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옛날 어떤 사람이 속이 훤히 보이는 개미집을 주웠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개미가 귀여워서 먹이도 주고 설탕도 부려 주며 개미집을 지켜봤다.
개미들은 사람을 칭송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서로를 물고 뜯고 싸웠다.
사람은 왜 같은 개미들끼리 싸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로 싸우지 말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개미들의 싸움은 계속됐다.
사람의 눈에는 다 똑같은 개미였지만 사실 흙개미, 도독개미, 불개미, 목수개미 등 종류가 다 달랐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개미를 모아 두니 싸움이 그칠 리가 없었다.
빡친 사람은 제일 예쁘고 튼튼한 왕개미를 골라 12강 풀세팅을 한 무기를 쥐여 주었다.
왕개미는 12강 풀세팅 무기로 다른 개미들을 썰고 다녔고 곧 개미집은 하나로 통일되었다. 그렇게 전쟁이 멈추자 사람은 만족했다.
“그 후로 왕개미들은 대대로 왕을 해 먹었단다."
“우와, 역시 장비빨이 최고라는 교훈적인 이야기네요.”
"역시 그렇지?"
어느 날 대대로 왕을 해 먹던 왕개미 집안에 변종 왕개미가 태어났다. 변종 왕개미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의 뜻에 따라 강제로 지키는 평화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정한 평화는 자유로운 의지로 이뤄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 배가 쳐 불렀는데요? 사람도 개미들이 하도 싸우니까 최종 병기를 쥐여 준 거잖아요?"
핵폭탄의 전쟁 억제력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하지만 변종 왕개미는 반항기였단다. 녀석에겐 자유 의지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던 모양이야.”
결국 변종 왕개미는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겠다고 결심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흔적을 모두 지우겠다고 선포 한 녀석은 개미집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과 관련된 것을 모조리 때려 부쉈단다."
사람을 칭송하는 개미들은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12강 풀세팅 무기를 휘두르는 테러범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사람의 흔적을 지우고 지웠지만 변종 왕개미는 만족하지 못했다.
"변종 왕개미는 개미집을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숨기자고 생각했지. 그래서 개미집을 묶어 둔 나무를 푹푹 찔렀어. 그 나무에 살던 지렁이는……."
“지렁이는 좀 그러니까 뱀이라고 하죠.”
“음, 그래. 그 나무에 살던 뱀은 화가 나서 변종 왕개미랑 싸웠어.”
12강 풀세팅 무기를 휘두르는 변종 왕개미와 잘 자다가 끌려 나온 뱀의 화려한 싸움은 아주 어이없이 끝났다.
변종 왕개미를 조질 궁리만 하던 사람이 냅다 전기 충격기를 꽂은 것이다.
당연히 변종 왕개미는 즉사했고, 운 없는 뱀은 옆에 있다가 덩달아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12강 풀세팅 무기도 쨍그랑 깨어졌다.
무기가 깨어지는 순간, 그곳엔 박혀 있던 보석이 눈을 떴다. 원래 신의 힘을 저장하는 용도였던 보석은 강한 힘에 반응했다. 그래서 변종 왕개미와 뱀의 반쪽을 우물우물 냠냠 먹어 치웠다.
“아니, 설마 그게…….”
“그래, 그게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지.”
자다가 끌려 나와 치고받고 싸우다가 두 동강 난 다음 보석에게 잡아먹힌 영원의 뱀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으으음, 정말 뭐라고 위로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날 위로해 주다니 착하구나."
환하게 옷은 뱀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미소에서 호구미를 느낀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 얼굴로 그렇게 웃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어쨌든 천공신의 과잉 대웅이 문제였던 거네요?"
“굳이 따지자면 그렇지.”
아무리 힘이 남아돌아도 그렇지, 거기서 전기 충격기를 꽂을 게 뭐란 말인가. 천벌을 내리는 감성이라고 생각해도 너무 구렸다.
