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제물이 너무 부실했나?'
천공신을 불렀는데 다른 애가 튀어나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흑막을 제물로 바친 게 문제인 듯했다.
사람을 하도 많이 처먹어서 모아 둔 에너지도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개털이었던 모양이다.
‘천공신 불러온다고 큰소리를 쳐 놨는데…….'
귀빈석 쪽을 힐끔 본 나는 일단 마음을 고쳐먹었다. 천공신이든 눈알이든 흑막만 잘 잡으면 그만 아닐까?
“가랏, 눈알! 너만 믿는다!"
내 간절한 외침을 들은 것일까. 커다란 날개를 펄럭 거리던 눈알이 갑자기 화려한 빛을 뿜어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뜬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 이게 뭐야?!"
어느새 나는 구름 위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까마득한 저 아래에서 주먹만 한 경기장과 개미처럼 꼬물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극히 총애받는 자여, 기뻐하라. 천상의 군주께서 그대의 기도에 응답하셨도다.
남자인지 여자인 점 알 수 없는, 기계음에 가까운 음성이 내게 속삭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나는 깜짝 놀랐다 거대한 눈동자가 내 바로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 눈알과 눈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던 나는 서둘러 고개를 원상 복구시켰다.
-이제 저 아래를 보라. 그대의 적이 있도다.
엄숙한목소리로 외친 눈알이 다시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러자 카메라의 렌즈가 당겨지듯 지상의 광경이 확대되어서 보였다. 사자궁이었다.
위에서 본 사자궁은 마치 떡볶이를 쏟은 것처럼 새 빨겠다. 붉고 끈적끈적한 뭔가와 내가 아는 사람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소리까지 들려왔다.
"테오! 이쪽부터 잘라!"
붉은색의 끈끈이를 도끼로 퍽퍽 잘라 내는 곰탱이와 끈끈이에 붙잡힌 사람들을 구출하는 핀이 보였다.
"부상자는 이쪽으로 오세요! 백탑주! 도와주세요!"
“빛이여! 삿된 것을 몰아내라!"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는 루시아와 다가오는 끈끈이를 밀어내는 백탑주의 모습도 얼핏 스쳤다.
"물러서지 마라! 왕궁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낯익은 근위 기시들이 메뚜기처럼 팔짝거리며 방패로 끈끈이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위대한분을 위하여!"
"은인을 위하여!"
필사적으로 활을 쏘아 대는 그레이들,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북부의 전시들, 묵묵히 창을 휘두르는 흑사자 기사단도 보였다.
-캬아악!
까미와 흑룡이도 그들 사이에 섞여서 싸우는 중이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끈끈이를 땅에 광광 내리치는 까미는 꽤 지친 것 같았다. 그런 까미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선 코크가 겹겹의 얼음 방패를 세웠다.
“세 번째 가지가 위험합니다! 회살 지원해 주십시오!"
과묵이는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그 옆에선 말라크가 필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나는 각들의 옆을 획 스쳐 지나가며 끈끈이를 공격하는 세수를 발견했다.
"세수!”
세수는 우유의 등에 탄 채 날고양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끈끈이를 잘라 내고 밀리는 아군을 도왔지만 그 뿐이었다.
마치 온천처럼 꾸역꾸역 솟구치는 끈끈이를 상대하느라 모두 지쳐 가는 것이 보였다. 더 이상 가만히 있 올수가 없었던 나는 거대 눈알을 향해 소리쳤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천공신께서도 저놈이 계속 설치는 거 싫어하실걸?"
저 끈끈이가 흑막과 관계가 있다는 것에 오늘 아침에 먹은 비스킷을 걸 수도 있다. 그러자 눈을 끔뻑 감았다 뜬 눈알이 대답했다.
-이 자리에 지고의 힘이 임하였으니, 이제 그대의 사명을 다하라.
순간 내 손에서 빠드득 정전기 같은 것이 튀었다. 놀라서 손을 오므리자 새파란 번개가 손바닥 안에서 파직파직 솟구쳤다. 마치 피카츄가 된 것 같았다.
이건 나보고 막타를 치라는 친절인가!
갑자기 의욕이 솟구친 나는 눈을 부릅뜨고 아래를 쏘아봤다. 정신을 집중시키자 사자궁이 더 크게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 손을 내밀어 사자궁을 겨누고 다른 손으로 손목을 떠받쳤다. 검지 끝에 모인 번개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 이걸로는 부족하다. 사자궁을 보호하는 고대 마법을 뚫어야하니까.
나는 이를 악물고 온몸의 힘을 손끝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동안의 원한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어린 세수를 괴롭히고, 몇 번이고 목숨을 노리고, 라리사 모어라는 빅엿을 던져 주고, 전쟁을 터트려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죄 없는 사람들을 와구와구 먹어 치우기까지 했지.
무엇보다 내가 지금 이날 이때까지 세수 옷고름도 못 푼 것은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
-선택받은 자여, 좀 진정하라!
당황한 눈알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내 몸 전체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너무 많은 힘을 끌어 모은 탓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 이거 어떡하지?"
-이대로는 위험하다! 서둘러 힘을 방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대로 쏘면 아군까지 휩쓸릴 지경이었다.
그때 아래에 변화가 생겼다. 나를 발견한 세수가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을 확인해라!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헉! 저게 뭐야!"
“우와악! 도망쳐!"
