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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26화 (226/240)

226화

“이쪽으로 와라 각대가 이곳의 손님으로 인정받으려면 우선 폐하께 인사를 올려야 한다."

나는 애늙은이의 안내를 받아 어스름 왕국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알현실. 드높은 옥좌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 태자. 밖이 꽤 소란스럽구나."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오만하고 고고한 분위기까지. 과연 왕이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애늙은이 소년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폐하, 왕국의 바깥에서 손님이 방문했습니다."

"손님?"

여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내가 멀뚱멀뚱 서 있자 옥좌 아래 서 있던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엄하다! 폐하의 앞에 엎드려 예를 올리지는 못할망정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다니!"

정말 무엄한 게 누구인지 내 주먹으로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나서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토리오 후작, 오늘따라 그대의 충언이 시끄럽군.”

"소, 송구하옵니다.”

한마디로 남자를 닥치게 만든 여자가 나를 가늠하듯 훑어봤다. 권태로운 황금색 눈동자에 약간의 흥미가 어렸다.

“짐은 이 왕국의 주인인 레베카다. 이방인이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안개 속을 헤매듯 흐릿한 머릿속에 조각난 기억들이 떠올랐다.

"레베카 님을 위해!"

문어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대머리 아저씨가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레베카 왕녀에 대해 알고 있느냐?“

높게 틀어 올린 백금발 위에 왕관을 쓴 여자가 내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상황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이름을 잃은 이방인이 여, 무슨 일로 이 왕국에 왔는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당신이 혹시, 아스트리아의 레베카왕녀인가요?"

떨리 는 내 물음에 레베카가 피식 웃었다.

“한때 그런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었지.”

오래전 아스트리아엔 레베카라는 이름의 왕녀가 있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그녀는 머지않아 왕위에 오를 것을 기대했으나, 왕은 레베카가 아닌 어린 아들에 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결국 어린 동생에게 후계자 자리를 내주고 태자의 상징인 ‘지배의 왕관'마저 뺏기게 된 왕녀는 왕관에 박혀 있던 보석 ‘욕망'을 빼내 자신의 손등에 박아 넣는다.

그런데 보석 ‘욕망'에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노예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지배의 힘을 손에 얻은 레베카 왕녀는 7년 전쟁을 일으키고, 아들과 손자의 몸까지 빼앗아 가며 아스트리아를 정복하려고 애썼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정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니 뭔가가 이상했다.

‘이 사람이 7년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먹은 악마라고?'

너무나도 우아하고 당당한 분위기. 수많은 음모를 꾸몄던 흑막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맞지 않아.'

어스름의 왕국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자아를 잃고 그림자로 변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몇 십 년은 더 되었을 것이다.

레베카 왕녀가 이곳에서 몇 십 년 동안 왕국을 다스렸다면 밖에서 음모를 꾸미는 흑막이 될 수 없었다.

‘그럼 다른 사람이 흑막이었단 소리야?'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일단 레베카를 떠보기로 했다.

“하틀랜드 공작 가문과 태후와 짐은 모두 죄인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조각난 기억 속에서 겨우 건져 올린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말이 레베카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 옥좌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그대는 아스트리아에서 온 것인가?"

“네?”

"왕국은 지금 무사한가?"

나는 그녀의 다그침에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을 탈탈 털어야 했다. 아스트리아엔 별문제가 없으며 평화 회담을 개최할 정도로 잘나가고 있다는 말에 레베카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군. 태자나 후작의 말로는 정확한 상황을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던 차였다.”

아무래도 레베카는 욕망에게 삼켜진 사람들로부터 계속 정보를 모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스트리아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요?"

“누가 그러더니. 짐이 아스트린아를 싫어한다고.”

레베카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물론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천공신께 맹세코 내 조국인 아스트리아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녀가 흑막일지도 모른다고 마지막까지 의심 하면서 물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오게 된 거죠?"

”……당연히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을 때지. 욕망을 손등에 박아 넣는 순간 짐은 여기에 떨어졌고, 이곳에 내 왕국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레베카는 별 이상한 질문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녀 의 대답을 듣고 나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일으킨 게 당신이 아니었군요.”

7년 전쟁을 일으킨 것은 레베카가 아니라 그녀를 삼킨 욕망이었다. 진짜 레베카 왕녀는 욕망을 손등에 박아 넣는 순간 죽어 버린것이다.

그리고 욕망은 오랫동안 레베카 왕녀의 껍질을 쓰고 그녀의 이름으로 수많은 악행을 질렀다.

“아니, 지상에 남아 있었다면 짐온 분명 전쟁을 일으켜 아스트리아를 정복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과 같은 방식은 아니었겠지.”

산기와 다른 사람의 손을 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정복했으리라고. 레베카는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짐은 실로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태자의 증표를 빼앗기기 싫다는 치기로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지.”

"······."

"죄를 지온 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는 법. 이방인이여, 그대는 짐을 심판하러 온 것인가?"

처음에는 모든 죄악이 이 사람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베카와 마주하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죄를 심판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저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원래 가야 할 곳으로 보내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가.”

레베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 짐에서 벗어난 사람이 지올 법한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백성들도 구원받을 수 있겠구나."

“당신이 그들을 구원한 거죠.”

그녀가 밖에서 무슨 짓을 했든 이곳에서 사람들을 지켰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레베카가 없었다면 이곳의 그림자들은 모두 욕망에게 소화되어 영혼조차 사라졌을 테니까.

내 말에 레베카가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짐은 왕이다. 짐이 있는 곳은 곧 왕국이며, 왕국에 사는 이들은 모두 나의 백성이다. 그들을 다스리는 것은 나의 의무이자 권리이니 . 결코 구원이 될 수 없다.”

