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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18화 (218/240)

218화

* * *

"흐음.”

나는 바닥에 축 늘어진 라리사를 툭툭 찼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는지 꿈틀하는 반용이 느껴졌다.

‘지은 죄가 있는데 이걸로 죽으면 안 되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으면 오래오래 유병장수해야지. 적어도 세스가 고통받은 세월만큼은 벌을 받아야 한다.

“지독한 것, 악마나 다름없구나."

순간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나 해서 고개를 들자, 일그러진 얼굴로 라리사를 노려보는 왕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의 반용도 비슷했다.

"악마도 울고 갈 정도로 끔찍한 여자군요."

"저런 사람인지도 모르고 다들 속고 있었다니.”

내 연극을 보고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고렇게까지 했을 리가?'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충격 어린 분노를 내보였다.

좋아. 이제 밖에 나가서 ‘연극보다 실제간 더 심하더라!'고 한마디만 해 주면 된다. 그럼 세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이 널리 퍼질 테니까.

내심 뿌듯해하던 나는 세스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당장 쓰러질 것처럼 오열하는 아버님에 비해 너무나 무심한 얼굴로 라리사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깊게 가라앉은 두 눈만이 그가 평온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드러냈다.

‘세스······.'

내 시선을 느낀 세스가 살짝 미소 지었다. 마치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듯했다.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복수를 준비하면서 세스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진 않았다. 그는 절대 ‘다들 봤지? 나는 무죄라고 했잖아!’하고 뻐겨 댈 성격이 아니니까.

그래서 이번 복수는 순전히 내 자기만족을 위한 거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욕을 먹는 게 화가 나서. 남들이 멋대로 말하는 걸 용서할 수가 없어서. 세스를 욕한 너희가 틀렸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세스가 당연히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난 정말 최악이네.’

쓴웃음을 지온 나는 그림자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즉시 옆으로 다가온 기시들이 라리사를 꽁꽁 묶었다.

그사이 나는 테이블에서 찻주전자를 가져와 라리사 의 머리에 콸콸들이 부었다.

빨강 머리 카밀라가 간절히 원하던 ‘우아한 복수 방법’이었다. 여기에 부채로 뺨까지 때려 주면 완벽하겠지만 거기까진 준비하지 못했다.

“킥, 크큭……!"

차를 뒤집어쓴 라리사가 정신이 들었는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처음엔 차가 코로 들어갔나 했는데, 억지로 키득키득 웃고 있는 거였다. 갑자기 고개를 번쩍 쳐든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지금은 너희가 이긴 것 같지? 천만에! 곧 주인님께서 나를 구하러 오실 거야. 그땐 너희가 내게 한 짓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라리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주인님이 오시면 너흰 다들 죽은 목숨이라는 둥, 지금의 이 원한을 독특히 갚아 줄 거라는 둥 헛소리를 해 대구 있었다.

나는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툭툭 찼다.

”······야."

“너희들의 나라는 멸망할 것이다! 한낱 노예의 말을 듣고 나를 핍박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야, 그만해."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재빨리 속삭였다.

“네 주인 안 와. 하도 티내고 다녀서 대비해 놨거든."

갑자기 라리사의 입이 딱 다물렸다.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녀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우, 웃기지 마! 네까짓 것이 주인님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어!"

“아, 예 근데 지금까지 안 오잖아요. 그렇죠? 제발 눈치 좀 챙겨라.”

라리사가 너무 병신처럼 구는 바람에 과거 그녀에게 휘둘린 엘마이어 가문의 평판까지 추락할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블린 대비해 놨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

다행히 왕이 내 곤란함을 눈치채고 상황을 끊어 주었다. 나는 왕의 센스에 감사하며 공손하게 답했다.

“평화 회담을 앞두고 정체불명의 전염병과 수상한 단체의 움직임 등의 위험 요소가 감지되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세수는 첩자들을 통해 카스티야 왕이 모습을 감춘 사실을 알아냈다. 붕괴 직전인 카스티야의 상황을 보면 아예 본진을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흑막이 아스트리아로 건너온 것이 감지됐다. 수도로 직진하는 전염병의 움직임으로 볼 때 흑막의 목표는 분명 세수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놈은 죽으나 사나 세수를 없애 버리려고 들 거야.’

이제 겨우 가시밭길을 벗어난 세수가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몰라 매사 경계하며 살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흑막이 홀랑 넘어갈 정도로 유혹적인 덫을 치기로 결심했다.

예를 들면 소담하게 한자리에 모인 각국의 지배자 같은, 한 방에 상황을 역전시킬'수 있는 상황 말이다. 그리고 흑막은 보기 좋게 덫에 걸려들었다.

‘내가 광장에 나무를 심은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크리스마스트리로도 쓰고, 세수와의 이벤트로도 쓰고, 행사나 화제 모으기로 다양하고 알뜰하게 썼지만!

사실 광장의 나무는 정령수로부터 힘을 전달받는 매 개체였다. 함정으로 들어온 흑막을 왕궁 안에 가두기 위해 결계의 핵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회담장 밖에선 선배님이 이끄는 흑사자 기사단, 백탑주가 이끄는 그레이들, 루시아가 이끄는 성기사들, 핀과 데오가 이끄는 러셀 백작가의 기사단 과목이와 갈색이가 이끄는 북부의 전시들이 각자 손에 벽돌 들고 흑막의 행방을 추적하며 포위망을 좁혀 가고 있었다.

