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공왕은 복어처럼 두들겨 맞는 라리사 모어를 흔들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블린은 정말 야무지게 상대를 팼다.
몸집도 작고 힘도 약한 것 같은데, 매번 급소에 딱딱 주먹이 꽂혔다. 어떻게 하면 더 아프게 때릴 수 있을까 연구라도 한 사람 같았다.
“아악! 악! 그만!"
머리채를 쥐어뜯기던 라리사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쳤다. 이블린은 사양하지 않고 그녀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라리사가 볼썽사납게 바닥에 엎어지자 민망해진 공왕은 험험 헛기침을 했다.
"거, 많이 됐으니 이제 그만하는 게…….”
“뭐라고요?"
"무슨 소립니까!"
사방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졌다. 특히 라리사로 인해 모시는 이의 목에 칼을 겨눴던 측근들은 이까지 득득 갈았다.
“저 여자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데!"
평생 바쳐 온 충정이 그녀의 파렴치한 계략에 더럽혀졌다. 마음 같아선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내고 싶을 정도였다.
"공왕의 말이 맞다. 더 때리다 내 귀염둥이가 몸살이라도 날까 무섭구나. 이제 그만하거라.”
왕의 만류에 이블린은 어쩔 수 없이 라리사를 놓아 주었다. 라리사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움찔움찔 몸을 떨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블린, 네가 정말 큰 공을 세웠구나."
왕은 따뜻한 눈으로 이블린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 역시 고마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공작 부인이 아니었으면 큰 화를 당했을 겁니다."
“부인께서 우리 모두를 구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블린에게 악감정이 많은 공왕만 입을 삐죽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블린의 업적을 깎아내리진 못 했다.
‘벽돌을 던져서 해결 봤지만 해결은 해결이지.'
이블린이 워낙 간단히 끝내 버려서 그렇지, 사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들을 인질로 잡혀 다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때, 쏟아지는 감사에도 묵묵히 서 있던 이블린이 입을 열었다.
“국왕 폐하, 귀빈 여러분,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는 모두의 앞에서 저 여자, 라리사 모어의 죄악을 고발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자리지만 제게 잠깐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주춤하던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의 의견이 일치되는 것을 확인한 왕이 말했다.
“이블린 어서 고개를 들어라. 이 자리에서 네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감히 말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든 이블린이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림자 기사들이 낯선 남지를 질 질 끌고 들어왔다.
“난 정말 저주에서 손을 씻었다니까! 요즘은 밤낮으로 일만하고 있다고!"
"국왕 폐하의 앞이다! 얌전히 있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남자는 안의 광경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쿵쿵 이마를 부딪쳤다.
"폐, 폐하! 억울하옵니다! 제가 과거에 죄를 지온 것은 맞지만 요즘은 밤낮으로 일만 하고 있습니다! 딴 짓을 할 시간도 없습니다!"
침까지 튀기며 필사적으로 말하는 남자를 보고 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낯익은 목소리를 들은 라리사는 움찔해서 고개를 들었다.
‘저, 저놈은······!'
마탑에서 왕을 습격할 때 이용해 먹고 버렸던 저주 술사였다. 당연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자가 멀쩡히 살아 있는 것에 라리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저주술사가 상대를 확인하고 기겁하며 팔짝뛰었다.
"저, 저 여자!“
“아는 사람인가요?"
“제가 말한 그 여자입니다! 저 여자가 다 시킨 거였다고요! 전 그냥 의뢰만 받은 건데, 돈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엉허어엉!"
저주술사는 억울함에 몸부림치며 라리사의 죄악을 낱낱이 고했다.
라리사가 변종 마나석으로 마탑의 결계를 무력화시키고, 저주를 가둔 마나구를 폭발시켜 왕의 암살을 꾀했던 일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감히!"
당시 저주에 휩쓸려 죽을 뻔했던 근위대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근위대장도 빠드득 이룰 갈았다.
“저는 잔챙이이고 주모자는 저 여자입니다! 그러니 제발 일 좀 줄여 주세요, 예?! 야, 야근만이라도!"
”끌어내.”
"안 돼! 아악!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잘 수 있게 해 줘!"
저주술사가 도로 질질 끌려 나갔다. 비록 대역죄를 저지른 범죄자였지만,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에선 왠지 모를 짠함이 느껴졌다.
"죄인은 반역에 협조하고 저 주술에 손을 댄 죄로 노역형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왕국의 근로법 기준으로 최상의 대우를 받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
“어, 음,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자본주의의 악마가 서둘러 다음 증인을 소환했다. 이번에 끌려 나온 것은 나바르 왕국에서 활동하던 카스티야의 첩자였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저 상급자가 시킨 대로 한 것뿐입니다!"
그는 라리사 모어가 제게 검은 꽃을 태자에게 쓰라고 강요한 것을 진술했다. 그러자 눈이 뒤집힌 태자가 라리사에게 달려들다가 붙잡혔다.
“아, 이거 놔봐! 진짜 딱 한 대만 찌를 데니까! 어서 놓으라니까!"
“전하, 진정하십시오!"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검은 꽃 때문에 꼼짝없이 저승으로 갈 뻔했던 태자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태자비가 한참이나 달랜 후에야 겨우 다음 증인들이 들어올 수 있었다.
"저는 과거 대지선의 성기사였던 헥터라고 합니다."
헥터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레고리오 대신관이 이블린을 흑마법사로 몰기 위해 함정을 팠던 일을 증언했다.
그와 동행한 상급 성기사들은 그것이 라리사 모어의 의뢰였다는 말과 함께 그 증거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신을 제출했다.
