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 * *
어둠 속에서 쥐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회담장 안을 엿보고 돌아온 쥐를 그림자 속에 던져 넣었다. 조그마한 쥐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졌다.
잠시 후 쥐의 기억이 그것에게 스며들었다. 드문드문 끊어진 짧은 내용뿐이었지만 원하던 정보를 손에 넣기에는 충분했다.
“이블린 랑가비스라. 황금 혈통을 준비하다니, 확실히 기대 이상이군.”
사실 그것이 라리사 모어를 회담장으로 밀어 넣은 것은 이블린의 약점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세수 엘마이어라면 분명 아내에게 선사할 새로운 신분을 준비해 두었을 테니까.
‘이제 이 몸뚱이도 슬슬 한계야. 빨리 이블린의 몸으로 옮겨 가야 할 텐데'
아쉬움을 느낀 그것이 혀를 날름거렸다.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들었다.
마음 같아선 밖으로 뛰쳐나가 사자궁을 포위하고 있는 놈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놈들에겐 신성력이라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 있었다. 성물이라도 하나씩 갖고 있는 것인지 그것의 힘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이블린이 준비한 덫에 갇혀 이블린의 개들에게 쫓겨 다닌 그것은 몹시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이렇게 낭패를 본 것은 세수 엘마이어의 검에 몸을 잃었을 때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하지만 참는 것도 지금뿐이다.'
시간은 그것의 편이었다. 곧 해가 저물면 이 연약한 덫을 깨부수고 이블린을 찾으러 갈 것이다.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려라.”
음침한 미소를 홀리던 그것은 문독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북처럼 둥둥거리는 울림, 절규 같은 외침이 연속으로 터졌다. 한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리에 그것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잠시 고민하던 그것은 이내 무시하기로 했다. 그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이블린의 수작일지도 모르니까.
이블린은 벌써 몇 번이나 그것이 공들여 만든 계획을 망가뜨렸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이건 또 뭐냐!"
그것의 발밑에서 기묘한 빛이 솟구쳤다. 하늘 저 높은 곳까지 이어지는 성스러운 빛이었다. 동시에 그것이 지금까지 힘들게 모아온 생명 에너지가 쭈우욱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저항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사자궁에 걸려 있는 고대 마법조차 그것을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으아아악!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이블린!"
이 기묘한 현상이 이블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그것이 울부짖었다.
* * *
아스트리아의 수도, 호라이 곳곳에서 호객꾼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기사 행진이 시작된다!"
"공작 부인께서 기사 행진을 준비하셨다!"
“서둘러! 늦게 가면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평소라면 무시했을 사람들도 공작 부인이라는 말에 고개를 획 돌렸다. 호객꾼을 붙잡고 캐묻는 사람도 있었다.
"공작 부인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요?"
"당연히 '좋으신 분이지 다른 귀족들이 우리를 신경이나 쓰겠나?"
이블린은 수도에서 ‘좋으신 분'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녀는 코끼리 행진 때 눈도장을 찍은 후, 〈레이디 메그〉를 무료로 공연하고 극 자체를 시민들에게 바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어서 수도의 모든 아이들에게 새해 선물을 주는 이벤트를 벌여 모두의 호감을 샀다.
최근에는 광장의 나무에 매달려 있던 장식품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눠 주기까지 했다. 어두워지면 빛을 내는 신기한 장식품 속에는 생전 처음 보는 과자가 들어 있었다.
새까만 과자는 지금껏 음료처럼 마시던 초콜릿을 단단히 굳혀서 만든 것이었다. 달콤하고 품위 있는 맛에 사람들은 완전히 반해 버렸다.
지금껏 많은 귀족들이 ‘자선’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지만, 대부분 아랫것들에게 어울리는 거친 옷과 마른 빵을 나눠 준 것뿐이었다.
반면 이블린은 그런 귀족들과 달랐다.
상대를 자비를 베풀어 줄 하층민이 아니라 선물을 주고 싶은 사람, 새로운 문회를 즐기는 사람, 즐거움을 아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것을 느낀 사람들은 감사와 고마움을 담아 그녀를 ‘좋으신 분'이라고 불렀다.
"좋으신 분께서 또 재미있는 일을 준비하셨나 본데?“
“한번 가볼까?"
“먼저 가게. 나는 애들 엄마부터 찾아서 같이 가야겠어. 나 혼자 가면 분명 회를 낼 거거든.”
이블린이 뭔가를 亡비했다는 말에 사람들은 의심 없이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그리고 외곽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기시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예상보다 더 사람이 많은데요?"
"단장, 어떻게 합니까?"
"치, 침착해라! 연습은 충분히 했으니까!"
”……단장이 제일 많이 떨고 계시지 말입니다."
모티머 백작 가문에서 차출된 ‘흑곰 기사단'은 비 맞은 병아리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흑곰 기사단, 대기해 주세요!
-금사자 기사단 지금 출발합니다. 흑곰 기사단은 출발 위치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귀에 꽂은 마도구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단장이 펄쩍 뛰었다. 새파랗게 질린 단장을 보고 다른 기사들도 긴장된 손을 꽉 쥐었다.
그때 그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 파견된 렌탈 나이트 1 호, 나일 빌러스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됩니다. 어려운 동작은 없으니 꼭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그, 그렇겠지?"
"예, 스스로를 믿으십시오!"
그러자 일전에 그를 구박했던 기사들이 눈물을 글썽 거렸다.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게 기사냐고 모욕을 주기까지 했는데 나일은 그들을 격려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빌러스, 넌 우리 기사단에서 끝까지 책임질게."
“맞아, 너라면 정식 기사로 들어와도 환영이야!"
나일은 무대 공포증으로 새파랗게 질린 그들을 출발 위치로 이끌며 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현재 제 위치에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엥? 정말?"
