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10화 (210/240)

210화

* * *

"주인님!"

마커스는 오랜만에 보는 이블린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깜짝 놀란 이블린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서 일어나세요, 마커스 씨.”

"흑흑, 너무나 뵙고 싶었습니다."

주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감동을 오해한 이블린이 사과했다.

“일이란 일은 다 떠맡기고 자주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주인님께 봉사하는 것은 제 기쁨인 것을요.”

마커스는 원래 글로리아나 백화점의 총책임자였지만,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얼마 전 사업 총책임자로 승진했다.

공작 부인이 소유한 모든 사업을 운영하는 자리였다.

귀족 중에서도 측근만이 임명되는 곳에 평민인 마커스가 임명되자 반대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빗발치는 우려에도 이블린은 마커스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

"마커스 씨의 능력을 저를 위해 써 주세요. 대신 제가 확실하게 밀어드릴게요.”

말로만 하는 지원이 아니었다. 이블린은 중요한 순간마다 마커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물의 신전, 마탑, 나바르 왕국, 대지의 신전과 같은 무시무시한 물주들을 물어 오고, 새로운 사업과 온갖 아이디어로 실적을 채워 주었다. 자신의 시녀들을 파견해 귀족을 상대하기 어려워하는 그의 약점을 커버해 주기도 했다.

덕분에 마커스는 빠르게 제 영향력을 늘려 갈 수 있었다. 이제 하급 귀족들은 그의 눈치를 볼 정도로 몸집이 커진 상태였다. 지위나 재력 또한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주인님께서 베푸신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의 재능을 발견해 주고 여기까지 이끈 이블린에게 마커스는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하고 있었다.

이블린이 허락한다면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그녀를 찬양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인님께서는 너무나 겸손하신 분이시라 은혜에 감사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시니.’

마커스는 어서 일어나라는 이블린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한참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광장에 나무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지요?"

"역시 마커스 씨는 속일 수가 없네요.”

이블린의 감탄에 마커스는 더할 수 없는 부듯함을 느꼈다 그동안 은밀히 진행해 온 프로젝트를 드디어 주인님 앞에 선보일 순간이니까.

그때 이블린이 뭔가를 눈치챈 듯이 물었다.

“혹시, 그들과 함께 온 건가요?"

"예, 한사코 주인님을 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락에 마커스는 뛸 듯이 기뻐하며 밖에서 대기 중인 자들을 데려왔다.

"주인님, 처음 뵙겠습니다."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들이 다소곳이 인사했다. 모두 똑같은 옷에 똑같은 장신구를 걸치고 있었다.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귀 주변으로 동그랗게 닿아 올려 고정시킨 금발, 보석이 달린 끈을 이마에 드리운 페로니에르, 목선이 사각으로 파인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옷, 부풀린 소매에 수없이 매달린 금색의 리본.

바로 라리사 모어가 사교계에 유행시킨 패션이었다.

“아주 완벽하네요.”

그녀들을 찬찬히 살핀 이블린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하고 있던 여자들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이블린이 동그란 눈에 한껏 힘을 주며 물었다

“이번 역할은 아주 위험해요. 어쩌면 여러분이 그동안 쌓아 온 명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어요.”

서로를 마주 본 여자들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주인님, 저희에겐 명성 같은 게 없습니다."

“이미 극단에서 은퇴한 지 오래인걸요. 바느질이나 허드렛일로 입에 풀칠하던 처지입니다.”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굶어 죽었을 거예요.”

여자들은 극단에서 은퇴한 프리마돈나들이었다.

후원자를 찾지 못하거나 나이가 들어 버림받은 자들은 정말 간신히 먹고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머무를 집과 연금을 제공해 준 이블린에게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욕을 먹고 머리채를 잡히고 무대에서 쓰레기를 맞을 수도 있어요.”

이블린의 경고에 여자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무대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에도 욕을 먹고 희롱당하는 일은 예사였다. 무명이던 시절에는 쓰레기 보다 더한 것을 맞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순진하고 다정한 주인은 진심으로 그들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는 중이었다. 절로 가슴이 따뜻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을 당해도 좋습니다.”

"목이 찢어질 때까지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전 돈을 주고 여러분을 고용한 사람 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돈을 받은 만큼만 일해 주시면 됩니다."

매정하게 선을 긋는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그들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여자들은 자신을 한 인간으로 대해 주는 이블린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번 무대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논란이 일어날 테지만 모두 제가 책임질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최선을 다해 연기해 주세요.”

“부디 믿고 맡겨 주십시오.”

여자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줄 것이다. 그것만이 이블린에게 보답할 길이니까.

* * *

어느 날 갑자기 광장에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무슨 나무가 하루 만에 저렇게 자라?"

"게다가 완전히 처음 보는 종이야. 저게 진짜나무는 맞는 건가?"

그리고 다음 날, 불쑥 나타난 마법사들이 나무 전체에 처음 보는 장식을 달자 관심은 더욱 커졌다.

"마법사들이 뭘 하는 거지?"

"저건 뭐지?"

궁금했지만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던 사람들은 밤이 되자 깜짝 놀랐다. 나무에 매달린 장식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하늘의 별이 내려온 듯한,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에 나무는 단숨에 수도의 명물이 되었다.

