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화, 황금 혈통!"
“그럼 신성 왕국의 왕족이나 다름없지 않나?"
성녀의 말에 홀딱 넘어간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봤다. 꼭 치와와가 사자로 변신하는 모습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이고, 이 인간들아. 어디 가서 옥장판이나 사지 마라.
당연히 모두가 성녀의 말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라리사 모어는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이블린 그란의 노예 매매 증명서는 진짜라고!"
“그래서 당신이 어리석다는 겁니다. 엘마이어 공작이 그런 증거를 남겨 둘 사람인가요?"
성녀의 반박에 뻣뻣이 굳어 버린 라리사가 고개를 돌려 세수를 쳐다봤다. 세수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티론의 귀족 명부에 이블린 그란이라는 이름이 있는지만 확인해도 조작된 문서라는 걸 알았을 텐데.”
"······!"
“아니면 네 주인이 그것까지 말해 주진 않던가?"
라리사의 멘탈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휘청거리던 그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눈에 초점이 없어서 좀 이상하게 보였다.
“흠흠, 저 악녀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소? 무엇보다 이번 대의 성기사단장은 신전에 바쳐진 고아라고 들었는데?"
그때, 부루퉁한 표정의 공왕이 딴죽을 걸었다. 성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알고 계시는군요. 사실 제 조카들의 출생은 오랫동안 신전의 극비 사항이었습니다.”
"서, 성하!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갑자기 당황한 표정이 된 신관들이 그녀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성녀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제 언니, 조안나 랑가비스가 차기 성녀의 자격을 버리고 혼외 관계를 통해 자식들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헉!”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지는 것을 보니 꽤 충격적인 선언인모양이다
“조안나는 세상을 구할 사도가 제 태에 임하리라는 신탁을 받고, 당대 신성력이 가장 강했던 상대와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그냥 눈 맞아서 사고 친 것 같은데.'
내 속마음과 달리 사람들은 그럴싸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이 하나면 사고 쳤을 가능성이 있지만, 셋이나 되면 계획적인 임신이기 때문이다.
‘내 신분을 세탁하면서 조카 신분까지 세탁하는 건가.'
언니가 사고 쳐서 낳은 사생아를 신탁의 아이로 둔갑시키다니. 고작 벽돌이나 사기 쳐서 팔아먹던 나와 달리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장남인 레오디나스는 최연소 성기사단장이 되었고, 장녀인 이블린은 신의 분신을 강림시켰고, 차남인 브랜든은 고작 열 살 때 천사를 소환했죠.”
자랑스럽게 조카들의 업적을 늘어놓던 성녀의 얼굴 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문제는, 신전에서 극비로 키우던 아이들의 존재가 대신관을 통해 카스티야로 새어 나갔다는 겁니다.”
성녀는 브란과 내가 괴한들에게 납치당해 카스티야로 끌려가던 도중, 수상한 배를 추격하던 세수에게 우연히 구출된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냈다.
“이블린은 자신을 구해 준 공작에게 반해 버렸고, 제 신분까지 숨기면서 약혼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나를 남자에 미친 새끼처럼 쳐다보기 시작했다. 특히 마리아의 시선은 나를 당장 찢어 죽일듯이 살벌해져 있었다.
아니, 나도 오늘 처음 안 사실이니까 배신감 느끼지 말아줄래?
“아시다시피 황금 혈통은 타국으로 시집가는 게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죠. 하지만 이블린은…….”
나를 바라본 성녀가 난감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가문의 법도에 따라 장남인 레오디나스를 보내 이블린을 데려오려 했지만, 공작과의 결투에서 패하는 바람에 그마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럼 그때 그 일이 바로······!"
라리사의 범죄를 고발하는 세 번째 증인이었던 헥터가 갑자기 팔짝 뛰며 성녀의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제가 그 결투의 증인입니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천공신의 신녀를 목격했다고 말하자마자 부득부득 엘마이어 가문까지 끌고 가더라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아, 맞아! 예전에 공작이 성기사단장을 넝마로 만들고 북부로 도망쳐서 난리가나지 않았나?"
“이제 보니 가출한 동생을 쫓아온 오빠와 약혼녀를 뺏기지 않으려는 공작의 혈투였던 거군.”
“아니, 난 그때 신성 왕국이랑 전쟁 터지는 줄 알고 밤새워서 대책을 논의했는데!"
사람들이 저마다 입을 열어 자신이 아는 사실을 보탰다. 그러자 내가 신성 왕국 출신이라는 것과 남미새(남자에 미친 새끼)라는 것까지 전부 진실이 되어 버렸다.
"······이블린이 랑가비스의 적녀라니, 처음 듣는 소리군.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야.”
그때 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왕의 노여움을 느낀 사람들이 즉시 떠들던 것을 멈췄다.
“세수, 너는 내게 이블린이 신성 왕국의 고위 귀족이지만 방계이기에 걱정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게 전부 거짓이었느냐?"
아무래도 왕은 나를 고위 귀족의 방계 출산으로 세탁시키려는 계획만 알고 있던 모양이다. 그런데 성녀가 대뜸 나를 조카로 둔갑시켜 버리니 꽤 화가 난 기색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제 아내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수 담담한 얼굴로 왕의 뒤통수를 때렸다.
“내가 사자 새끼를 키웠구나. 감히 짐을 속여?!"
