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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11화 (211/240)

211화

* *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스가 옷 입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막 커프스단추를 재우던 세스가 눈을 휘며 웃었다.

“이비, 눈빛이 너무 뜨거워.”

"저, 저요? 아닌데. 눈에 별로 힘 안 줬는데.”

우물쭈물 변명하던 나는 슬그머니 쿠션을 들어 얼굴 을 가렸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세스 등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와, 나 이런 거 좋아하네.'

탄탄한 등과 넓은 어깨, 딱 맞는 흰 셔츠의 조합에 영혼까지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를 들었는지, 눈웃음을 친 세스가 다시 단추에 집중 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운수가 좋지?'

세계 최고 미남이자 조신남인 세스는 내 앞에서도 홀랑홀랑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반드시 파티션을 사용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후에야 나타났다. 하지만 오늘은 뭐 때문인지 셔츠에 바지 차림으로 내 앞을 살랑살랑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잠시 넋을 놓고 세스를 바라보던 나는, 여기 난입한 이유를 떠올리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세스, 정말 괜찮아요?"

"응?"

"같이 연극 보러 가는 거요.”

나는 라리사 모어를 국민 역적으로 만들기 위한 발판으로 이번 무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거기에 세스를 데려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왕실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도록 왕자를 피해자로 묘사하고, 마거릿이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을 추가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과거의 실제 사건이 바탕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세스 상처를 자극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세스가 먼저 연극을 보러 가자고 제안을 해 왔다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던 나는 결국 고민 끝에 세스를 말리기로 결심했다.

“힘든 일을 자처할 필요는 없잖아요. 연극보다는 다른 거 하러 가요. 공원 산책이나 보트를 타러 가도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더 이상은 피하고 싶지 않아.”

내 옆에 앉은 세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직 크라바트를 착용하지 않아서 보기 좋은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흐트러지려는 집중력을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피, 피하다뇨.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지금까지 피한 게 사실이니까.”

쓴웃음을 지은 세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나만 포기하면 폐하도, 선대도, 조슈아도 평온할 거라 생각하니 쉽게 손을 쓸 수가 없었어.”

라리사를 친딸로 생각하는 아버님.

라리사를 위해 왕위조차 포기한 조슈아.

동생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왕까지.

모두 세스 복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그들 때문에 고뇌하던 세스는 결국 라리사 모어의 처분을 미루고 흑막부터 처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한심하지만 더 이상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거든.”

“한심하지 않아요.”

나는 세스 팔에 살짝 몸을 기댔다. 그런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은 세스가 속삭였다.

“지금은 달라. 당신이 있으니까.”

부드러운 손길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이비, 당신은 나를 위해 회를 내고 복수해 주고 싶어 하는 유일한 사람이야. 당신에게 무능한 남자로 보일 바엔 차라리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릴 거야.”

아니, 당신이 무능하면 다른 사람들은 기어 다니는 아메바가 되잖아. 나는 세스 손등에 내 손을 올렸다.

“전 절대로 세스가 한심하다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스 그저 상냥한 거다. 너무나 상냥해서 남들이 버리고 살아온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상냥함에 수없이 구원받았던 나는 세스가 자책하는 게 싫었다.

“그럼 당신이 준비한 무대를 보게 해 줘.”

"충격 받거나 상처받을지도 몰라요.”

"상관없어. 당신이 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

어휴, 진짜. 말로는 도저히 못 이기겠다. 비겁하게 입술로 때려 줘야지.

나는 세스에게 공격적으로 키스했다. 그리고 충동을 이기지 못한 대가로 준비를 마친 세스 품에 안겨서 마차로 옮겨졌다.

* * *

마차가 멈춘 곳은 로열 오페라 극장이었다.

십자매와 함께 톰을 박살냈던 극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한 건물이다.

나는 벌써 극장 앞에 빼곡하게 서 있는 귀족들의 마차를 보고 웃었다. 이쯤이면 충분히 목적 달성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꾸물거려! 밖에서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치여 죽는 줄 알았다.”

먼저 출발한 마차에 타고 있던 아버님이 다가와서 불평했다. 가족동반외출에 들떴는지 투덜거리면서도 묘하게 표정이 밝았다.

‘이쯤이면 위기라는 걸 눈치챌만도 한데.'

아버님은 전에 없이 세스와 함께 외출하는 게 이상하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 나는 눈치라곤 개미 콧구멍만큼도 없는 아버님이 무척 신기했다.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온 거지?'

고집불통 귀족 도련님이 온실에서만 성장하면 이런 모습이 될 것 같았다.

"케인, 여기 있었군!"

그때 마치 범인처럼 불쑥 등장한 아버님의 친구들이 반갑게 인시를 건댔다. 아버님은 내심 좋으면서도 입을 삐쭉거렸다.

“흥, 뭐야 너희도 왔냐?"

“자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고. 우리가 좋은 자리를 미리 잡아 뒀네!"

“아니, 나는 그냥 왜들이랑 같이 볼 건데.”

잠시 저항하던 아버님은 결국 친구들의 등쌀에 떠밀려 극장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외교부의 너구리 아저씨가 내게 다가왔다.

”공작 부인."

잠시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너구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소?"

“네, 굳이 굳이 이렇게까지 하고 싶네요.”

나는 생긋 웃는 얼굴로 또박또박 덧붙였다.