거기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자네 그거 들었나? 광장의 주인이 새해가 바뀌는 날에 선물을 나눠 준다고 했다네."

“뭐? 광장에 주인이 있었어? 게다가 선물이라니?"

“나도 몰랐는데 주인이 있었나 봐. 6살부터 12살까지 애들에게 선물을 나눠 줄 거라고 하더라고.”

"공짜로?"

“그렇다니까.”

"거참, 희한한 일이군.”

공짜로 선물을 나눠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러 왔다. 정체불명의 나무도 볼 겸, 선물을 나눠 준다는 곳을 미리 염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치 사람들이 모이길 기다린 것처럼 광장 곳곳에 작은 무대가 설치되었다.

그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이 무대 앞을 서성 거렸다 잠시 후, 화려하게 치장한 금발의 여자가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악단도 없이 웅장한 음악이 시작됐다. 당황 한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사이, 여자가 가냘픈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저예요-당신의 딸, 라라-"

왕년의 프리마 돈나의 노래 솜씨는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났다. 그리고 이블린은 전생에서 유명한 노래를 가져와 새로운 가사를 붙였다.

“제가 당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것은-유모가 절 자신의 아들과 바꾸었기 때문이에요-"

뛰어난 가수가 온 마음을 다해 부르는 멜로디는 사람들을 사로잡기 에 충분했다.

여자는 자신이 막 태어났을 때 유모가 제 아들과 바꿔치기했다고, 그로 인해 지금껏 고생하며 살다가 간신히 제 신분을 알고 아버지를 찾아왔다는 절절한 사연을 노래했다.

많은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그저 아버지로만 부르게 해 달라는 애달픈 가사에 사람들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래한 여자는 우아하게 절을 한 다음 무대를 내려갔다. 사람들은 갑자기 시작되고 갑자기 끝난 깜짝 공연에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몇 시간 뒤, 또 다른I 여자가 무대에 올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이제 여유롭게 공연을 구경했다. 그렇게 그날 하루는 금발의 여자가 부르는 노래가 반복되었다.

다음 날, 무대는 어제보다 좀 더 정교하게 변해 있었다. 마치 연극 배경 같은 모습이었다.

어제 공연을 본 사람들은 기대감에 차서 재빨리 좋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연극의 막이 올랐다.

어느 유서 깊은 기사 가문에 사이좋은 남대가 있었다.

어머니는 막냇동생인 메그를 낳고 몸이 약해져 죽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에 상심해 방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남매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씩씩하게 살아간다.

어느 날 메그는 자신이 몰래 눈을 다친 왕자님을 주워 돌봐 준 사실을 고백한다. 아서는 그는 사기꾼이라 고 믿지 말라는 충고를 던진다.

토라진 메그는 아서와 다투지만 오빠가 기사 수업을 받으러 멀리 떠난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화해한다.

아서는 멋진 기사가 되어서 너를 최고의 레이디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한 채 떠나고, 그 모습을 하녀인 라라가 훔쳐보며 질투한다.

라라는 평생 하녀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린 악마가 나타난다.

악마는 자신과 계약하면 그녀에게 최고의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라라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다.

아서가 돌아오는 날, 라라는 악마가 알려 준 비밀통로로 메그의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메그를 살해한 다음 뒤늦게 도착한 아서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다.

그리고 딸의 죽음에 절망하는 아버지에게 사실 자신이 아서와 바뀐 친딸이라는 거짓말을 한다.

아버지는 처음엔 라라의 말을 믿지 않지만, 신관으로 둔갑한 악마가 증거를 보여 주자 거기에 넘어가고 만다.

아버지는 아서를 저주하고 미워하면서도 만약 라라와 결혼한다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아서는 그것을 거부한 채 전쟁터로 떠나 버리고, 목적을 이루지 못한 라라는 분노한다.

바로 그때, 왕자의 심부름꾼이 도착한다. 그는 눈을 다친 왕자를 구해 주고, 편지로 사랑을 속삭인 아가씨를 찾는다.

라라는 왕자가 찾는 이가 자신이 죽인 메그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악마의 힘을 빌려 왕자를 속이고 결혼 한다.

거기서 갑자기 연극의 막이 내려왔다. 집중해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눈을 껌벅거렸다.

“뭐, 뭐야? 여기서 끝이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옹성거리는 사람들 앞에 간사한 미소를 지은 남자가 나타났다.

“오늘의 연극은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내일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끊어 버리면 어떡해!"

“사죄의 의미로 수도의 모든 극장에서 무료로 내일 이 연극을 상연할 겁니다. 인원이 몰리는 것을 대비해 거리 공연부터 찾아가는 공연까지 아주 다양하게 준비 되어 있으니 모쪼록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항의하던 사람들의 입이 꾹 다물렸다. 값비싼 극장에서까지 무료로 보여 준다니,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럼 뭐 보러 가볼까.”

"맞아. 라라, 그 여자가 망하는 건 봐야 한다고.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악독할 수가 있지?!"

라라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했던 사람들은 배신감 까지 느꼈다. 그리고 꼭 라라가 망하는 것을 보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렇게 이블린의 연극은 단 이틀 만에 수도 전체의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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