 이블린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세상에······."

이블린을 본 성녀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래도 귀엽고 예쁜 용모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시선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전보다 성숙해진 얼굴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곱게 감은 눈과 살짝 벌어진 발간 입술은 더없이 사랑스러웠고, 하얗고 투명한 피부는 사람을 홀리는 빛을 부렸다.

아름답다 못해 성스러운, 누가 봐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몸을 감싸고 있던 빛이 사라지면서 키가 반 뼘 정도 자랐습니다."

"······."

그 외엔 달라진 점을 못 느낀 것 같은 세수에게 성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짧은 헛기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사도께선 좀 더 완벽한 몸으로 거듭나신 것 같군요.”

사도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접한 성녀도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보통 사명을 마친 사도는 빛으로 사라질 뿐 이렇게 변화하지 않거늘.

‘갑자기 성장하다니. 이건 신수의 특징인데.’

생각에 잠겼던 성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수 시선을 알아차렸다.

"성하,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세수가 도움을 청한 이유도 이블린이 깨어나지 않아서인 듯했다. 성녀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입에 담았다.

“사실 사명을 마친 사도가 지상에 머무는 건 신의 뜻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아마 의식을 찾으시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포기하라는 말까지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세수가 말했다.

“성하, 전 그녀를 지상에 붙잡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 무슨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서늘한 얼음 같았던 푸른 눈이 지금은 불꽃처럼 활 활 타오르고 있었다. 성녀는 더럭 겁이 났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세수?"

세수가 한 손을 들자 어디선가 포르르 날아온 까마귀가 그의 손목에 내려앉았다. 성녀를 본 까마귀가 반갑다는 듯이 깍 하고 울었다.

인간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 그림자, 그래서 저승으로 향한 이블린의 뒤를 쫓아갔던 녀석이었다.

“제가 그녀의 의식으로 들어가 깨울 생각입니다. 성하께선 그동안 그녀를 지켜 주십시오. 신들의 손길이 닿지 않도록.”

“지금 사도님의 의식으로 들어가겠다는 건가요? 너무 위험합니다. 현실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정신계 마법 중에도 그런 종류가 있지만 대부분은 타인의 의식에 휩쓸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고 들었다.

"성하께선 저를 도와주실지 , 거부하실지 선택하시면 됩니다."

푸른눈에 담긴 것은 애원이 아닌 냉정함이었다.

성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신의 뜻에 반하는 행위이기에 거절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사도님을 지키겠습니다.”

세수 기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대신 당신도 무사히 돌아와야 합니다."

걱정이 가득한 그녀를 보고 세수가 웃었다.

"성하, 저는 이대로 죽지 않습니다. 아니, 축을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그녀를 데려오겠습니다.”

* * *

수백 년 동안 신을 섬겨 온 대지신의 교단에선 정반대의 지식도 연구되었다.

신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이단의 기호들이 성녀의 피로 바닥에 그려졌다. 세수 그 한가운데 이블린을 눕혔다.

"최대한 버텨 봤자 반나절일 겁니다. 그사이에 사도님을 찾아서 데려와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담담히 인사한 세수 이블린의 옆에 누워 그녀와 이미를 맞댔다.

-깍!

코코의 울음소리와 함께 세수 녹아들 듯 이블린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었다.

-까악! 카아악!

다시 눈을 뜬 세수는 날카로운 울음을 들었다. 마치 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다급한경고음이었다.

"코코!“

세수는 보이지 않는 코코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뭔가가 그를 덮쳐 왔다.

“컥!"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육중한 것에 부딪친 세수는 바닥을 굴렀다. 빠르게 몸을 일으키자마자 굵직한 뭔가가 그를 휘감으며 조여들기 시작했다.

-대지선의 개가 여기까지 오다니.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두 개의 불꽃이 보였다. 거대한 뱀의 눈이었다.

어둠처럼 검은 몸과 불꽃처럼 붉은 눈을 가진 뱀.

세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영원의 뱀.”

브란에게서 이블린의 과거를 들었을 때, 세수는 그녀가 영원의 뱀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하지만 브란은 그에게 또 다른 단서를 주었다.

"누나는 자신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원래는 셋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걸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했죠. 만약 누나가 잊었다면 꼭 다시 알려 달라고 했어요. 그걸 잊어버린 누나는, 더 이상 누나가 아닐 거라면서."

셋이 있었으나 둘이 남았다. 그리고 남은 이는 사라진 이를 잊지 않고 기리려 했다.

남은 이가 영원의 뱀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뭔가를 잊지도 않고, 제가 잡아먹은 인간을 기리지도 않을 테니까.

‘사라진 것은 영원의 뱀이다. 이비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뱀을 기리려고 한 거야.'

