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친애하는 아서 경, 당신을 용원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레이디. 메그를 보고 당신의 억울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은 누구보다 용감하고……."
민망함에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던 세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비, 이건 내게 보낸 편지가 아니잖아.”
“아뇨, 세스에게 보낸 편지예요. 부르는 이름만 아서 일 뿐이죠. 전부 당선을 응원한다고, 앞으로도 용기를 잃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에요."
〈레이디 메그〉에 나오는 ‘아서’는 분명 그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세스는 아서 같은 단호함과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어.”
“왜요?“
"원수를 갚지 못하고 미뤄 뒀을 뿐이니까.”
“그건 사람들도 알고 있어요. 라라가 아직 살아 있잖아요. 그들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당신을 응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세스는 멍하게 바구니에 담긴 편지를 바라봤다. 보고 있어도 왠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가 내려 둔 편지를 집어 든 이블린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당신은 누구보다 용감하고 고결한 기사입니다. 저도 아서 경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을 정도로요. 그리고 신께서는 당신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절대 용기를 잃지 마세요. 당신의 친구, 이네스턴의 다니엘이."
“······.”
세스는 이블린을 꼭 끌어안았다. 어쩐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고 응원하고 있어요. 그건 원래 당신이 누려야 할 것을 돌려받은 것뿐이니까, 자격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이블린이 장난스럽게 그의 가슴을 토닥였다.
“그리고 당신도 스스로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세스 엘마이어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세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비, 내가 나를 좋아하려면 당신이 있어야 해.”
"저요?"
“나는 내 자신이 싫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나는 조금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니까."
그러니 떠나지 말라는 애원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뻔뻔해서였다. 대신 약속의 말을 입에 담았다.
"당신이 내 옆에 있는 동안은 나 자신을 좋아하려고 노력할게."
동그란 눈을 깜빡이던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 탓인가 왜 세스가 어리광 부리는 것 같죠?"
“기분 탓이야."
뻔뻔한 대답에 키득키득 웃은 이블린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흠,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우리 어리광쟁이 남편님 옆에 꼭 붙어 있을 수밖에."
”······응."
세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블린이 이별을 암시하지 않고 그의 옆에 있겠다고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는 습관처럼 기대를 억눌렀다. 별생각 없이 한 말에 크게 의미를 둬선 안 된다. 그래도 이블린이 전보다 마음을 열어 준 것 같아서 기랬다.
“세스, 나중에 아서의 집에 가 볼래요?"
“아서의 집?"
뜬금없는 말에 되묻자 고개를 든 이블린이 개구쟁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레이디 메그를 공연하기 전에 적당한 곳에 작은 집을 구해 놨어요. 유서 깊으면서도 허름하고 왠지 사연이 있어 보이는 건물로요.”
라라에게 분풀이하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아서를 응원하고 싶은 사람도 많을 테니까. 소문을 듣고 언제든 찾아올 수 있도록 아서의 집을 만든 것이었다.
“내부는 신앙심 깊은 기사가 검소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꾸몄어요. 그리고 손님이 찾아오면 아서 경의 시종이 아주 점잖게 말하는 거죠. ‘주인님은 아직 순례 중이십니다 편지를 남겨 주시면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대필도 가능합니다.’ 하고요.”
시종의 말투까지 그럴듯하게 흉내 낸 이블린이 그를 바라봤다. 그가 기뻐하는지 알고 싶은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신께서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 모아서 그녀를 빚으신 것 같았다.
세스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움찔한 이블린이 부끄러운 듯 손을 꼼지락거렸다.
“고마워, 정말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이야."
그는 사랑하는 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지금의 행복이 계속되길 빌었다.
신께서 자비로우시다면, 제발 그녀를 내게서 빼앗아 가지 마시기를.
* * *
새해가 바뀌고 얼마 뒤,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이 아스트리아에 도착했다.
평화 회담을 위해 각국의 지도자들이 방문한 것이다.
제일 먼저 수도에 입성한 로엔 공왕은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구경이라도 나온 건가?"
그는 공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새로 뽑은 창공 기사단을 무장시켜 데려왔다. 희고 푸른 깃발을 휘날리며 행진하는 기시들의 모습에 절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리핀들을 데려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도망친 그리핀 대신 야생 그리핀을 포획했으나,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아서 데려올 수가 없었다. 귀중한 그리핀을 아스트리아에 모조리 뺏긴 것을 떠 올리자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이 빚은 꼭 갚아 주마.'
부드득 이를 간 공왕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공국의 위엄에 압도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음악은 안 나오지?"
“그냥 기시들만 온 거야? 코끼리도 없이?"
"뭐야, 공국의 기사들이 엄청 대단하다고 해서 기대 했는데, 엄청 초라하잖아.”
하지만 공왕의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실망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호롤롤로 왕자의 행진, 레이디 메그 공연, 새해 축하 선물 나눔 같은 빅이벤트에 길들여진 수도의 시민들은 눈이 한껏 높아진 상태 였다.
그런데 외국의 높으신 분이 음악도, 특수 효과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이벤트도 없이 등장하자 절로 불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이것들이 감히!'
뒤늦게 웅성거림의 정체를 알아챈 공왕이 버럭 화를 내려는 순간이었다.
-데에엥!
웅장한 종소리가 신성 왕국의 도착을 알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공왕은 하얀 소의 등에 탄 성녀를 발견했다.
