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라리사는 회담장의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봤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케인과 나란히 앉아 있는 이블린에게 머물렀다. 아쉽게도 세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스 엘마이어의 앞에서 이블린을 망가뜨리고 싶었는데.’
아쉬움에 혀를 찬 라리사는 분노로 일그러진 왕과 눈을 마주했다. 왕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평화 회담의 참석자는 각국의 지도자와 대영주들, 그리고 외교 책임자들로 제한되어 있었다.
라리사 모어가 허락도 없이 회담장에 난입한 것은 당장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중죄였다.
"회담 중에 불청객이 끼어들다니, 태양 궁의 경비가 이렇게 허술한지 처음 알았군!"
로엔 공왕이 기다렸다는 듯이 빈정거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왕이 소리쳤다.
"왕실 수호 기사들은 무얼 하는가! 당장 저 뻔뻔한 것을 끌어내라!"
하지만 왕의 호통에도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심상찮은 상황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보다 못한 근위대장이 손수 라리사를 붙잡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자 라리사가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그를 막아!”
다음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근위 기시들이 나타나 근위대장을 덮친 것이다. 미처 방어하지 못한 근위대 장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부하들의 배신에 놀란 근위대장이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인형처럼 무표정해진 기사들은 그를 찍어 누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미친 사람처럼 깔깔 옷은 라리사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와 동시에 스르릉 칼을 빼 드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피오나?"
왕은 눈을 부릅뜨고 제 목에 단검을 들이댄 시녀장을 바라봤다. 절대 배신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사람이 제게 칼을 겨눈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성녀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은 그녀의 열렬한 추종자인 마리노 사제였고, 나바르의 태자 내외 역시 최측근들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인질로 붙잡히지 않은 공왕은 어깨를 움츠린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 마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근위대장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라리사가 즐겁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들에게 주인님의 노예가 되는 영광을 주었지. 마침 시녀장과 마주쳐서 사로잡기도 쉬웠어."
제일 먼저 시녀장인 피오나를 노예로 만든 다음,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다는 말로 각국의 측근들을 불러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손쉬운 작업이었다.
"네 주인이 누구기에 이따위 짓을 한단 말인가!"
“이러고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분노하는 귀족들을 향해 코웃음을 친 리사가 슥 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노예가 된 측근들이 단검을 인질의 목에 바짝 들이댔다. 왕의 목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본 귀족들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제일 먼저 상황을 파악한 나바르 태자가 날카롭게 내뱉었다.
“네놈, 카스티야의 끄나풀이냐?"
"흥, 함부로 지껄이지 마. 나는 그분의 오른팔이자 미래의 반려니까!"
몸을 핵 돌린 라리사가 러셀 백작과 우르스 변경백을 노려봤다.
“내가 공격당하는 순간 인질은 죽게 된다. 나를 죽인다고 해도 노예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일온 없으니 꿈 깨시지!"
반격할 기회를 노리던 두 사람이 멈칫했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성녀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요. 카스티야 왕의 힘은 신관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7년 전쟁 때는 그랬지 주인님의 힘이 다소 약했으니까. 신성력이 있는 자들은 지배하지 못했고, 이번처럼 한 번에 많은 노예들을 만들 수도 없었어."
라리사는 대영주들 사이에 멀뚱멀뚱 앉아 있는 이블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블린 엘마이어, 저 여자가 주인님께 제물을 바치며 모든 것이 달라졌지.”
모두의 시선이 이블린에게 쏠렸다. 이블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 켰다.
“나?”
“그래, 네가 바친 대지신의 신관들 그들을 제물로 삼은 주인님께서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얻게 되셨지. 전부 네 덕분이야.”
이블린이 카스티야에 보낸 것은 대지선의 저주를 받은 시체들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블린이 카스티야와 내통한 것처럼 들렸다.
“당신들이 이런 꼴이 된 것도 전부 이블린 때문이라는 뜻이지.”
“헛소리!”
교활하게 이간질하는 목소리를 왕이 딱 잘라 냈다.
라리사는 그런 왕을 향해 히죽거렸다
"솔직히 말해 봐. 국왕 폐하, 당신도 알고 있었지? 이블린 엘마이어가 사실 천한 노예라는 걸 말이야.”
왕은 입을 꾹 다물고 라리사를 노려봤다. 그 모습에 대영주들 사이에서 용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 이름은 이블린 그란. 속국인 티론에서 팔려 온 노예. 그것도 반역죄로 노예가 된 비천한 혈통이지.”
라리사는 사람들의 반응을 줄기며 말을 이었다.
"속국의 노예가 신분을 숨기고 공작 부인이 되다니. 무슨 죄를 물어야 하지? 군주를 기망했으니 반역죄? 아니면 귀족 사칭죄? 다행히 둘 다 사형이군!"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프림로즈의 후계자인 마리아였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노예라고 말하면 사실이 되는 건가? 그럼 당신을 ‘천한 시녀가 누군지도 모를 놈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고 불러도 되겠군?"
“너!"
제 출신을 비꼬는 말에 분노한 라리사가 마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철썩 소리와 함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마리아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왜? 정곡을 찔렀나?"
"감히!”
마리아의 빈정거림에 까드득 이를 간 라리사가 두루마리를 꺼내서 던졌다.
"똑똑히 봐 고귀하신 공작 부인이 고작 은화 몇 푼에 팔리셨다는 기록이니까.”
“이따위 쓰레기, 나는 백 장도 더 만들 수 있어.”
마리아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것을 탁 쳐 냈다.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라리사가 왕을 돌아봤다.
“그래? 그럼 국왕 폐하의 말이라면 믿겠지? 어떠신 가요, 폐하?"
