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그, 그런…….”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제스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절망하는 그를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여기서 나가면 기억도 잘 안 날 거예요.”
이곳은 욕망의 배 속. 한없이 무의식에 가까운 세계였다. 여길 빠져나가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듯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제가 한 말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죽기 직전에 눈 딱 감고 해 본 말이잖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제스터는 상냥한 사람이다.
친구인 세수를 상처 입힐까 봐 내게 고백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이 죽었다는 착각 앞에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을 만큼.
“······아가씨는 굉장히 냉정하네요.”
“제스터 씨가 지냐치게 열정적인 거죠.”
나는 다른 이를 바라보는 사람을 좋아할 수 없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지켜 주지도 못한다. 애초에 내가 그렇게 생겨 먹지를 않았다.
“너무 차가운 반응이라 차라리 좀 위안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요?"
“아뇨, 솔직히 말하면 죽고 싶습니다. 누굴 좋아한 것도, 이렇게 실연당한 것도 처음이라서.”
테이블에 머리를 쿵 처박은 제스터가 꿍꿍 앓았다. 내가 상처 줘 놓고 위로하기도 뭐해서 그냥 멀거니 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 후에야 진정한 제스터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눈가가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전 이제 뭘 해야 합니까?"
“제 손을 잡으세요. 그럼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제스터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선뜻 손을 잡지 않고 머뭇거리던 그가 말했다.
“아마 전 앞으로도 당신을 좋아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마음을 고백하진 않을 겁니다. 그냥 저 혼자서 간직하겠습니다.”
"······."
“그것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당신의 마음이니 알 아서 하라고 말하기엔 제스터가 너무 괴로워 보였으니까.
“제스터 씨, 힘들어서 포기하는 건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놓아 버려요.”
나는 조심스럽게 제스터의 손을 잡았다. 조금 씁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제스터가 웃었다.
“이렇게 상냥하면서 잔인하신데, 제가 어떻게 당신을 잊겠습니까."
그의 몸이 점차 흐려졌다. 은빛으로 반짝이던 제스터의 형체는 이내 한가로운 풍경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나는 손에 남아 있던 가루를 털어 제스터를 완전히 저편으로 돌려보냈다. 그 와중에 나를 이루고 있던 일부가 조금 떨어져 나갔다.
나는 부스러진 손끝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아직 돌려보내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욕망에게 삼켜진 사람들은 대부분 영혼만 남아 있었다. 몸이 살아 있는 채로 구조된 제스터는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정말 저희가 죽었단 말입니까?"
“네.”
"저희 가족 모두요?"
나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둘러봤다.
손자들을 끌어안은 노인, 아내를 소중하게 감싼 남편,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아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그들은 나를 만나기 전까지 서로에게 의지해 어둠속을 걷고 있었다.
"저를 만나기 전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건 느끼고 있었죠? 아무리 걸어도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밤이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
모두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뒤 늦게 구하러 온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소리 없이 눈물만 떨어뜨렸다.
“그럼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됩니까?"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될 거예요. 다음 생으로 넘어 가기 전에 보상을 받는 것도 잊지 마세요. 죽은 것도 억울한데 챙길 건 다 챙겨야죠.”
욕망을 이 세상에 풀어 놓고 처리하지도 않은 천공신이 이들을 책임져야 했다. 내가 꼭 보상을 챙기라고 당부하자 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우리 가족이 다시 한번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동의하듯 다른 가족들이 남자를 꼭 껴안았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좋아요, 그럼 이제 출발!"
나는 그들을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은빛으로 물든 사람들의 형체가 이내 모래처럼 흘러내려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기다리다 내 품에서 흘러나온 황금색 먼지를 툭툭 털었다.
물론 이렇게 온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떠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를 내고 내게 덤비거나, 떠나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주먹을 써야 했다.
어느 쪽이든 피곤해지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왕이면 좋게 끝내는 편이 마음 편했다. 나는 잠시 쉬어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제자리에 앉았다.
아이고, 힘들다. 누가 좀 날 도와주면 좋을 텐데.
"무리하지 말라고 해 봤자 듣지 않을 데니까, 적어도 함께 있게 해 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주 낮고 부드러운 남자의 음성이었다.
‘누구의 목소리였지?'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민하던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낑낑거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물은 설득도 통하지 않고 바로 도망치기 때문에 발견하는 즉시 돌려보내야 했다.
“이 녀석들! 거기 서라!"
후다닥 도망치는 놈들을 쫓아가던 나는 목소리에 대해선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 * *
루시아는 멍하게 이블린을 바라봤다.
세수 품에 끌어안긴 이블린의 몸은 황금색과 검은 색의 빛에 감싸여 있었다. 마치 두 마리의 뱀에 휘감긴 것 같았다.
"주, 주인님?"
루시아만큼이나 넋이 나간 말라크가 중얼거렸다. 그는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괴물 쥐가 나타나고, 죽은 줄 알았던 흑막이 처음 보는 기사의 몸에 달라붙기까지. 정신없는 와중에도 얼핏 잘됐다고 생각했다.