‘예, 여러분도 곧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나일은 앞서 출발한 금사자 기사단에게 쏟아진 함성과 박수 소리를 들으며 심호흡을 했다. 새로운 무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흑곰 기사단 출발하세요!
-전사의 노래 준비! 3, 2, 1! 들어갑니다!
그리고 용장한 음악과 함께 흑곰 기사단의 행진이 시작됐다.
“우와아아악!”
“또 나온다!"
구경을 나온 사람들은 미친 듯이 함성을 질렀다.
앞선 금사자 기사들은 수많은 폭죽과 트럼펫 소리로 오프닝을 끊으며, 바위 그리핀들이 끄는 전차를 타고 나타났다.
부엉이와 고양이를 닮은 숲 그리핀과 달리, 바위 그리핀은 독수리와 사자를 닮은 용맹한 모습이었다.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로 유명한 바위 그리핀이었지만, 숲 그리핀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이블린의 말에 홀라당 넘어간 그들은 얌전히 전치를· 끌었다.
어쨌든 ‘금사자 기사단'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화려한 행진이었다.
뒤를 이은 흑곰 기사단은 엄숙한 행진을 선보였다. 쿵쿵거리는 음악에 맞춰 기사들이 창으로 바닥을 찍을 때마다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 뒤를 이어서 높은 산처럼 꾸며진 무대가 움직였다. 방패를 든 기사들이 이동 무대 위에서 멋진 동작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전사의 노래를 들어라! 아스트리아를 위해 살기로 맹세한 자여! 영광의 부름에 응답하라! 전사여! 아스트리아! 아스트리아! 영광의 부름에 답해라!"
무대 꼭대기에는 무척 지루한 표정의 하얀 곰이 엎드려 있었다. 사람들은 흑곰 기사단인데 왜 하얀 곰이 있는지 의아해하면서도 멋진 무대에 환호했다.
그러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기시들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제아무리 명예로운 기사라고 해도 이런 환호와 박수를 받는 일은 드물었다.
-흑곰 기사단, 수고하셨습니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즉시 행사장으로 이동해 주세요!
행진이 끝나 무대에서 내려올 때는 약간의 아쉬움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것을 들킬세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기사들은 갑자기 터지는 함성에 놀라 퇴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뒤를 잇는 수호 기사단이 하얀 말을 타고 행진하고 있었다. 환상 마법으로 말의 어깨에서 눈부신 날개가 펼쳐지자 사람들이 미친 듯이 환호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본 흑곰기사단이 일제히 분노했다.
”와! 이건 너무 차별 아니냐? 우리는 이상한 산에 이상한 곰이나 주고!"
"무대 쿠얼리티 차이 봐라. 단장! 저것들이 주최 측에 뭔가 먹인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도 다시 해야 되지 말입니다!"
갑자기 무대 욕심을 내기 시작하는 기사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온 나일은 코크 곰을 챙겨 행사장 안으로 이동했다.
* * *
이블린은 이번 행거시를 위해 로열 스타디움을 열었다.
국가적인 기념일에만 개방되는 거대한 경기장의 관객석은 벌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12기사단의 행진을 따라온 사람들이 마치 빨려 들어가듯 스타디움으로 들어온 탓이었다.
"맥주! 맥주 있습니다! 좋으신 분께서 여러분에게 공짜맥주를 씁니다!"
"안주 팔아요! 안주! 튀긴 닭, 소시지 , 버터 옥수수, 오징어! 없는 게 없습니다! 안주 팝니다!"
공짜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챙겨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처음 느끼는 색다른 분위기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기사들의 행진만으로도 엄청난 구경거리였는데, 이제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새로운 무대가 준비되고 있지 않는가.
-행사가 곧 시작됩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어서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명랑한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조명이 어두워졌다. 이어서 두둥두둥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경기장에 조금 전 행진을 선보였던 기사단이 입장했다.
중앙의 무대를 감싸듯 대열을 이룬 기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방패를 두드리며 발을 굴렸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모두의 긴장이 높아지는 순간, 여자가 외쳤다.
-아스트리아의 영원한 태양, 천공신의 딸!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순간 둥글고 거대한 빛이 하늘에서 무대로 내리꽂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눈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무대 위엔 월계관을 쓰고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왕이 서 있었다.
“태양이 사람으로 변했어?"
사실은 백탑주의 빛 마법이 시야를 빼앗는 동안 왕이 재빨리 무대 로 올라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트릭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태양이 떨어져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리는데, 왕이 들고 있던 활을 허공에 겨누고 힘껏 잡아당겼다 놓았다. 그러자 폭발 하는 빛과 함께 허공에서 거대한 불꽃이 타올랐다.
성냥이의 스페셜 서비스였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공포나 다름없었다.
"꺄아아악!"
“아악! 신이시여!"
사람들이 자지러지는 순간, 기시들이 다시 쿵쿵 발을 굴렸다. 그리고 마치 한목소리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스트라이아!"
"국왕 폐하 만세!"
“아스트라이아!"
"국왕 폐하 만세!"
겁을 먹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왕이 자애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의 백성들이여, 두려워 말라. 나는 너희를 밝은 미래로 이끌 자. 너희들의 왕이다!"
동시에 경기장 사방에서 밝은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촘촘한 빛의 그물은 사람들의 감정을 공포에서 경의로 바꿔놓았다.
이 모든 것을 조정하는 자, 이블린이 힘차게 소리쳤다.
-여러분, 손을 높게 들고 외치십시오! 외쳐 ! 아스트라이아! 국왕폐하만세!
”와아아아아! 아스트라이아! 국왕 폐하 만세!"
천공신을 소환하기 위한 광란의 무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