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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13화 (213/240)

213화

”라리사는 무사한가?"

“예, 처음엔 불안해하셨지만 이젠 안정되신 것 같습니다. 지금 방에 계십니다.”

시녀는 방으로 안내하겠다며 앞서 걸어갔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조슈아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저, 정신 차려. 라리사를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혀끝을 깨물자 따끔한 아픔에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조슈아는 엉망이 된 저택의 내부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나 엉망이 되었는데, 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지?"

"라리사 님이 이곳을 떠나는 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녀의 대답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라리사가 이곳에 남은 것은 자신이 구하러 오기를 기다려서가 아닐까?

용기가 생긴 조슈아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힐끗 돌아본 시녀가 방문에 노크했다. 그러자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낙서를 다 지우기 전엔 돌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손님이 오셨습니다. 클라멘스 백작님이십니다.”

잠시 침목이 흘렀다. 조슈아가 초조해질 무렵에야 겨우 대답이 돌아왔다.

"들여보내.“

시녀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조슈아는 조금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라리사?”

방 안은 복도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다.

모든 물건이 박살나고 흐트러진 가운데, 라리사는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에 종이 뭉치 같은 것을 던져 넣고 있었다.

“뭐, 뭘 하고 있는 겁니까?"

"······.“

라리사가 휑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항상 천사 같던 얼굴이 엉망이었다. 눈 밑은 검게 그늘지고 입술은 허옇게 들떴다. 초췌하게 마른 얼굴은 전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는 조슈아에게 라리사가 들고 있던 것을 던졌다. 고급스러운 편지지들이 부서진 물건들 위에 새처럼 내려앉았다.

“이건······."

제 발 앞에 떨어진 편지를 집어 읽은 조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거기엔 라리사와의 관계를 끊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때는 라리사의 앞에 엎드려 꼬리나 흔들던 귀족들이 일제히 절연장을 보낸 것이다.

한마디로 사교계에서 매장 당했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이런 잔인한 짓을……!"

사실을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한마디 변명조차 들어 주지 않고 관계를 잘라 버리다니. 우두커니 서 있는 라리사가 너무 가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지켜 주겠습니다.”

"······뭐?"

손을 내미는 조슈아를 본 라리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날 지켜? 지킨다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라, 라리사?"

“착각하지 마. 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저따위 하등한 것들이 나와 관계를 끊는다고 해서 내가 무너질 것 같냐고!"

“지, 진정해요. 당신 지금 너무 흥분했습니다."

필사적으로 손을 내젓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라리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진정했다고 생각한 조슈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요. 거기라면 당신을 괴롭힐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

"차라리 남쪽으로 여행을 떠날까요? 나사우 공국에 있는 별장에서 머무는 건 어떻습니까. 분명 기분 전환이 될 겁니다."

라리사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설득하려는 조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기묘한 광기가 어렸다.

“아, 멍청하고 한심한 조슈아. 정말 지겨워 죽겠어. 대체 언제까지 네 왕자님 놀이에 휘둘려야 해? 지금까지 즐긴 걸로는 부족해?"

“······라리사?”

"잘난 조카를 이기고 싶은 네 열등감을 채워 줬잖아? 공주님을 구한 왕자님인 척하며 살 수 있게 해 줬잖아? 씨도 없는 고자의 아내가 되어 줬잖아? 여기서 뭘 더 해 주길 원해, 응?"

화를 못 이겨 발작할 때도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던 라리사는, 지금 저잣거리의 천한 여자처럼 지껄이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조슈아는 주춤 물러났다.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넌 이제 쓸모가 없어. 조슈아 클라멘스. 난 네가 적선하듯 던져 준 인형 같은 삶에 관심 없으니 이만 꺼지라고.“

조슈아는 멍하게 라리사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내가, 내가 당신을 위해서 뭘 포기했는데!"

발작처럼 일어난 분노에 소리치자 갑자기 라리사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배를 잡고 웃던 그녀가 웃음을 뚝 그쳤다.

"말은 바로 해야지. 조슈아. 넌 나를 위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어. 원래 잃을 것들을 포기한 척한 거지.”

“나, 나는…….”

“내게 이용당했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네 욕망을 채워 줬을 뿐이야. 잘난 남자가 되고 싶다는, 세스 엘마이어를 이기고 싶다는 욕망 말이야.”

조슈아는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짓밟으며 다가온 라리사가 그의 가슴을 밀쳤다.

“그리고 너는 내 꿈을 짓밟았지. 네 더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나를 이용만 하고 약속한 것을 주지 않았어.”

"······."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나는 조슈아라는 인간이 아니라 아스트리아의 후계자를 원했다는 걸."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이었지만 조슈아는 허우적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머리가 빙빙 돌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휘청거리는 조슈아를 보고 라리사가 비웃음을 흘렸다.

“아, 그래. 속은 나도 병신이지 하지만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 왕자님이 사실은 자신이 고자임을 숨기기 위해 장식용 아내를 원했다는 걸."

“나,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단 말입니다!"

조슈아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를 보고 입꼬리를 올린 라리사가 속삭였다.

“넌 날 사랑한 게 아냐. 날 사랑하는 척하는 너 자신을 사랑한 거지.”

"······."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 조슈아. 넌 낭만적인 왕자가 아니야. 그저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깨어진 환상 속에서 발버둥을 치던 조슈아는 이내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래도 끝까지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라리사는 코웃음을 치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바로 그때, 비밀 통로가 열리며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편에게 너무 매정한 것 아니냐?"