“아니, 나한텐 말도 없이……."

"허어, 이 녀석들이! "

자식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러셀 백작과 우르스 변경백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흑막의 노예인지 알 수 없어서 기밀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잠시나마 라리사 모어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셨을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지금은 왕궁 내의 모든 사람들을 벽돌로 때려서 흑막의 노예들을 정화시키는 중이었다.

"오늘 고귀한 분들의 용기로 인해 대륙의 오랜 근심거리를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릴 미끼로 썼다는 말을 잘도 포장하는구나."

왕이 곧장 아픈 곳을 찔러 왔다.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귀빈들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다고 세수를 미끼로 쓸 수는 없잖아?'

우리 세수 너무 작고 소동하다고. 다행히 사람들은 나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곳에 더 흥미를 보였다.

“그런데 그 벽돌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아주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군요."

나는 탐욕이 가득 담긴 그들의 시선에 얼른 바닥에 떨어진 벽돌을 집어 들었다.

“이 벽돌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대지신께서 이 땅에 강림하실 때 그분의 신성한 기운을 듬뿍 머금은 흙을 정성껏 빚어 만들어진 신물입니다."

“오오!”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을 튼튼하게 하며, 머리가 좋아지고 면역이 높아지고 염증이 사라지고 탈모부터 변비까지 온갖 만성 질환에 탁월한 효과가 있지요."

“그럴 수가! "

“그리고 흑막의 하찮은 세뇌 능력까지 막아 줍니다!“

“대, 대단한 보물이군!"

우리 집에선 복실이와 코코가 블록 놀이할 때 쓰고 있지만 어쨌든 귀한 물건이긴 하다. 나는 엣헴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위험이 아직 남아 있는 지금, 이런 신물을 독점할 수는 없는 법 단 한 가지 조건을 걸고 이 귀한 보물을 여러분에게 양도할까합니다."

“네?!”

"바로 저 하찮은 죄인, 라리사 모어의 처분을 엘마이어 가문에 넘겨주시는 겁니다! "

모두가 골고루 피해를 입었지만 처벌권을 나눠 가질 순 없다. 라리사모어의 핏방울하나, 살점 하나까지도 이쪽에서 처리해야 한다.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라리사 모어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내 장담에 모두가 동의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엘마이어 가문만큼 피해를 입은 곳은 없지요.”

"은인께서 원하신다면 처벌 권한을 넘기겠습니다."

“자, 잠깐 신물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공국의 그리핀을 돌려준다면······!"

“모두의 의견이 일치된 것 같군.”

왕이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봐, 내 말 안 들려? 난 아직 동의하지 않았다고!"

“나라를 망친 악녀 , 라리사 모어의 처분은 엘마이어 공작가문에 맡기겠다."

"감사합니다!"

집에 남아도는 벽돌과 라리사 모어를 교환하다니, 꽤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이 수치심도 모르는 것들!"

자신이 벽돌과 당근 교환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라리사 모어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노예가 귀족을 처벌하게 내버려 둔다고? 그게 너희들이 떠받드는 잘난 법에 있던가? 그런 끔찍한 사례를 후대에 남길 셈이야?"

듣는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의 헛소리였다. 하지만 라리사는 자신의 일침으로 모두를 입 다물게 한 것처럼 기세등등해졌다.

“결국 너흰 나를 정당하게 처벌하는 걸 포기한 거야! 저런 노예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정말 딱하군요."

성녀가 빈정거리는 라리사를 향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블린의 과거 신분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당신의 처분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럼 모두에게 당당하게 알려! 하찮은 노예가 너희들의 목숨을 구해 줬다고 말이야!"

라리사는 꼴좋다는 듯이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봤다. 정신 승리로 반짝이는 얼굴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밝히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그때, 성녀가 세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짓을 받고 잠시 밖으로 나갔던 세수가 두 사람과 함께 돌아왔다.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소개하죠. 성기사단장이자 제 조카인 레오디나스 랑가비스. 그리고 그의 막냇동생인 브랜든 랑가비스입니다."

장대처럼 키가 큰 남자와 그의 어깨에도 오지 않는 작은 소년이 흰 바탕에 황금 자수가 놓인 똑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서 있었다.

금발에 녹색 눈, 하얀 피부, 곱상한 외모를 지닌 두 사람은 마치 형제처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둘은 결코 형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작은쪽이 중2암에 걸린 내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누나!”

나는 내게로 달려오는 브란을 얼떨결에 안았다. 아니,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누나! 어떻게 형이랑 나한테 말도 안하고 몰래 결혼 할 수가 있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브란은 엉엉 울며 나를 원망했다. 그리고 뚝딱거리며 내게 다가온 남자가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흠흠 헛기침을 했다.

“가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네 멋대로 결혼하다니. 이 오라비는 너에게 실망했다!"

……미쳤습니까, 휴먼?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남자는 식은땀을 뻘뻘 홀리며 성녀를 힐끔거렸다.

“이블린의 원래 이름은 이블린 랑가비스. 신성자를 잉태하는 가장 고귀한 핏줄. 황금 혈통이라 불리는 랑가비스의 적녀입니다."

그리고 온화한 미소의 성녀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쳤다.

와,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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