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나는 멍하게 영원의 뱀을 바라봤다.
줬다가 뺏는 것도 아니고, 아빠가 생기자마자 사라진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저랑 같이 여기서 나가요.”
“나는 괜찮아. 여기서 나가는 것보다 난 네가 내 힘을 물려받아 강해졌으면 좋겠구나."
“전 힘 같은 거 필요 없는데요?"
“앞으로는 아주 많이 필요해질 거야.”
뱀은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달래듯 나를 다독였다. 나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럼 저도 안 나가고 여기 있을래요. 나가 봤자 별로 좋은 일도 없을 것 같고.”
사람들은 나를 미워하고 학대했다. 꿈도 희망도 없는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와 함께 있고 싶었다.
"네가 막 태어났을 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단다. 네가 찾아오면 여기서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다고.”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
의아해하는 나를 보고 뱀이 살짝 미소 지었다.
“하지만 너는 여기 오기 전에 소중한 존재를 많이 만들었더구나. 그들이 지금 밖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아닌데, 나한테 소중한 존재 같은 거 없는데.
“그들을 잃지 않으려면 넌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해. 나는 네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구나.”
뱀은 이미 내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사라지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너무 서운했다. 시무룩해진 나를 본 그가 안타까워했다.
“내 반쪽, 내 그림자, 내 아이야. 너는 내 기적이란다.”
영원의 뱀은 세계수를 위해 태어나고 세계수를 지키다 죽는 존재였다. 그의 자식 역시 똑같은 운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사도와 신수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세계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너는 나처럼 세계수를 지키는 일에 얽매일 필요도, 네 엄마처럼 신들의 뜻에 따를 필요도 없어. 어디로든 자유롭게 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세계수의 노비 집안에서 태어난 자유민. 그게 나였다. 영원의 뱀은 나를 눈부신 보석처럼 바라봤다.
"네가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네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내 유일한 소망이야."
뱀은 여기서 나가도 세계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어쩌면 나를 붙잡기 위한 족쇄로 이용당할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식으로 자석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금까지 너는 보석에게 붙잡힌 영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많은 힘을 썼지. 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부분은 괜찮지만, 내가 이어붙인 부분은 많이 상했을 거야."
영원의 뱀은 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었다. 예전에 자신의 반쪽을 내게 준 것처럼.
“이 모든 게 내 욕심이라는 건 알고 있단다. 그래도 네가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구나.”
"······."
사실은 계속 떼를 쓰고 싶었다. 나는 그런 거 잘 모른다고, 그냥 나랑 함께 있자고.
하지만 더없이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보는 그를 이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결국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 봐도 되겠니?"
잠시 머뭇거리던 뱀이 물었다. 자식을 안아 보고 싶은 마음이 아주 큰 욕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조금 놀란 것처럼 움찔한 뱀이 이내 나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차가우면서도 묘하게 온기가 있었다. 그리고 어딘지 그리운 냄새가 났다.
“아빠."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답하듯 뱀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아빠라는 걸 밝혀도 될지 오랫동안 고민했단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뱀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끝까지 말하지 않고 떠날까 했지만······ 네가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너 스스로를 필요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게 둘 순 없었어. 너는 내게 정말 소중한 아이니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서였다.
"이블린.”
영원의 뱀이 더없이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
"네 이름은 내가 지었단다 너는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특별한 존재니까. 생명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
그의 몸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황금빛이 내게로 스며들었다. 아주 따뜻하고 보드라운 기운이었다.
“아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존재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자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뱀이 조심스럽게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말렴. 나는 너를 만나서 정말 행복했단다."
이제 그의 몸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손을 내밀었다.
“가지 마세요.”
"난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거야.”
영원의 뱀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리고 황금색의 빛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인사처럼 다정 한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사랑한다, 내 아가.
황금빛 무리가 커다란 날개처럼 내 몸을 감쌌다.
영원의 뱀이 사라지면서 보석이 만든 세상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따뜻한 황금빛에 감싸인 나는 아무런 상처도 없이 무너지는 세계를 무사히 빠져 나왔다.
* * *
나는 세계의 벽을 넘는 동안 짧은 꿈을 꾸었다.
은발에 황금색 눈을 가진 기사가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거대한검은 뱀과 함께였다.
둘은 꽤 오랜만에 만났는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은 의견이 어긋나서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모르는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굉장히 서운했다.
‘거짓말쟁이. 언제나 내 옆에 있을 거라고 했으면서.'
둘 쫓아가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낑낑거리며 안간힘을 쓰는데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돌아보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이비······.
누구지?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남자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은발이 아빠를 생각나게 했다 눈처럼 서늘하고 고결한 분위기도 어딘지 비슷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아주 새파란 색이었고 아빠처럼 다정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보다 뭔가 절박하고 힘들 어 보였다.
-내게 돌아와 줘.
남자는 간절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멀뚱멀뚱 보고만 있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마치 눈사람이 녹는 것 같았다.
"으음······."
나는 멀리 가고 있는 둘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빠를 따라가고 싶은데. 이렇게 울고 있는 사람을 두고 갈 수도 없고. 조금만 같이 있어 줄까?
나는 남자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대번에 눈물을 그친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내가 오다가 멈출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엣헴.”
남자의 바로 앞에 털썩 엎드린 나는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 남자가 나를 달랑 안아들었다.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은 별로였지만, 머리를 조심조심 쓰다듬는 손은 썩 나쁘지 않았다.