그랬기에 영원의 뱀이 여기서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하지 못했다.

“당신이 왜 여기에?”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여기엔 왜 기어들어 왔느냐? 내 아이를 대지신에게 끌고 가려고?

잔뜩 독이 오른 뱀이 사납게 쉬쉬거렸다.

"저는 제 아내를 데려가려고 온 겁니다. 그녀가 신계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웃기지 마라! 대지신의 노예 주제에!

뱀의 몸이 조여들면서 우두둑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세수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말을 이었다.

“전…… 더 이상 신을 따르지 않고 한 여인에게 속한 몸이 되겠다고 맹세를······.”

-아니, 네가 있는 한 이블린은 대지신에게서 벗어 날 수 없다. 그 애는 누구에게도 구속되어선 안 돼. 자유롭게 살아야해!

뱀의 눈에는 집착에 가까운 맹목의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세수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런 식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없앨 겁니까?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 하는 삶이 당신이 말하는 자유입니까?"

그는 이미 그런 삶을 살아봐서 알고 있었다. 조금도 행복하지 않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닥쳐! 너는 아무것도 몰라!

“큭!"

더욱 거세게 온몸을 조여드는 압력에 숨이 막혔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로 의식이 흐려졌다.

-사라져! 너는 이블린에게 해만 되는 존재야!

하지만 뱀의 말을 듣는 순간, 눈앞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세수는 괴력을 발휘해 제 몸을 휘감은 뱀의 몸통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거센 저항에 당황한 뱀이 그의 머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세수 주먹이 뱀의 주둥이를 강타했다.

휘청거리던 뱀이 나동그라진 사이 자신을 구속한 몸통을 풀어낸 세수가 중얼거렸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어.”

이블린은 그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들을 주었다. 관심을 애정을, 변하지 않는 마음을.

세상에게, 부모에게서조차 버림받은 그를 위로하고 대신 복수해 주려고 애썼다. 몇 번이나 다치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면서까지.

‘너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지?'

스스로에게 물을 때마다 세수는 괴로워졌다.

그녀와 달리 그가 줄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 초라해서. 어디에나 있는 것들뿐이라서. 조금도 특별하지 않아서. 그것이 참 괴롭고 많이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나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고 해 줬어.”

이블린은 그에게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를 좋아한다고 해 주었다.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해가 되더라도. 자신의 초라함에 아파도. 절대로 맞잡은 손을 놓을 수는 없다.

“그걸 방해하는 놈은 누구든 죽인다.”

새파란 눈동자가 살의를 내뿜었다.

이블린의 의식 세계에서 싸움을 길게 이어 갈 순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뱀을 죽여야 했다.

-이 건방진!

매섭게 달려드는 뱀의 턱 아래에 힘을 꽂아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자. 거기까지.”

-까악?

불쑥 튀어나온 손이 세수 눈앞에서 코코를 흔들었다. 반사적으로 정지한 세수와 달리 계속 달려들던 뱀은 퍽 하고 머리를 얻어맞았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뱀의 머리를 후려친 이는 빙글빙글 웃는 은발의 기사였다. 세수는 낯설면서 묘하게 친숙한 그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난 뱀이 기사에게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뭐? 내가 막지 않았으면 넌 그대로 목이 꿰뚫렸을 거다. 영혼도 못 남기고 끽 소멸됐을 거라고."

-네가 멋대로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겼어!

"추하게 굴지 말고 졌으면 순순히 사위로 인정해.”

-사, 사위라니! 내 딸은 절대 못줘!

뱀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 억울한지 커다란 눈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내 딸은 아직 어리다고. 알에서 막 깨어난 거나 마찬가진데, 아직 백 살도 안 됐는데……!

“아, 시끄러워"

듣기 싫다는 듯이 귀를 후벼 판 기사가 갑자기 세수 어깨에 척 팔을 걸쳤다.

"후손아. 네가 이해해라. 저건 예전부터 속이 좁고 시끄러운 놈이었거든. 나무 한 그루 찔렀다고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누구십니까?"

세수 반응은 싸늘했다. 당황한 기사의 팔을 탁 쳐낸 그는 기사가 움켜쥐고 있는 코코를 턱짓했다.

“우선 놓아주십시오."

”……어, 그래.”

기사의 손에서 포르르 날아오른 코코가 세수 어깨에 앉았다. 구겨진 것을 다듬는 코코에게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세수는 냉정한 눈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래서. 왜 여기에 있는지, 무슨 속셈인지, 언제 사라질 것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서릿발 같은 기세에 세계수를 모시는 위대한 신수와 왕국의 악몽이었던 배반의 기사는 동시에 찔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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