단 한 병의 회생으로 모두가 살 수 있을 태니까.
게다가 희생되는 사람은 말라크 자신도, 그가 아끼는 누군가도 아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결말이었다.
“어, 어째서?"
하지만 이블린이 왜 희생해 버린단 말인가. 이 자리의 누구보다 고귀하면서, 누구보다 살아남을 자격이 있으면서! 차라리 그녀가 말라크 자신을 희생시켰다면 이렇게 충격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주인님! 어서 일어나 봐요, 주인님!"
“아, 진짜 시끄러워!"
그의 옆구리에 루시아의 주먹이 꽂혔다. 루시아는 꺼억하고 쓰러지는 그를 노려보며 이를 득득 갈았다.
"디들 미칠 것 같으니까 좀 닥쳐! 닥치라고!"
루시아의 기세에 짓눌린 말라크가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서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누군 안 울고 싶은 줄 알아?'
입술을 질끈 깨문 루시아가 세수를 바라봤다.
표정이 사라져 버린 남자는 하염없이 이블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그녀를 놓쳐 버릴 것처럼.
훌쩍거리는 말라크와 달리 그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저 애원하듯 이블린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미동도 없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위태로워 보였다.
루시아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아내를 잃은 세수가 미쳐 버리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우리 힘으로는 절대 못 막아. 아니, 저 남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성검의 주인으로서의 위력. 뛰어난 회복 능력과 방어력까지. 세수 엘마이어가 이성을 놓아 버린다면 흑막 못지않은 재앙이 될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루시아를 다독였다. 의식을 잃은 제스터를 돌보던 백탑주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그분께서는 꼭 돌아오십니다. 믿으십시오.”
순간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 성직자였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뢰감이 가독한목소리였다.
“그래요, 믿어야지요."
루시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당장은 이블린을 믿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제발 무사히 돌아오세요.'
루시아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부디 이블린에게 전해지기를 빌면서.
* * *
" 응?”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저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이상하다. 분명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이 뭐였지?'
잠시 고만하던 나는 뺨을 긁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뭐, 일하는데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깔끔하게 포기한 나는 거대한 성문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욕망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거대한 성.
누가 봐도 최종 보스의 집이었다.
왠지 들어가기 싫어서 미루고 미뤘지만, 이제 성 바깥에는 현실로 돌려보낼 존재가 없었다.
‘으으, 진짜 들어가기 싫다.'
발을 질질 끌며 다가간 나는 성문을 쿵쿵 두드렸다.
안에서 어떤 괴물이 튀어나와도 놀라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새카만 형체가 나타났다. 원래 사람이었을 그것은 자아를 잃고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욕망에게 잡아먹힌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형체가 남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귓귪궸궭궼?
"······."
그림자가 무슨 말을 했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주먹으로 그림자를 쳐서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냈다. 성불하십시오.
-쮀카똬 바풰똬 쫘풱붸!
-느졔궤!
한 놈을 그렇게 처리하고 나자 갈등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우르르 몰려드는 그림자들을 하나둘 지워 나가면서 성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니, 얘들은 또 왜 이렇게 많아!"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림자의 수가 많아졌다. 무슨 개미 떼도 아니고 우글우글 몰려나오는 것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결국 나는 전략적인 후퇴를 거듭했다. 그림자 때리고 도망치고 또 그림자를 때리기를 반복하자 숨이 턱에 닿았다. 하지만 발을 멈추면 그 즉시 밀려드는 그림 자에 압사당할 것 같았다.
“이쪽이다!"
그때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림자와 다르게 형체를 가진 소년이었다.
검은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가 왠지 익숙한 게 느껴졌던 나는 저항 없이 소년에게 끌려갔다. 미로 같은 복도를 이리저리 꺾으며 달리던 소년이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걸음을 멈췄다.
“겨우 따돌렸군. 그림자들은 맹목적이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애늙은이 말투였다.
“어스름의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방인이여. 나는 이곳의 태자인 후안이다.”
"왕국이 라고?"
여긴 욕망에게 집어삼켜진 희생자들이 있는 곳인데?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고 애늙은이가 웃었다.
"여기 처음 온 자들은 다들 그런 반응을 보이더군. 하지만 이곳은 분명 왕국이다. 내 할머니이신 레베카 폐하께서 정복하신 땅이지.”
나는 남의 배 속에 왕국을 지어 버리는 레베카의 패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어. 자아를 잃고 사라졌어야 할 사람들까지 그림자로 남아 있어서."
원래 욕망에게 삼켜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녹아서 찌꺼기로 변하게 된다. 완전히 소화되어 내가 돌려보낼 영혼조차 남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라는 사람이 이곳을 자산의 왕국으로 선포하고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연히 사라져야 할 사람들까지 그림자로 존재하게 되었다. 자아가 사라져도 왕국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남아 있으니까.
"놀랍네. 여긴 정말 왕국이구나.“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라면, 이곳은 분명히 왕국이었다. 내 감탄에 애늙은이 소년이 자랑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