"······."
“이블린이 노예라는 것을 알면서도 공작 부인이 되는 걸 허락하셨나요? 아니면 전혀 모르셨나요?"
교묘한 함정이 숨겨진 말이었다. 왕이 부정의 대답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이블린의 죄는 확정되니까.
오만하게 고개를 쳐든 왕이 답했다.
“그래, 짐은 알고 있었다."
“폐, 폐하!"
당황한 신하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왕이 세스 엘마이어를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아내로 노예를 짝지어 주다니.
"들으셨죠? 폐하께선 노예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를 미래의 왕으로 만들려고 하신 거랍니다."
왕은 이블린이 대역이라고 구구절절 말하는 대선 조용히 라리사를 노려봤다. 이어서 라리사는 케인을 향해 빈정거렸다.
"당신도 참 안됐네. 딸인 대신 선택한 며느리가 천한노예라니.“
"상관없다!"
케인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블린은 이애는 며느리가 아니라 내 딸이야! 누가 감히 내 딸을 노예라 멸시한단 말이냐! 하물며 사형 이라니,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엔 절대 용납 못 한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변경백 우르스가 입을 열었다.
"북부를 대표해서 선언하오. 엘마이어 공작 부인은 북부의 은인이며 구원자요. 그분을 적으로 돌리는 자는 북부의 적이 될 것이오!"
이어서 마리아 프림로즈가 차갑게 내뱉었다.
“프림로즈 역시 엘마이어 공작 부인과 함께합니다."
회담에 참석한 영주들도 한마디씩 보랬다.
“프림로즈에게 선수를 빼앗겼군. 러셀 가문은 영원히 이블린 엘마이어의 우군이오."
"채스터 가문도 엘마이어 공작 부인을 지지하오.”
“이든 가문은 친구를 버리지 않소.”
“모티머 가문도 이들과 함께하겠소.”
끝없이 이어지는 선언에 라리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정신이야? 노예 따위를! 천한 노예를 공작 부인으로 인정하겠다고?!"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이블린은 경멸과 멸시를 받으며 사람들을 속인 악녀 취급을 받아야 했다. 모든 것이 밝혀진 뒤에도 이렇게 인정받아서는 안 됐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라리사의 얼굴을 본 나바르의 태자가 마치 약 올리듯 말했다.
“정말 아깝군. 아스트리아에서 우리 처제를 버리면 내가 바로 주워 가려고 했는데.”
태자비가 상황도 잊고 그의 허벅지를 찰싹 내리쳤다. 그러자 태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오해한 것 아니지? 내 아내는 당신뿐이야. 후궁에 당신 외의 여자를 들일 생각은 없다고 했잖아.”
“닥쳐! 닥쳐! 닥치라고! 이 멍청하고 천박한 것들!"
라리사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핏발이 선 눈을 번들거리는 모습은 어떻게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갑자기 하하 웃기 시작했다.
"주인님께선 너희를 인질로 끌고 오라고 하셨지만, 마음이 바뀌었어.”
라리사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네 나라의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죽으면 대륙 전체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 원흉인 이블린이 원망 받겠지.
“이블린이 그렇게 좋으면 이블린과 함께 죽어 버려!"
“그건 좀 곤란한데?"
명랑한 목소리에 핵 돌아본 라리사는 하얀 뭔가가 제 얼굴로 날아드는 걸 발견했다. 피할 틈도 없이 그것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빡!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휘청거리다 옆으로 쓰러진 라리사는 바닥에 툭 떨어지는 하얀 벽돌을 볼 수 있었다.
“아, 진짜 기다리다 지겨워서 죽는 줄 알았네.”
그녀에게 벽돌을 냅다 집어 던진 이블린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너……!"
라리사는 어이가 없었다. 벽돌이라니, 남의 얼굴에 벽돌을 집어 던지다니. 저잣거리의 천민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감히, 감히 내 얼굴에 손을 대?!"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충격 때문인지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벽돌에 맞은 곳은 아예 감각이 사라 졌다.
무심결에 손을 대자 코가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코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뭘 준비했나 기대했더니, 인질 붙잡고 ‘잰 노예니까 빨리 밉다고 말해!'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게 전부야? 정말 쓸데없이 창의적이긴 했다."
“넌 인질의 목숨이 중요하지도 않은 모양이지?!"
라리사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한 이블린이 씨익 웃었다.
“인질?“
순간 섬뜩함을 느낀 라리사가 재빨리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왕의 옆에 서 있는 세스를 발견했다.
성녀도, 나바르의 태자 내외도 그림자 기사들에게 구출된 뒤였다. 어느새 제정신으로 돌아온 피오나와 측근들은 그녀를 찢어 죽일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짠, 인질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네 주인이 마을 단위로 사람들을 움석움석 먹어 치우고 다니는데, 이쪽에서 아무런 대비도 안 할 줄 알았어? 너 진짜바보지?"
라리사는 분노에 부득 이룰 갈면서도 주인을 위해 정보를 뜯어내려 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노예들을 해방시켰지?"
주인에게 영혼을 빼앗긴 자들은 절대 원래대로 돌아 올 수 없었다. 라리사 역시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블린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그냥 벽돌로 머리를 내리찍으니까 제정신으로 돌아오던데?"
"······."
"더 이상 할 말 없지?"
히죽 옷은 이블린이 팔을 붕붕 돌렸다.
“예, 재미없는 인질극 잘 봤습니다. 제 점수는요.”
뻐억 소리가 날 정도로 라리사의 얼굴을 후려갈긴 이블린이 싸늘한 얼굴로 선언했다.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