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자네가 용서를 빌지 않고 계속 미루면 지금보다 더 심하게 미움받을 걸세.”
단순히 미움받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었다. 이블린이라면 케인을 산 채로 갈아 버릴지도 모른다.
생글생글 웃으며 왜 내 남편이 괴롭힘 당할 때는 그 말을 하지 않았냐고 묻는 눈이 얼마나 무섭던지. 한평생 단련된 혀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였다.
“미, 미움받는 거 싫어…….”
타들어 가는 레너드의 속도 모르고 웅얼거린 케인이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썼다. 레너드는 이불을 확 끌어내렸다.
"레너드, 너무 강요하지 말게. 용서를 비는 것은 진심으로 해야 하지 않는가."
남들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재무 차관 노리스가 물렁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레너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들이 자꾸 그러니까 저 멍청이가 아직까지 혓소리를 늘어놓는 거야!"
"마, 말이 좀 심하군.”
"버티, 상황 판단이 안 되면 좀 닥치게. 공작 부인은 케인의 삶을 통째로 지옥으로 만들고도 남을 여자야!"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탑을 살짝 밀어 원수들을 깔아뭉개는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그 집요함과 대범함,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수법, 막대한 돈과 인력을 퍼부을 수 있는 능력까지.
이블린은 절대 적으로 삼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자네들이 조금이라도 케인을 아낀다면 당장 아들 의 앞에 무릎을 꿇리고 매를 치게. 그럼 조금이라도 편하게 여생을 살지 않겠나."
레너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휘몰아치는 복수 속에서 케인을 건져 내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케인, 어서 일어나게."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버티가 케인의 멱살을 잡아 침대에서 끌어냈다. 노리스와 수석 재판관 빌러드도 케인의 등을 떠밀었다.
“자, 잠깐! 아직 나는 마음의 준비가……!"
“준비는 가면서 하세. 서둘러!"
친구들에게 양팔이 붙잡힌 케인은 세스 집무실로 질질 끌려갔다. 하지만 공작님께선 지금 마님이 계신 별궁에 계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결국 케인은 잠옷 차림으로 별궁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별궁 앞에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과 그리핀 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 이블린이 무어라 열심히 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하필 때가 안 좋군.’
딱 봐도 끼어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레너드는 혀를 차며 케인을 놓아주었다.
-구르르르?
-구록구르르!
그때 케인의 냄새를 맡은 그리핀들이 일제히 호기심을 보였다. 질겁한 케인은 얼른 친구들의 뒤로 숨었다.
잠시 뒤 박수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사람들이 그리핀을 타고 훌쩍 날아올랐다. 그들의 선두엔 승리의 신처럼 이블린이 있었다.
“이런, 텄군."
무엇을 발견했는지 버티가 혀를 찼다. 빌러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가 텄단 말인가? 마침 공작 부인이 자리를 비웠으니 그 틈을 타 세스를 만나서 용서를 빌면 되지 않나?"
“세스가 방금 떠난 사람들 사이에 있었네."
“뭐? 안보였는데?"
“이유는 모르지만 평기사 차림을 하고 있더군.”
이블린과 세스가 자리를 비웠으니, 오늘 용서를 비는 것은 무리였다. 레너드와 친구들은 할 수 없이 케인 올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했다.
* * *
다프네의 오빠인 나일 빌러스는 요즘 매우 스펙터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생의 손에 팔려 와 ‘렌탈 나이트 1호’가 된 그는 코끼리를 물거나, 암살자 옷을 입고 춤을 추거나, 그리핀을 타고 경주를 하는 등의 몹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크나큰 고난과 역경을 맞닥뜨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광장에서 선물을 나눠 주는 날이었다.
"분명 괴롭고 힘들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을 위해 크게 한턱 쏘겠습니다!"
”와아아!”
이블린의 연설이 끝나자, 백화점과 상점에서 손을 보태러 온 점원들이 열렬히 박수를 쳤다. 반면 기시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냥 선물 나눠 주는 것 아냐? 왜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인지 도통 모르겠네.”
나일 역시 영문을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블린은 절대 반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괴롭고 힘들다고 하면 정말 죽을 만큼 괴롭고 힘든 거였다.
“자, 그럼 출발!"
이블린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모든 그리핀들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들은 순식간에 하늘을 가로질러 광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왜 이블린이 그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는지, 왜 그리핀에 실어서 납치하듯 데려왔는지.
광장 전체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아이와 부모들이 바다처럼 물결치며 선물을 나눠 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 솟은 나무가 작아 보이게 만드는 선물 더미는 도 어떤가. 작은 산 같은 선물들을 보자 갑자기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나,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지?'
자신을 공작가에 팔아넘긴 동생의 얼굴이 눈앞에 가물거리다 사라졌다.
"마님! 기다렸습니다!“
"도, 도와주세요!"
미리 도착해서 온몸으로 사람들을 막고 있던 금사자 기시들이 애절하게 도움을 청했다. 선두에서 그리핀들을 이끌던 이블린이 손을 들었다.
“하강합니다!"
"악!"
왠지 비명처럼 들리는 대답과 함께 모두가 착륙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흥분해서 앞으로 달려들었다.
”와아아!"
마지막까지 버티던 금사자 기시들이 무너지면서 땅이 쿵쿵 흔들렸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의 기세는 기마대의 돌격만큼 위협적이었다.
"바, 방어 진형 갖춰!"
"창! 창이나 방패! 아무거나!"