어쨌든 변종 왕개미는 즉사했고, 뱀은 두 개로 쪼개졌다.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땐 누구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보석 안에 갇힌 뱀의 반쪽과 왕개미의 영혼은 치고 받고 싸운다고 정신이 없었다. 사람 또한 왕개미에게 삐져서 지상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사이 문제는 조금씩 몸집을 불렸다.
"처음 이곳에는 나와 왕개미밖에 없었단다.”
서로를 욕하며 한가롭게 싸우던 둘은 어느 날 뽕 하고 나타난 새로운 영혼을 발견했다. 보석에게 잡아먹힌 세 번째 희생자였다.
그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단순히 신의 힘을 저장하는 용도였던 보석이 신수와 인간의 영혼을 삼키면서 변질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갈수록 희생자들이 늘어났지."
당시는 연합 왕국의 멸망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무더기로 잡아먹혀도 어디에서 실종되었거니 했다.
"보다 못한 나는 지상에 남아 있던 내 반쪽을 통해 이 사실을 알렸단다.”
영원의 뱀은 세계수에게 천공신이 사고를 쳤다고 일러바쳤다. 안 그래도 자식인 정령수를 잃고 눈이 돌아가 있던 세계수는 곧장 천공신의 멱살을 잡았다.
그렇게 둘이 치고받고 싸우다 전쟁이 터질 뻔했지만, 천공신이 문제를 책임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 합의를 보는 데만 거의 몇 백 년이 걸렸지."
”으음, 알 만하네요. 정말 어른들의 사정이군요."
그래, 자존심 싸움중요하지. 지상에서 사람들이 잡아먹히든 말든 말이야.
이쯤 되니 신을 세계에서 몰아내려고 애썼던 변종 왕개미의 마음도 살짝 이해가 되려고 했다.
“그동안 보석에겐 더 많은 힘을 가지겠다는 의지가 생겼단다."
시간이 갈수록 보석의 의지는 점점 커 잣I 상대를 유혹할 정도가 되었다. 먹이 사냥을 시작한 것이다.
"보석은 더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옮겨 갔어. 그리고 자신이 잡아먹은 인간의 욕망을 베껴서 흉내 내기 시작했지.”
이야기는 마침내 레베카 왕녀에게로 흘러갔다.
레베카 왕녀의 몸을 빼앗은 보석은 활개를 치고 다녔다. 녀석에게 인간의 왕국은 잘 차려진 뷔페였다. 그제야 천공신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느꼈다.
“그때가 되어서요?"
“그래, 그때가 되어서. 겨우."
영원의 뱀이 싸늘하게 말했다. 호구인 줄 알았는데 천공신에게는 악감정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이건답이 없는 문제였어. 상대는 뭐든 닿는 족족 먹어 버리는 괴물이었거든."
다가가기만 해도 호로록 빨려 버리니 블랙홀이 따로 없었다. 천공신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싸맸다.
전기 충격기를 또 써 봐? 하지만 보석엔 산의 힘을 저장하는 기능이 있었다. 즉, 안 통했다. 다른 신들의 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어떤 신이 말한 거지. 죽일 수도 없고 먹어 치울 수도 없는 존재를 만들어서 이번 일의 처리를 맡기면 어떨까?"
갑자기 등골이 싸해졌다. 신들이 내린 결론이 왠지 나랑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신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보석이 먹어 치울 수 없는 영혼을 데려와 사도로 삼았단다. 그리고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게 했지."
‘음, 혹시 그게 저예요?"
“조금만 더 들어 보렴. 이제 곧 결론이니까.”
한참 후에야 세계수에게서 사도가 결정되었음을 전해들은 영원의 뱀은 뭔가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그래서 반쪽만 남은 몸을 움직여 사도를 찾아다녔다.
“신들은 이미 힘을 준 사도에는 관심이 없었단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어."
알아서 자라서 알아서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사도들은 그랬으니까.