성녀는 성관을 쓰고 성복을 걸쳐 화려함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녀의 뒤로 순백의 옷을 입은 신관들이 성가를 부르며 전진했다. 그들을 호위하는 성기 사들의 갑옷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번쩍 빛났다.
조금 전까지 옹성거리던 사람들이 서둘러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게 있던 공왕이 흰 소를 타고 다가오는 성녀를 맞이했다.
“하도 화려해서 눈이 머는 줄 알았소. 여기서 대지신의 대제사라도 열리오?"
비꼼이 가독 담긴 그의 말에 성녀가 온화하게 웃었다.
"차기 성녀가 미리 귀띔해 주었습니다. 최대한 화려하게 등장하지 않으면, 아스트리아의 시민들에게 무시당할 거라고요.”
그녀의 말대로 조금 전까지 무시당하고 있었던 공왕이 입을 다물었다. 성녀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물었다.
“이곳에 공국의 신기 선택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에게서 아무런 충고도 듣지 못하셨는지요?"
"······."
빛의 창의 주인인 말라크는 이미 신분 세탁을 하고 아스트리에 정착한 지 오래였다.
공왕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성녀는 소를 재촉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먼저 가도록 하겠습니다. 길을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 싸움에서 승리한 성녀의 행렬이 공국의 대열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허 참.”
어이가 없어서 계속 헛웃음을 짓던 공왕은 부루퉁한 얼굴로 행렬의 뒤를 따랐다. 알게 모르게 기가 죽은 기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들이 왕궁-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뒤에서 둥둥거리는 요란한 음악이 쫓아왔다.
이게 뭔가 하고 돌아본 공왕은 낙타 무리와 댄서들을 이끌고 등장한 나바르 태자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오, 다들 먼저 와 있었군! 반갑습니다!"
태자의 뒤로 꽃가마를 타고 따라오던 태자비가 베일을 고쳐 썼다. 기분 탓인지 좀 창피해하는 것 같았다.
태자까지 무리에 합류한 순간, 기다렸다는 것처럼 문이 열리며 군악대가 쏟아져 나왔다.
‘이놈의 나라는 악기를 불지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건가?'
공왕의 의혹 어린 시선 속에서 멋진 행진을 보여 준 군악대가 양쪽으로 나눠 섰다.
이어서 왕이 대신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대신들의 눈은 의혹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왜, 왜 이렇게 얌전하게 끝났지?'
‘이럴 리가 없는데?'
‘당황하지 말자. 이건 공작 부인의 함정이야.'
의장대의 행진으로 너무 간단하게 끝난 손님맞이에 그들은 약간의 공포마저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블린이 손댄 것은 축하 행사뿐이었지만, 대신들은 그것까진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축하 행사 때 터트리려고 힘을 모으고 있는 모양이군.’
‘행사장에 뭘 준비했을지 무섭다.'
새파랗게 질린 대신들과 달리 왕은 여위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았소. 아스트리아는 여러분을 환영하오.”
성녀도, 태자 내외도, 공왕도 예에 맞게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오랫동안 굶아 온 것들을 마무리 지을 평화 회담의 막이 올랐다.
* * *
왕궁의 정문을 지키던 기시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마차를 발견했다.
아무 문장도 없이 검기만 한 마차는 마치 장례 행렬을 떠올리게 했다. 마차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도 기묘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오싹함을 느낀 기사들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마차를 멈추십시오!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혀야 입장할 수 있습니다!"
기사들의 외침에 마차가 정문 앞에 정지했다. 그리고 낯선 중년의 남자가 창을 통해 얼굴을 드러냈다.
"주인이 제집을 방문하는데도 목적을 밝혀야 하느냐? 당장 문을 열어라.”
“예? 그게 무슨……?"
의혹 어린 얼굴로 되묻던 기사들의 눈이 갑자기 멍해졌다. 인형처럼 무표정해진 그들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정문을 활짝 열었다.
마차는 물 흐르듯 안으로 들어갔다. 중년 남자와 함께 마차에 타고 있던 라리사 모어가 활짝 웃었다.
"주인님께서 저와 함께와 주시니 이보다 더 든든할 수는 없네요. 정말 감사드려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를 회담장까지 데려다주는 것뿐이다 내 노예들이 너를 돕겠지만, 그래도 모든 것은 네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알고 있어요, 주인님.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반드시 이블린과 세스 엘마이어를 짓밟아 나락으로 떨어뜨리겠습니다."
중년 남자의 탈을 쓴 그것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최선을 다해라 후회가 남지 않도록"
* * *
평화 회담은 그 이름대로 무척 평화롭게 흘러갔다.
준비된 처소에서 몸을 씻고 휴식을 취한 손님들은 간단한 요기를 마치고 회담장으로 이동했다.
“아스트리아의 이름으로 평화 회담을 열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오. 오늘 우리의 만남은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오.”
아스트리아왕의 연설과 함께 본격적인 회담의 막이 올랐다.
분위기는 밝고 가벼웠다. 다들 부담 없는 내용들만 입에 올렸다. 그리고 공왕은 언제 그리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좋아, 성녀가 사도궁 재건설 이야기를 끝내면 바로 치고 들어가는 거다.’
하지만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예고도 없이 벌컥 문이 열리며 라리사 모어가 오만한 얼굴로 등장했다.
“이런 제가 많이 늦은 모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