"왕께서 둘의 결합을 찬성하지 않으신다면, 신성 왕국에서 이블린을 돌려받고 싶습니다.”
성녀는 한술 더 떠서 나를 데려가고 싶다는 의시를 드러냈다. 그러자 귀족들이 벌떼처럼 난리를 쳤다.
“아니, 잘 사는 부부를 왜 갈러놓으시려고 합니까?"
“우리 아스트리아에선 이런 이유로 이혼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거기에 맞서 신관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황금 혈통은 오직 신성 왕국의 것입니다!"
“가문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결혼하다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갑자기 시장통이 되어 버린 상황에 브란도 한 목소리 보탰다.
"누나! 나도 이 결혼 반대야! 당장 이혼해! 가족들도 초대하지 않은 결혼식 같은 거 난 절대 인정 못 해!"
그리고 나는 빽빽거리는 녀석을 무시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에이, 내가 언제 머리 굴러 가면서 일했다고.'
결국 생각을 포기한 나는 내키는 대로 동생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브란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조용해진 공기 속에서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브란, 너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나왔어?"
”······어?"
“지금 방학 아니잖아. 그럼 결석 처리되는 거 아냐?"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었는지 브란의 눈이 흔들렸다.
"어, 어어? 형이 멋대로 데리고 나온 거라서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남에게 책임을 미루는 솜씨가 과연 내 동생이었다. 반면 어딘지 어리바리한 가짜 오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절거렸다.
"교장에게 사정 설명을 했으니 분명 잘 처리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출석이 인정되는지부터 확인했어야지. 아카데미 성적에 출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약간의 손해는 감수해야·······."
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가짜 오빠의 등에 풀스윙을 날렸다. 짜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닿는 근육이 오징어처럼 마구 뒤틀리는 게 느껴졌다.
“너는! 형이라는 인간이! 동생 공부시킬 생각은 안하고! 대체 왜 그러고 사니? 응? 언제까지 이럴래?!”
“아악! 잠깐! 말로 해라! 말로!"
나는 이어서 여전히 철이 없는 동생의 등짝도 갈겼다.
“너도! 똑같아! 매형에게 그딴 편지나 보내고! 내가 진짜창피해서 살수가 없어!"
“아악! 누나! 왜 이래 ! 아악!"
오징어처럼 몸을 비트는 둘을 보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군거리는 것이 들렸다.
“음, 확실히 친남매군!"
"누가 봐도 친남매 야."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겠다는데 대체 뭐가 못마땅해서 이 난리야?"
“가, 가문의 허락을…….”
”가문이 나한테 뭘 해 줬는데? 결혼할 때 집을 사 준것도 아니고 돈을 보태 준것도 아니잖아. 맨몸으로 결혼해서 잘 살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것 아니야!"
"······."
“그리고 뭐? 이혼? 이호온? 나 이혼당해서 돌아가면 신전에 불 지른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내가 크아앙 포효하자 성녀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왕에게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블린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녀의 빠른 포기에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과, 과연 사교계의 폭군.”
"친정에 있을 때도 성격이 대단했군요.”
진정한 남미새를 연기해 봤는데 기대와 좀 다른 반응이 나오는 것 같았다. 왕은 착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 봤다.
“이블린, 너는 황금 혈통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아스트리아의 신민으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
"저는 이미 신성 왕국과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앞으로는 아스트리아의 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눈치챈 나는 냉큼 대답했다. 그러자 만족한 표정으로 변한 왕이 성녀를 바라봤다.
"성녀께서도 동의하시오?"
"동의하는 대신 이모와 조카 사이의 사적인 교류만큼은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떡인 왕이 내게 손짓했다.
“이블린 엘마이어는 이리 와 짐의 앞에 무릎을 꿇어라.”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왕의 지시에 따랐다.
“이블린 그대는 뛰어난 기지와 능력으로 벌써 수차례나 국가를 위기 속에서 건져 냈다. 그대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하틀랜드 공작의 작위를 내린다.”
나는 순간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고 왕을 올려다보았다. 왕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하틀랜드 공작의 영지와 더불어 클라멘스 백작령을 이블린 하틀랜드 엘마이어에게 하사하며 공비의 호칭을 허락한다."
“폐,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공작 부인 대역에서 공작으로 신분 상승을 해 버리고 말았나. 무엇보다 공비는 곧 프린세스인데, 내가 외국의 왕족이라고 인정받은 셈이다.
"어서 일어나라."
왕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자 사람들이 환한 얼굴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마리아 역시 두고 보자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그리고 세수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문득 예전에 그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당신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다 사라지면 그때는 나를 받아줘.”
증거는 없지만 성녀의 조카까지 끼워 넣어 나를 세탁한 솜씨가 세수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나와 속성이 다른 불꽃 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라리사 모어가 발작을 일으켰다.
“아니야! 아아악!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네까짓 게 어떻게 왕족이야! 안 돼! 까아아악!"
펄떡거리다 못해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모습에 눈을 찌푸린 왕이 손을 내저었다.
"시끄럽군. 죄인을 어서 끌고 가라!"
그림자 기시들이 라리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밖으로 끌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열린 문으로 벽돌 연합군의 지휘를 맡은 과목이가 뛰어 들어왔다.
"은인! 큰일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