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 * *
-우우우우웅!
“아스트라이아! 아스트라이아!"
수백 명의 성가대가 한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웅장하고 엄숙한 합창 사이로 날카로운 선율이 끼어들었다.
그와 함께 로프를 타고 하늘에서 뛰어내린 창공 기사단이 현란한 춤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절정 부분에서 화려하게 터지는 불빛과 조명은 고조된 감정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우와아아악!”
-외쳐! 아스트라이아!
“아스트라이아! 아스트라이아!"
사람들은 이블린의 목소리에 호용하며 천공신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쳤다. 감정이 격해져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귀빈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신성 왕국 출신 아니랄까 봐, 아주 더러운 수법을 쓰는군."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꼭 최면에 걸린 것 같았다. 반면 성녀는 이블린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앙은 오랜 세월 동안 단단히 굳어진 바위와 같은 것입니다. 그걸 한순간에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고조된 감정 속에서 하나로 뭉쳐진 의식을 절대자에 게 향하게 한다.
이것이 산을 모시는 대제사의 본질이었다.
평생 의식만 연구하는 신관들도 어려워하는 것을 이블린은 마치 식은 수프를 마시듯 가볍게 해치우고 있었다.
‘정말 놀랍구나. 조명 하나에도 숨은 의도가 담겨 있어. 이런 것까지 전부 계산하다니…….’
전생에 수많은 콘서트와 올림픽을 접했던 이블린은 여기선 이렇게 했던 것 같은데? '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뚝딱뚝딱 무대를 만든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방한 무대들은 온갖 사상적 연구와 심리적인 장치가 합쳐져 만들어진 산물이었다.
이런 종류의 자극에 면역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트랜스 상태에 빠지는 것도 당연했다.
"흥, 물렁한 소리를 하는군. 이게 갑작스레 준비한 무대로 보이시오? 저 여자는 처음부터 회담에 참석한 이들의 기를 꺾어 놓을 속셈이었던 거요!"
평생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을 추구했던 공왕은 이블린이 준비한 무대에 섬뜩함마저 느꼈다.
"거, 영감탱이. 되게 중얼중얼 불평이 많네!"
반면 순수한 마음으로 무대를 즐기던 나바르의 태자는 계속 초를 치는 공왕이 짜증났다.
“그냥 솔직하게 부럽다고 해! 당신 열등감에 우리까지 끼워 넣지 말고!"
“뭐, 뭐라고?!"
발끈하는 공왕을 무시하듯 자리에서 일어난 태자가 깔보는 것 같은 시선을 던졌다.
“당신이 뭐라고 해도 우리 처제가 혼자 카스티야의 괴물과 싸우고 있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아. 처제가 놈 올 끝장내지 못하면 우리가 상대해야 한다고. 당신은 그 괴물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어?"
누구든 노예로 만들 수 있는, 죽여도 또 다른 몸으로 되살아나는 불사의 존재.
그 두려움에 무릎 꿇은 태자의 아비는 자신의 왕국 올 괴물에게 팔아넘기려고 할 정도였다.
"처제가 너무 쉽게 상대하니까 그 괴물이 만만해 보이나 본데, 우리가 직접 씌울 때는 결코 이런 여유는 보이지 못할걸?"
피와 죽음, 그보다 더 끔찍한 것들이 난무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얼굴을 일그러뜨린 태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고. 우리가 처제를 도와야지.”
“예.”
환하게 웃은 태자비 파라가 태자의 손을 잡았다. 태자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향해 외쳤다.
“사막의 전사들이여! 미칠 준비가 되었는가!"
"우! 우! 우!"
"좋다! 가자! 아스트리아의 샌님들에게 사막의 열기를 보여 주자!"
”와아아아!"
순식간에 아래로 뛰어 내려간 태자의 일행이 경기장으로 난입했다. 그것을 본 아스트리아의 귀족들도 덩달아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도 갑시다!"
“우와악! 오늘 한번 죽어 보자!"