“세상 사람이 다 몰라도 아버님만큼은 진실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마거릿 공녀와 아서 경의 아버지잖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고통 받고 있을 두 사람을 생각하면 아버님의 얼굴에 문신으로 새기고 싶을 정도다.

지금이 행복하니까 모든 것을 덮어 놓자고?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해야 하는가?

“참, 제 남편이 괴롭힘 당할 때도 그 말을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싫은 소리를 건네자 너구리 아저씨도 할 말이 없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오. 그리고 공작께도 정말 면목이 없소.”

세스는 무덤덤하게 고개만 끄덕했다. 너구리 아저씨를 상대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저흰 들어가 볼게요. 참, 아버님이 괜히 아래로 뛰어내리지 않도록 잘 붙잡아 주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든 나는 세스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자리는 당연히 정중앙, 무대가 한 눈에 보이는 박스석이었다.

박스석에 처음 들어와 본 나는 신기한 기분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완전히 폐쇄된 공간은 아니라서 고개를 내밀면 다른 박스석도 보였다.

나는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있는 아버님을 확인한 다음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의 조슈아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라리사 모어는 함께 오지 않았나 보군.’

당연한 일이라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왔으면 더 놀랐을 것이다. 조슈아가 참석한 것도 내 협박 편지 때문이니까.

‘즐거운 관람이 되었으면 좋겠네.'

나는 씨익 웃으며 좌석에 몸을 기댔다. 나와 나란히 앉은 세스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장갑을 끼고 있어서 체온만 전해지는 것이 좀 아쉬웠다.

“곧 공연이 시작됩니다. 관람객께서는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그리고 기다리던 안내와 함께 사람들이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나는 모든 좌석이 꽉 찬 것을 확인했다.

기대해도 좋아, 라리사. 이 무대는 당산을 위한 것이니까.

마침내, 막이 오르면서 귀에 익은 오프닝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수도의 평범한 시민, 조지는 홀린 듯이 무대를 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극장으로 오는 내내 불평했다. 뒷부분이 궁금해서, 그리고 무료라서 오긴 했지만 처음부터 다시 연극을 보려니 지겨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이 오르자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언젠가 나의 왕자님이 날 데리러 오실 거라는 순진무구한 메그의 노래는, 넌 아직 16살이라고 놀리는 아서의 노래와 즐거운 춤으로 이어졌다.

‘연극도 아니고, 오페라도 아니고, 거참 회한하네.'

물 흐르듯 흘러가는 내용과 귀에 쏙쏙 들어오는 노래, 그리고 화려한 무대 배경과 장치들까지 조지의 혼 올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어제 연극을 보지 않았으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겠어.’

음악과 노래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는 귀족들과 달리, 평민들은 사고력이 떨어졌다.

생소한 스토리에 노래와 춤까지 섞이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광장에서 먼저 연극을 접한 덕분에 여유롭게 무대를 감상할 수 있었다.

‘라라, 저 여자는 보면 볼수록 가증스럽군. 꼭 벌을 받아야 할 텐데.'

조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다음 장면을 기다렸다. 그는 아직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장미 정원을 사랑하는 아가씨, 다프네 빌러스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눌렀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옆자리의 빌러스 부인을 불렀다.

“어, 어머니. 이건······."

“쉿!”

검지를 입 앞에 갖다 댄 빌러스 부인은 두 눈을 반짝이며 무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민망함에 입을 다문 다프네는 악마와 춤을 추는 라라를 바라봤다.

‘역시 이건 라리사 클라멘스 백작 부인을 고발하는 내용이야.’

다프네는 오페라글라스로 맞은편에 있는 케인 엘마이어를 슬쩍 훔쳐봤다. 충격을 받았는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백작 부인과 아무 관계없는 나도 충격을 받을 정도 였으니까.’

라라는 벽난로의 부지깽이로 메그의 머리를 내리쳐서 살해한다. 죽어 가는 소녀는 가련한 목소리로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라는 노래를 부른다.

자신이 죽어 상심할 아버지와 곧 돌아올 오빠를 걱정하고 슬퍼하는 내용이었다.

메그를 살해한 라라는 똑같은 멜로디와 다른 가사로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라는 노래를 부른다. 다프네의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가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프네의 머릿속엔 자연스러운 의문이 떠올랐다.

‘정말백작부인이 마거릿 공녀를 살해한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끔찍한 일이었다. 딸을 살해한 범인을 양녀로 삼다니!

무대는 점점 클라이맥스로 흘러갔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서는 산의 이름을 빌려 악마를 베어 버리고,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왕자는 크나 큰 충격을 받는다.

-내가 영원한 맹세를 저버리고, 원수와 결혼했단 말인가!

비탄에 잠겨 부르짖던 왕자는 자기 자신을 저주하며 노래 부른다.

-원수를 끌어안은 손, 원수에게 입 맞춘 입술! 모든 것이 증오스럽고 후회스럽다! 아아, 메고. 내 진실한 신부여. 당신을 안아주러 내가가겠소!

왕자는 독약을 마시지만 죽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 그는 단검을 꺼내 든다.

-서둘러라, 단검이여! 내 가슴이 칼집이니 나를 죽게 해다오!

무대 위에서 헐떡이던 왕자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조슈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너도 이 꼴로 만들어 주겠다는 이블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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