흠흠, 좋구나. 더 쓰다듬어라, 노예야.
남자의 손이 머리에 이어서 내 목덜미를 살살 긁어 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꼬리를 슬렁슬렁 흔들었다.
내 복슬복슬한 꼬리가 신기했는지 반히 쳐다보던 남자가 슬그머니 만져 보려고 했다.
어학 어딜 감히!
나는 앞발로 무엄한 손을 팍 때렸다. 움찔한 남자가 사과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의 가슴에 기댔다.
남자의 품은 굉장히 따뜻했다. 온몸을 맡기고 있자 잠이 솔솔 왔다. 저도 모르게 하품을 한 나는 남자의 품에 슥슥 뺨을 비볐다.
그러자 나를 꼭 끌어안은 남자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나를 뻣길까봐 걱정하는 것처럼 빠른 걸음이었다.
어, 안되는데 나 아빠에게 가야하는데…….
아빠가 점점 멀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꿈속에서 다시 스르르 잠들어 버렸다.
* * *
대천사 티폰의 강림으로 수도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왕은 천공신이 아스트리아를 축복했음을 공표하며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나눠 주었다.
"신녀님 만세!"
“아스트리아여, 영원하라!"
시민들은 대천사를 불러온 신녀를 칭송하며 축배를 들었다. 앞으로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 같다는 예감으로 모두가 들떠 있었다.
평화 회담 역시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신성 왕국, 로엔 공국, 나바르 왕국은 아스트리아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협력하기로 결의했다. 사실상 연합왕국의 재림이었다.
물론 공왕은 끝까지 툴툴댔다.
“대천사까지 불러와서 찍어 누르니 어쩔 수 없지.”
로엔 공국은 배반의 기사가 천공신 신앙을 탄압한 것에 반발하며 분리된 나라였다.
그런데 천공신의 대천사인 티폰이 강림해 아스트리아를 축복했다 아스트리아와 대립할 명분이 사라져 버린것이다.
공왕은 그리핀을 빼앗긴 것을 항의하려 했지만,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는 바람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덤으로 이블린에게 생명의 빛까지 졌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 두고 보자!"
사실 공왕도 대천사를 불러내서 궁 하나를 초토화시키는 이블린과 진심으로 맞서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대로 물러나기 민망해서 지껄이는 소리였다.
"저는 이블린이 깨어난 후에 돌아가겠습니다."
성녀는 회담이 끝난 뒤에도 아스트리아에 남겠다고 결정했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블린은 신성 왕국에서 대지신을 강림시키는 업적을 세웠다. 그것만으로 성인으로 추앙받아 마땅한데 , 이번에는 천공신의 대천사를 불러냈다.
여기에 과거 이블린이 해낸 일들까지 알려졌다.
왕이 새로 하틀랜드 공작이 된 이블린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그녀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러자 이블린이 나바르 왕국을 구하고 성화의 인정을 받은 일과 북부에서 정령수를 부활시킨 일까지 재조명되었다.
대지신에 천공신에 사막신에 세계수까지.
이쯤이면 신들의 사랑을 받는 총아이자, 걸어 다니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 신녀님은 단순히 천공신의 총애만 받는 게 아니라고. 모든 신들께 사랑을 받는단 말이야.”
“그런 분께서 아스트리아에 나타나시다니, 이게 우리나라가 잘될 거라는 징조가 아니면 뭔가."
사람들은 이블린의 존재에 감사해하며 그녀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살아 있는 신의 축복인 이블린은 사실 신성 왕국에서 놓쳐 버린 고기였다.
황금 혈통 랑가비스의 딸. 신성 왕국의 공주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아스트리아로 넘어가 버린것이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신성 왕국 사람들은 단체로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다.
"으흑흑······."
특히 이블린이 신성 왕국에 왔을 때 외부인이라며 막말을 퍼부었던 마리노 사제는 밤마다 베개를 눈물로 적셨다.
‘분명 고국인 신성 왕국이 걱정되어 오셨을 텐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심한 말을 퍼부었으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하셨으면 어떡하지?'
그가 죄책감으로 목을 매달지 않은 것은, 이블린의 동생인 브랜든 랑가비스 덕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신성 왕국으로 돌아갈게요. 내가 누나 몫까지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저, 정말이십니까?"
“응, 율법학자가 되려고. 시대에 안 맞는 부분은 다 뜯어고칠 거야.”
이블린이 정성껏 키워 낸 망나니의 싹, 브란이 눈을 반짝였다.
마리노는 제가 어떤 재앙을 불러들였는지도 모르고 감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하십시오. 저희는 브랜든 님을 따르겠습니다."
이블린이 신성 왕국의 공주라면 브란은 왕자였다. 혈통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신성 왕국으로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제가 있을 곳을 야무지게 마련한 브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독 제 손을 내려다본 그의 안색이 흐려졌다.
"누나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죠?"
“예, 그래도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천사의 강림이라는 대업을 치르셨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노는 이블린이 대천시를 소환한 후유증으로 쓰러진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브란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블린이 뭔가 주워 올 것이 있다고 사자궁으로 떠난 이후 갑자기 그녀와 연결된 끈이 모두 끊어졌으니까.
브란은 이블린이 깨어나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눈을 뜨는 것이 과연 내가 알고 있는 누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