이블린이 연 광란의 밤을 잊지 못하던 이들은 겉옷까지 벗어 던지고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빠른 비트에 맞춰 개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어어? 뭐야?"
“우리도 가야되나?"
그것을 본 관객석의 사람들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위 높으신 분들이 미쳐 날뛰는 모습에 깜짝 놀라면서도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다음 무대 중지하고 음악 교체하세요! 무대 조명 바꿉니다!
그리고 이블린은 태자가 일으킨 돌발 사고에도 유연 하게 대처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무대 분위기가 바뀌며 날뛰는 이들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가자! “
“우리도 가자고!"
그러자 관객석의 사람들 역시 홀린 것처럼 경기장으로 내려갔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사람들도 이내 둥둥 거리는 빠른 북소리에 몸을 싣고 발을 굴렸다. 세상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물 뿌리기 시작합니다! 합창단 대기시키세요!
경기장 곳곳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도 사람들의 열기를 진정시켜 주진 못했다.
"천상의 지고한 분을 찬양하라!"
“아스트라이아! 아스트라이아!"
둥둥 울리는 빠른 비트와 귀를 찢는 선율, 그리고 불협화음 같은 합창단의 찬양,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의 감정을 하나로 고조시켰다.
-다 함께 소리 질러! 아스트라이아!
“아스트라이아! 아스트라이야!"
그리고 이블린의 의도대로 천공신을 부르는 하나의 거대한 목소리가 되었다.
-우우우웅!
귀빈석에서 성녀를 지키던 레오디나스는 자신의 신기, 자비의 방패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내 방패 형태의 펜던트에 새겨진 검을 든 천사가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펜던트를 가린 레오디나스가 성녀에게 속삭였다.
“성하! 지금…….”
"알고 있다. 천공신께서 보고 계시는구나."
수백 년 동안이냐 대륙을 외면했던 신이 지금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성력에 예민한 신관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응? 왜 갑자기 소름이 돋지?"
신성 능력이 없는 공왕까지 몸을 움찔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다음순간,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완벽한 무음의 상태.
열기에 들떠 있던 사람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하나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회색의 구름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서서히 벌어진 구멍으로부터 황금빛 번개로 둘러싸인 존재가 내려왔다.
원을 그리듯 펼쳐진 거대한 여섯 개의 날개, 그 중심에 박혀 있는 거대한 눈동자.
천상의 군주를 지키는 대천사, 티폰의 강림이었다.
* * *
"은인께선 분명 놈이 마지막 발악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반드시 놈을 막아야 합니다."
사자궁을 빙 둘러 가며 정령수의 가지를 꽂은 과묵이, 아트레유 발타자르가 모두를 둘러봤다.
“이 가지가 모두의 생명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마지막까지 꺾이지 않게 지켜 내면 우리의 승리입니다.”
흑사자 기사단, 그레이 일족, 대지의 성기사들, 러셀 백작 가문의 기사단, 북부의 전사들, 왕실 수호 기사단이 각각 하나씩을 맡아 모두 여섯 개의 가지를 지키게 되었다.
“우리 일족은 몸과 영혼을 바쳐 위대한 분의 뜻을 이룰 것이오!"
그레이 일족의 장로 메티스가 엄숙하게 외쳤다. 뒤를 이어서 일족 모두가 합창하듯 소리쳤다.
“위대한 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라! 너의 몸과 영혼을 바쳐라! 적의 피와 살을 바쳐라!"
”······은인께서는 무의미한 희생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모두 자신을 지키는 것에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그들의 광기에도 아트레유는 끝까지 차분함을 잃지 않지 않았다. 그리고 빛의 창의 주인, 말라크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쳇, 잘도 떠들어 대네.'
그는 아트레유에게 강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똑같이 수인족의 피를 물려받았는데 한쪽은 대영주의 후계자, 한쪽은 노예의 자식이다.
어린 나이에도 모두를 지휘하고 다들 그것을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을 보자 어쩔 수 없이 질투가 났다.