내 쪽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달아나는 사람들의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보이는 걸까? 거대한 눈알 앞에 떠 있는 풀컨디션 피카츄?
-이제 때가되었다.
날고양이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움켜쥐고 후다닥 도망쳤다. 혼자 남은 끈끈이가 모든 것을 뭉개 버릴 듯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흑마아아악!”
나는 포도알처럼 부풀어 오른 끈끈이의 중심에 검지를 정확하게 겨눴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팽팽히 당겨진 힘을 탁 놓아 버리자 반동으로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머 지 않아 쿠용 하고 땅이 흔들렸다.
펄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알의 날개가 나를 폭 감싸서 밀려드는 바람을 막아 주었다.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깃털을 살짝 치우자 하늘 높이 솟구친 불기둥이 보였다. 사자궁 전체가 지옥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헉······?!“
이 시대에도 화재 보험이 있던가?
잠시 후, 불기둥이 사라진 자리에는 합선되어 폭발한 전자레인지처럼 처참한 잔해만 남았다.
흑막은 예의상이라도 죽은 것 같았지만, 대대로 태자가 머물던 화려한 궁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너무 지나치게 힘을 줬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아이 ,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조금만 힘을 밸걸. 이놈의 성질 머리!
-선택받은 자여,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같이 불을 지른 눈알은 속 편하게 돌아가겠다는 소리를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녀석의 깃털을 붙잡았다.
“이 , 이대로 가게?"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고대가 사명을 다할 때, 우리는 천상에서 영원히 함께하게 되리라.
아니,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야? 나는 녀석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더 단단히 깃털을 부여잡았다.
"돌아가기 전에 아래쪽에 장미꽃이라도 좀 뿌려 주면 안 돼? 아니면 비둘기라도 좋으니까.”
천공신을 부르자 튀어나온 눈알이 사자궁만 박살내고 돌아가다니, 완전히 재앙의 징조였다. 나는 눈알에게 구차하게 매달려 애원했다.
”뭐라도 좀 부려 줘! 어? 이왕이면 좀 반짝이는 걸로!“
-······.
잠시 침묵하던 눈알이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자 내가 붙잡고 있던 깃털이 복 하고 뽑혀 나오며 몸이 아래로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잠깐만! 타임!"
-곧 다시 만나자.
배드민턴공처럼 오므라든 눈알이 하늘의 구멍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그와 함께 소용돌이치던 회색 구름이 흩어지며 밝은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빛에 닿은 깃털이 황금빛 꽃잎으로 변해 흩어지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으아아악! 세스으으! 사람살려어!"
꼴사납게 바동거리던 나는 깃털이 사라져도 떨어지는 속도는 똑같이 느리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야 진정 했다.
아주 천천히 지상이, 로열 스타디움이 가까워졌다.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꽃잎이 경기장에 눈처럼 쏟아졌다.
나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경기장 한가운데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깃털의 끝부분이 반짝이더니 아름다운 관으로 변했다.
마치 황금색 덩굴을 엮어서 만든 것처럼 섬세한 장신구였다. 천공신이 내려 준 물건임을 증명하듯 투명하게 반짝이는 보석까지 곳곳에 박혀 있었다.
‘눈알, 너 좋은 아이였구나!'
이걸 왕에게 바치면 사지궁을 활활 태워 버린 일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귀에 끼고 있던 마도구를 다시 작동시켰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천공신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여 영광의 정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을 국왕폐하께 바칩시다!
나는 아기 사자를 들어 올리듯 손에 든 황금관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 음, 좋아. 자연스러웠어!
그런데 당연히 터져 나와야 할 함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사방이 조용 했다.
당황한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내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 뒤의 사람도, 그 옆의 사람도, 마치 도미노처럼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경기장의 모두가 내게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이블린.”
그때 왕이 대신들을 이끌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왕에게 천공선의 관을 바치려고 했다.
"무릎 꿇지 말거라.”
왕이 그런 나를 말렸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왕을 올려다봤다.
나를 똑바로 세운 왕이 내 손에 들린 관을 가져갔다. 그리고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천공신의 선녀여, 앞으로도 아스트리아를 수호하고 축복해 주시오.”
왕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 위에 관을 씌웠다. 원래라면 무거웠을 관이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자리 잡았다. 이내 함성이 터졌다.
"선녀님 만세! 아스트라이아 만세!"
“아스트리아여! 영원하라!"
나는 쏟아지는 함성 속에서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 함성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웃으렴. 오늘은 네가 승리한 날이니까"
왕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당겼다. 그리고 이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는, 흑막에게서 승리했다는 실감이 다가왔다. 그러자 왕이 내 손을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사람들이 더욱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구르르르!
그때 반짝이는 하늘 저편에서 익숙한 날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선두에 선 우유의 등에서 반짝이는 은발을 발견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쏟아지는 황금빛 꽃잎이 황홀한 향기를 풍겼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사자궁에서 벌어진 싸움은 우리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무엇보다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제일 기뻤다.
“사자궁은 신경 쓰지 마라.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이었으니.”
다행히 왕은 사자궁이 홀랑 타 버린 것을 이해해 주었다. 흑막을 없애기 위해 궁 전체를 폭파시켜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사실 나도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진흙을 보고 답이 없다고 느꼈다. 제물로 바쳐진 뒤에도 그 정도라니, 천공신의 도움이 없었으면 정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일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사자궁의 폐허 앞에 서 있었다.
“이비, 꼭 들어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