아, 당연한 일이라는 말을 아주 빙빙 돌려서 하는 재주가 있으시구나.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폐하, 제가 다음 세상으로 모시겠습니다."

다음 세상으로 가기 전에 대지신과 면담하고 천공신과 멱살잡이를 해야 할 것 같지만, 어쨌든 그녀가 가야 할 곳으로 보내 줄 생각이었다.

"잠깐 기다려라.”

레베카는 아주 천천히 자신이 쌓아 올린 성을, 그리고 왕국을 둘러봤다. 그녀의 시선은 이내 공손히 서 있는 소년을 향했다.

"태자, 그대가 지상으로 돌아갈 때가 온 것 같구나."

“폐하, 제가 끝까지 모시게 해 주십시오.”

애늙은이 소년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고개를 저었다.

"카스티야의 왕이여, 백성들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는 짐의 후계자이자 모든 것을 물려받은 자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해져라.”

”······예, 폐하.”

고개를 떨어뜨린 소년이 입술을 깨물었다.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는 소년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베카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구원자여, 그대에게 보답하고 싶지만 앞으로 그럴 기회가 없을 것 같구나. 대신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마.“

"네?"

“그대의 가슴에 꽂혀 있는 장미꽃. 끝까지 소중하게 지키는 것이 좋겠구나."

나는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레베카의 말처럼 내 가슴에 장미꽃 한 송이가 붙어 있었다.

“아니, 이게 뭐여?"

"건드리면 안 된다."

무심코 장미를 떼어 내려는 내 손을 붙잡은 레베카가 살짝 웃었다.

“그것은 그대의 기억이다. 이곳에선 기억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가장 소중한 부분만 떼어 내어 보관한 것 같구나. 아주 영리하다."

레베카의 칭찬에 뭔가가 떠오르려다 가라앉았다. 전에도 누군가가 나를 영리하다고 칭찬해 준 것 같은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소중하게 지킬게요."

내가 장미를 조심스럽게 보듬자 레베카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를 보내다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그녀를 살짝 건드렸다. 은빛의 섬광이 레베카의 몸을 물들였다.

“내 동생의 말을 전해, 주어 고맙다. 그 아이가 평생 나를 원망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서 기쁘구나."

속삭이는 것 같은 말을 남긴 레베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은빛 조각이 그녀의 뒤로 망토처럼 휘날렸다.

“나의 백성들이여, 이제 때가 되었다. 모두 짐의 뒤를 따르라!"

"예, 폐하! 언제까지나 따르겠습니다!"

비토리오 후작이라고 불렸던 자가 기쁜 얼굴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다른 그림자들 역시 은빛이 되어 휘날렸다. 수많은 별들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레베카가 사라지면서 높은 성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드높은 이상과 강력한 자아로 수십 년 동안 왕국을 지탱했던 왕의 최후였다.

“하틀랜드 공작 가문과 태후와 짐온 모두 죄인이다."

그것은 레베카의 동생인 어린 왕자가 남긴 말이었다. 죄책감이 가득한 말속에 자신에 대한 원망이 없다는 것을 느낀 레베카는 기뻐했다.

분명 그들은 끝까지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욕망이 자신의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어린 왕자를 집어삼키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레베카의 안에 동생에 대한 미움이 없어 왕자를 해칠 수가 없었겠지.

“그 마음이 꼭 전해졌으면 좋겠네.”

나는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독 아직 내 옆에 서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어라? 넌 왜 안 갔어?"

내 물음에 얼굴을 붉힌 소년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아직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해서.”

"응, 됐으니까 너도 빨리 가."

나는 소년을 툭툭 건드렸다. 녀석은 환한 은빛으로 물들면서도 내 손을 꼭 움켜잡았다.

“그대는 아스트리아에서 왔다고 했지? 현실로 돌아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걸?"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소년은 정말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반드시 그대를 찾겠다. 찾아서 꼭 보답할 것이다.”

“그래그래, 알겠다. 빨리 가렴.”

깨어나면 기억도 못 할 거면서. 내가 속으로 코웃음을 치는 것도 모르고 소년은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연발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공간에는 황금색 나무 한 그루만 남아 있었다. 나는 나무에 기대앉아 있는 은발의 남자를 발견했다.

‘저 사람이 최종 보스인가?'

보스만 해치우면 이번 일도 끝나는 거겠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남자가 눈을 떴다. 은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머리카락, 투명한 호박과 같은 눈동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눈처럼 차갑고 고결한 분위기에 선뜻 말을 걸기 어려웠다. 그런데 우물쭈물하는 나를 바라본 남자가 아주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네가 왔구나.”

“예? 절 아세요?"

“그럼. 나의 반쪽이자 나의 그림자여 나는 여기서 계속 너를 기다렸단다.”

나는 넋을 잃고 부드럽게 웃는 남자를 바라봤다.

분명 기억에 없는 얼굴인데, 내가 잘 알고 있는 누군가를 닮은 것 같아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신은 원래 이 모습이 아니었죠?”

남자에게선 뭔가 비인간적인 느낌이 났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닐 것 같았다. 남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모습은 나의 오랜 친우였던 기사의 것이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 자아를 잃어버리고 말았지. 그래서 나는 그를 삼키고 영원히 함께하기로 했단다."

황금색 눈동자에 거대한 뱀의 모습이 비쳤다. 나는 그제야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영원의 뱀?"

“정확하게는 영원의 뱀의 반쪽이지. 그리고 절반은 거기에 있고.”

남자의 손끝이 나를 가리 켰다. 나는 뜻밖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예전엔 뱀이었나요?"

“아니.”

영원의 뱀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를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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