"저 여자는 대신관과 손을 잡고 신전의 성기사들을 사냥개처럼 썼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라리사 모어가 신전의 힘을 빌려 저지른 온갖 비리와 악행이 쏟아졌다.
성녀와 신관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들이 파악한 것보다 더 악행의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마지막 증인입니다."
잠깐 박으로 나갔던 이블린이 한 증인과 함께 돌아 왔다. 얼굴에 마치 회초리로 내려친 것 같은 큰 흉터가 있는 여자였다.
“너, 네가 어떻게······!"
그동안 뻔뻔한 얼굴로 증언을 듣고 있던 라리사가 처음으로 크게 동요했다. 여자는 바로 라리사를 모시던 시녀였다.
"저는 카스티야 왕이 라리사 클라멘스에게 하사한 시녀 그레이스입니다. 지금까지 라리사 클라멘스의 시중들며 수많은 악행에 협조했습니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이 알고 있는 라리사의 악행을 증언했다.
이블린을 죽이려 몇 번이나 손을 썼던 일, 거짓말과 이간질로 가문 사이에 싸움을 붙인 것, 다른 가문에서 시녀로 보내진 여자들을 폭행으로 죽인 다음 사고로 위장한 것까지.
“아니, 세상에······."
“그럼 그때 그 일이 저 여자의 짓이었다고?"
사람들은 지금껏 단순히 불행이라 생각했던 일들에 라리사 모어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닥쳐! 이 천한 것! 흉측한 너를 계속 시녀로 써 준 은혜도 모르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라리사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지금껏 제게 꼼 짝도 못 하고 당해 왔던 이가 반기를 든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불행히도 저는 그녀의 폭력에 완전히 길들여진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습니다. 엘마이어 공작 부인께서 제게 손을 내밀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용기를 내지도 못했을 겁니다.”
담담하던 그레이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공작 부인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제게 어떤 처분이 내려지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녀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모두의 시선이 라리사 모어에게 쏠렸다. 라리사가 이블린에게 선사하려 했던 경멸과 멸시 어린 눈빛이었다.
"웃기지 마. 너희가 멋대로 조작한 증인과 증거 따위 난 절대 인정할 수 없으니까!"
회담장 안에서 저지른 일만으로도 사형은 확정이었다. 그렇기에 라리사는 나머지 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그때 앞으로 나선 이블린이 왼손에 끼고 있던 은반지를 빼냈다. 과거에 왕이 보고를 통과한 상으로 내린, ‘단 한 번, 국익보다 네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겠다,'고 약속한 반지였다. 이블린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왕에게 반지를 바쳤다.
“폐하, 제 목숨을 걸고 간청 드립니다. 폐하의 신기인 제왕의 반지를 라리사 모어에게 써 주십시오.”
왕이 ‘제왕의 반지’의 주인이라는 추측은 즉위 초기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다.
왕은 자신이 신기 선택자라고 인정하지도, 그간 신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로서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네 녀석 때문에 내 밑천이 다 털리는구나."
왕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써 주마 무엇을 알고 싶으냐."
“11년 전, 공작 자문의 별채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한 진실을 원합니다."
뜻밖의 말에 세스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왕 역시 속으로 탄식했다.
‘확실히 그날의 일이라면 증인을 구할 수 없었겠지.'
세스 누명을 벗겨 주기 위해 고민하다 결국 반지를 사용할 생각을 했을 이블린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제 목숨을 구할 구명줄을 세스를 위해 내던진 건가.'
이블린이 바친 은반지를 꽉 움켜쥔 왕이 라리사 모어를 돌아봤다.
"들었느냐? 라리사 모어. 당장 그날의 진실을 말해라."
"안 돼! 싫어! 주인님, 도와주세요!"
새파랗게 질린 라리사 모어가 기듯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신기의 힘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그 녀의 입이 열렸다.
“그건 사고였어! 그냥 사고였다고! 마거릿, 그 계집애의 잘못이야. 더러운 계집애. 멍청한 것!"
"네가 불을 지른 게 아니었다는 거냐?"
"난 그 계집애를 좀 혼내 주려고 방에 들어갔을 뿐이야. 마거릿을 교육시키는 것은 내 몫이었으니까."
라리사의 입에서 그날의 진실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계속된 폭행으로 마거릿이 무서워서 세스가 준 인형에 매달린 것, 그래서 본보기로 인형을 불에 태운 것, 하지만 인형을 벽난로에서 꺼낸 마거릿 때문에 불이 사방에 옮겨붙은 것까지.
“그래서 죽이기로 했어. 사실 난 그 멍청한 계집애를 늘 죽이고 싶었지. 죽으라고 계단에서 민적도 있는데 끈질기게 살아남더군. 그래서 이번엔 부지깽이로 죽을 때까지 내리친 후에 문을 잠그고 빠져나왔지. 멍청한 형제들이 시체를 구하겠다고 설치다가 죽어 갈 때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라리사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케인이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펑펑 울었다.
“어떻게! 감히 어떻게 그런 짓을!"
같은 내용의 연극을 봤을 때는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라리사가 제 입으로 떠드는 진실을 듣자 피가 거꾸로 도는 듯했다.
반면 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을 본 라리사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 세스 엘마이어! 나는 널 공작으로 만들어 준 사람이야! 평생 모자란 동생을 돌보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준 사람이라고! 너만은 나를·······.”
퍽 소리와 함께 라리사의 머리에 부딪친 꽃병이 산산조각 났다. 픽 꼬꾸라지는 라리사를 내려다본 이블린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비싼 빵 먹고 왜 헛소리를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