"주인님! 돌아오셨군요!"

라리사는 반색하며 그것에게 달려들었다. 매정하게 그녀를 밀어낸 그것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버릇이 없어졌구나. 내 물음에 먼저 답해야지?"

"저 지긋지긋한 거머리를 제 남편이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겨우 떼어 낼 수 있어서 행복하답니다.”

“이런 나쁜 아이구나."

그 말과 달리 그것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두루마리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얌전히 기다린 상이다.”

눈 동그랗게 든 라리사가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녀의 얼굴은 곧 의혹으로 물들었다.

"노예 매매 증명서?"

아스트리아의 속국인 티론의 한 항구에서 노예를 거래했다는 증명서였다. 뜬금없는 내용에 의아해하던 라리사는 노예의 이름을 보고 흠칫 놀랐다.

“이건 설마……!"

“그래, 이블린이 어디서 툭 튀어나온 여자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느냐?"

“하, 노예였다니!"

라리사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여자, 제게 더없는 치욕을 안겨 준 이블린의 정체는 바로 속국의 노예였던 것이다!

이걸 알면 제게 절연을 선언했던 귀족들이 어떤 표정을 지울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라리사의 얼굴에 가학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주인님, 제가 이 사실을 폭로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흠, 뭔가 계획이라도 있느냐?"

“이런 재미있는 사실은 모두의 앞에서 터트려야 하니까요. 예를 들어 평화 회담이 열리는 장소라든가.”

”과연, 그럼 내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순간 그것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쳐 지냐갔다. 하지만 이블린을 짓밟을 생각에 들뜬 라리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외교부의 수장이자 왕실 특사인 레너드는 케인 엘마이어의 오랜 친구였다.

사실 레너드도 이렇게 오랫동안 케인과 우정을 이어 나갈 줄은 몰랐다. 그의 기준에서 케인은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성격은 고집불통에, 쉽게 회를 내며, 음울하고 열등감이 심한 데다, 소심하면서도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했다.

그럼 능력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심각한 몸치에 머리도 나쁘고 다른 재능도 신통치 않았다.

"얼굴이 예쁘고 가냘파서 다행이죠. 저런 성격에 못 생기기까지 했으면 진작 친구들에게도 버림받았을 거예요.”

캐서린 공주는 대놓고 케인이 얼굴밖에 볼 게 없다는 폭언을 날렸다.

하지만 삭아서 미모가 사라진 얼굴로 꿍꿍 앓는 모습을 보니, 그건 그거대로 또 측은했다.

“이 친구야. 이렇게 누워 있으면 어떡하나. 어서 정신을 차려야지.”

극장에서 쓰러진 케인은 시름시름 앓으며 도통 일어나질 못했다. 그를 진단한 의사는 마음의 병이라고 했다.

당장 일어나서 아들 앞에 머 리를 박고 용서를 빌지 않으면 훗날이 매우 고달파질 것 같지만. 뭘 어쩌겠는가. 아프다는데.

매번 투덜거리면서도 케인의 한심함을 다 받아 주는 레너드였다. 이젠 거의 습관 같았다.

“레, 레너드.”

그때 꿍꿍 앓던 케인이 겨우 눈을 뜨고 입술을 달싹였다.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친구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케인, 정신이 드나?!"

“물, 물 갖고 와!"

“쉿! 조용히 하게!"

소란을 피우는 친구들을 진정시킨 레너드가 케인을 바라봤다. 케인은 다 죽어 가는 병자처럼 힘겹게 말했다.

"테, 테이블 위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다닥 뛰어간 왕실 보안 관리관 버티가 서류처럼 보이는 것을 들고 왔다. 그것을 받아 든 레너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파양이라 드디어 결심이 선 모양이군.”

라리사 모어를 파양하고 공작 가문의 가계도에서 지운다는 내용이 서류에 적혀 있었다. 케인이 힘없이 레너드를 바라봤다.

"부, 부탁하네."

다음 순간, 뻑 하는 소리가 터졌다. 레너드가 케인의 머리를 거세게 쥐어박은 것이다7 놀란 친구들이 벌떼처럼 회를 냈다.

“자네 미쳤나?!"

"환자를 때리다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다들 조용히 하게!"

호통으로 친구들의 입을 다물게 한 레너드가 케인을 노려보았다. 찔리는 곳이 있는지 케인이 눈을 피했다.

“정식으로 파양 절차를 밟으려면 가주에게 허가를 받은 다음 라리사 모어에게 통보하는 것이 순서네. 자네는 아들과 만나기 싫어서 내게 떠맡기려는 게 아닌가?”

"······."

“아들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 그렇게 힘든가?"

“아니야!"

다 죽어 가던 케인이 버럭 소리쳤다. 이어서 쿨럭쿨럭 기침을 토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부여잡았다.

“그, 그렇지만 아무리 용서를 빌어도 계속 미워할까 봐 무섭단 말이야."

“자네의 아들은 마음이 넓어. 자네에 비하면 바다나 다름없지 일단 용서를 빌어 보고 나서 말하게."

“그럼 이블린은……?"

조심스러운 물음에 레너드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케인은 이블린에게 미움받는 게 무서워서 용서도 벌지 못하고 꿍꿍 앓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처량한 케인의 모습이 꼭 주인에게 버림받은 늙은 고양이 같아서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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