결국, 영원의 뱀은 아무 단서도 없이 사도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 세상을 뒤져서 겨우 찾아 낸 사도는 죽어 가고 있었다.
“신들이 그녀에게 너무 많은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지. 사도는 자신의 능력을 조절할 수가 없었어.”
아기 때부터 괴물로 낙인찍힌 사도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지하실에 갇힌 채 학대당했다.
끔찍한 환경에서 죽음과 부활을 반복한 그녀의 영혼은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도저히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너무 늦었던 거야.”
영원의 뱀은 울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구나.”
아니, 사실을 말한 건데. 무책임한 신들이 문제지, 이 불쌍한 뱀은 아무 잘못도 없었다.
오히려 제 몸이 동강 난 주제에 남을 걱정하며 돌아다닌 것만으로도 노벨인류애상을 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사도는 나와 같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니 내게도 책임이 있었단다."
"······."
이 호구를 어떻게 하면 좋지?
내가 한탄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뱀은 조금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나를 주기로 했어."
“예?"
“내 몸의 반쪽으로 그녀의 깨어진 영혼을 이어 붙여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왔지. 그러니까 음, 다시 말하자면, 내가 네 아빠라는 소리인데…….”
뱀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그는 눈이 동그래진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많이 놀랐지? 내가 인간이라면 좀 더 부드럽게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어, 음.“
"호, 혹시 네가 인간의 아이가 아니라고 해서 충격을 받았니? 내가 뱀이긴 하지만 너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허옇게 질린 얼굴을I 보면 나보다 뱀이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말리기 위해 손을 내저었다.
“사실 전 전생의 기억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죽은 기억이요.”
새로 태어난 게 아니라 내가 원조라고 주장하자 뱀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때의 네 이름이 기억나니?"
"······어?"
“가족들의 이름은? 생각나는 이름이 하나라도 있어?"
영원의 뱀은 아주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네 엄마의 기억을 물려받은 거야."
“어어?"
내가 이곳에서 환생한 게 아니라 인간이랑 뱀 사이에서 태어난 뉴 타입이라고?
“그냥 뱀으로 땜질한 영혼을 가진 인간 아닌가요?"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뱀은 무척 다정하게 말했지만 자식에게 거부당한 부모처럼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혹시 영원의 뱀은 새끼를 낳는 게 아니라 토막으로 수가 늘어나나요?"
”·······내가 그렇게 된 건 아주 무서운 사고였단다. 보통은 자신의 일부를 조금 떼어 내서 아이를 만들지."
흠, 그런 거면 날 자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 신수니까 신화적인 개념으로 번식을 하는 것 같고.
무엇보다 풀죽은 뱀의 모습을 보니 그냥 아빠 시켜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깨진 영혼을 수리하는 데 뱀의 절반이 들어갔으면 함유량으로 따져도 50%이다. 그럼 아빠 맞지, 뭐.
“다행이네요."
"응?”
“전 절 낳아 준 부모가 싫었거든요. 진짜 부모가 따로 있었다니까 좀 괜찮아지는 기분이에요.”
내가 흔쾌히 아빠로 인정해 주자 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조심조심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소중하고 귀한 것을 만지듯이.
“아빠라면서 해 준 것이 없어선 미안하구나. 하지만 계속 너를 지켜보고 있었단다.”
“정말요?"
“그럼, 네가 내 아이라는 게 기쁘고 자랑스러웠어.”
“앞으로 더 자랑스럽게 해 드릴게요."
내 말을 들은 뱀의 눈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에 있든 너를 지켜보겠다고 약속할게."
"네? 이제 저랑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
“미안하구나. 네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선 내가 없어 져야 해. 내 존재가 변질된 보석의 기반이기 때문이야.”
신의 힘을 저장하는 보석과 산수인 뱀의 힘이 맞물려 지금의 ‘욕망'이 되었다고, 영원의 뱀은 속삭이듯 말했다.
“내 아가, 나는 네게 모든 것을 물려줄 이날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