겁먹은 기사들이 뻑뻑 소리를 질렀다. 그때 허둥거리는 그들의 앞으로 나선 이블린이 품에서 꺼낸 종을 흔들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조그마한 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광장 가운데 우둑 선 나무가 종소리에 공명하듯 우웅우웅 몸을 떨기 시작했다. 진동을 느낀 사람들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어서 이블린이 손짓하자 사방으로 나눠 선 점원들 이 화살표 모양의 표지판을 높게 들어 올렸다.
"선착순입니다! 자, 줄을 서시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제자리에 멈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사삭 나눠서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들은 입을 떡 벌리고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사람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킨 이블린은 태연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여러분, 빨리 상자를 나릅니다! 실시!"
정신을 차린 기사들은 허둥지둥 상자로 달려갔다. 그러던 중 나일은 처음 보는 은발의 기사가 묵묵히 상자를 옮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지? 왠지 낯이 익은데?'
의아해하던 그는 이내 사방에서 들려오는 재촉하는 목소리에 걸음을 서둘렀다.
* * *
정오에 시작된 선물 나눔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마무리가 되어 갔다.
마법사들이 설치한 조명이 환한 빛을 뽐을 때에야 일을 마치고 달려온 부모는 아직 남아 있는 선물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저희 아이도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우리 어린이 친구, 이쪽으로 오세요."
상냥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한 이블린은 아이의 손등에 도장을 콩 찍어 주었다.
“이건 요정 나무의 축복이에요. 앞으로도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세요."
“우와! 감사합니다!"
황금색으로 반짝거리는 손등을 본 아이가 신이 나서 외쳤다. 이블린은 손등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신기해하는 아이에게 커다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올해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길 빌어요."
“······!”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쁜 포장지로 감싸고 커다란 리본을 단 선물을 받았다. 문화적인 충격에 잠시 굳어 있던 아이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저, 정말 받아도 돼요?"
“그럼요.”
아이는 간신히 용기를 내어 선물을 끌어안았다. 눈물까지 글썽이던 아이가 꾸벅 절을 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달려가 환한 얼굴로 상자를 내밀었다.
"엄마! 이거 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를 끌어안은 부모가 몇 번이냐 인사를 한 다음 돌아갔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을 마지막으로 더는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끄, 끝났다으아아!"
"만쉐이이이!"
끝까지 버티고 있던 기사들이 그제야 풀썩 주저앉았다. 다른 이들도 모두 지친 얼굴이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끝난 것은 전부 여러분의 덕이에요."
유독 생생한 이블린이 열심히 일한 이들을 칭찬했다.
“뒷정리를 맡은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휴식하다가 돌아갑시다. 참, 뒤풀이 파티가 준비되어 있으니 잊지 말고 참석해 주세요."
”와아아!”
파티라는 말에 사람들은 언제 시들거렸나는 듯 되살아났다.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떠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세스가 나무 상자에 걸터앉았다. 작은 기척과 함께 다가온 이블린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세스, 옆에 앉아도 돼요?"
“당연하지."
“지금은 공작님이 아니라 낯선 기사님이잖아요."
“별다른 의미는 없어. 일하는 사람들을 신경 쓰게 하지 않고 돕고 싶었을 뿐이야."
“그럼 저도 신경 쓰지 않고 기사님이랑 바람피울래요.”
이블린이 용석을 부리듯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를 끌어안은 세스 놀라 나자빠지는 렌탈 나이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오늘 많이 힘들었죠?"
이블린이 그의 어깨를 조물조물 주무르며 속삭였다. 세스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아서 멈추게 했다.
“나보다는 당신이 힘들었지."
"저야 자업자득이니까요."
“나는 즐거웠어. 무척이나.”
곰 인형을 안고 기뻐하는 아이의 얼굴, 그런 아이의 뺨을 쓰다듬는 부모의 미소. 그들의 행복 한 조각을 나눠 받은 것처럼 가슴이 따뜻했다.
“이런 감정도 당신이 아니었다면 느낄 수 없었을 거야.”
이전의 세스 벌레가 갉아먹어 속이 텅 빈 나무 같았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봐도 느껴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텅 빈 공간에 어느 날 이블린이 들어와 자리 잡았다. 그때서야 그는 겨우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고마워, 이비. 내 앞에 나타나 줘서.”
"어······.“
이블린이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스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굴리던 이블린이 속삭였다.
“사실 세스 선물도 준비했는데, 주기도 전에 고맙다는 말을 들어서 놀랐어요.”
"선물? 나한데?"
"잠깐만 기다려요.”
그의 품을 벗어난 이블린이 후다닥 어디론가 달려갔다. 세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블린이 품을 빠져나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싫다고 붙잡을 뻔했다.
‘정신 차려라 세스 엘마이어.'
더 이상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여기서 더 애정을 달라고 요구하면 이블린에게 부담을 주게 된다.
‘그녀는 나와 닿을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경 쓰고 있는데…….’
지금의 관계는 그가 애원해서 붙잡고 있는 거였다. 욕심을 부리다간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스스로를 매섭게 꾸짖은 그는 이블린이 돌아왔을 땐 평온한 표정을 연기할 수 있었다.
“자, 선물이에요.”
환한 얼굴로 다가온 이블린이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 속에는 편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세스에게 온 편지예요. 어서 읽어 봐요.”
얼떨떨한 기분으로 봉투를 뜯은 세스는 기대감이 가득 담긴 이블린의 시선을 느끼며 편지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