‘나 같은 건 빛의 창이 없었다면 여기 끼지도 못했겠지.’
괜히 땅굴을 파던 말라크는 갑작스레 부르르 떨린 빛의 창을 놓치고 말았다. 다음 순간, 빛의 창이 한줄기 섬광을 뿜어냈다.
”뭐, 뭐야?!"
이상함을 느낀 말라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순간이었다. 사자궁의 위로 한 줄기 빛기둥이 치솟았다. 동시에 끔찍한 괴성이 터졌다.
-크아아아악!
그것은 천공신을 소환하는 제물로 바쳐진 흑막의 비명이었다.
신적인 존재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신을 향한 강한 부름과 강림을 떠받치는 선물, 그리고 차원의 벽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제물이 필요했다.
이블린은 별생각 없이 흑막을 제물로 삼았다. 흑막의 일부가 천공신의 선물이니, 천공신도 별 거부감 없이 받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만행에 흑막은 그동안 모아온 모든 생명 에너지를 쪽쪽 빨리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캬아아악! 끄아아아악!
마치 짐승이나 기계가 으스러지면서 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사자궁의 모든 창문이 깨지며 붉은 진흙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끄우어억!
-우워어억!
진흙 속에서 흑막이 그동안 집어삼킨 형체가 꾸무럭거리며 움직였다. 인간의 형상도 있었고, 늑대와 같은 짐승이나 말과 같은 가축도 있었다.
하나로 합쳐져 끝도 없이 솟구친 그것들이 해일이 되어 정령수의 가지와 그걸 지키는 자들을 덮치려 했다.
“뭐 하든 거야! 피해!"
정신을 차렸을 때 말라크는 멍하게 서 있는 아트레유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소년의 목덜미를 낚아챈 그가 물러서려는 순간, 파도는 이미 그들의 눈앞에 와있었다.
‘이런 제길!'
이미 늦은 것을 알면서도 창을 움켜쥐는 순간, 보이지 않는 검이 날아와 밀려드는 파도를 썩둑 잘라 냈다. 잘려 나간 부분이 발악하듯 몸부림치다 파스스 재가 되어 흩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말라크는 그리핀을 타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빛에 반사되는 은발, 검은 제복, 손에 들린 화려한 성검까지. 마치 영웅의 등장 같은 모습에 말라크는 힘없이 웃었다.
”······거참, 더럽게 멋있네."
“괜찮나?"
말라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세수가 아트레유에게 물었다. 당황해서 얼굴을 붉힌 아트레유가 허둥지둥 일어섰다.
"구,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에서 시간을 버는 동안 전열을 가다듬어라. 지원군을 보내 주마.”
고개를 든 아트레유는 제 앞으로 날아온 하얀 뱀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얀 뱀, 복실이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아트레유의 머리 위에 자리 잡았다.
-깍!
형에게 질세라 말라크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코코가 어서 전진하라며 그를 콕콕 쪼아 댔다. 뒤늦게 정선을 차린 말라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물러서지 마라!"
“위대한 분의 뒤를 따라라!"
얼음을 내뿜는 하얀 곰을 따라 그레이들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한쪽에선 거대한 바실리스크들이 독을 내뿜으며 붉은 진흙과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하늘에선 수많은 그리핀들이 진흙을 할퀴고 물어뜯으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주 괴물 천지구만.”
한숨을 쉰 말라크는 창을 고쳐 잡았다.
끝없이 꾸역꾸역 진흙을 뱉어 내는 카스티야의 괴물에게 질리는 한편, 이렇게 계속 싸우다 보면 이블린이 어떻게든 해 줄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믿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해 봐, 주인님!"
* * *
나는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천공신을 소환하려고 했는데, 그걸 위해 아스트라이아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는데, 뭔가 이상한 것이 튀어나와버렸다.
”……깃털 눈알 선풍기?"
내 말에 응답하듯 하늘을· 뒤덮은 선풍기가 날개를 펄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