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 * *
"네? 의전이요?"
나는 뜬금없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그 늙은이가 뭘 잘못 먹었는지, 꼭 너한테 맡겨야 한다고 부득부득 고집을 부리는구나. 일단 너한테 말이라도 해 보겠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전 국가 의전을 어떻게 치르는지도 모르는데요?"
기껏해야 TV에서 리무진을 호위하는 의장대를 본 것이 전부였다. 형식이고 순서고 진짜 하나도 모른다.
“평화 회담이 정해진 지가 언제인데. 이미 그런 것은 다정해져 있지. 내가 답답한 것도 바로 그 부분이다.”
국빈들을 모시고 어디서 뭘 어떻게 할지 이미 다 정해 놨는데, 무대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왕실 시종장이라는 어르신이 이대로는 못 한다고 깽판을 부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불만이신 건가요?"
"축하 행사 부분을 너한테 맡기고 싶은 것 같다.”
왕의 말에 따르면 내가 저번 연회를 너무 잘해 버린것이 문제였다. 사람들의 눈이 한껏 높아진 상태에서 개인 연회보다 못한 행사를 열게 되면 왕실이 욕을 먹는다는 것이다.
"원래 국가 행사는 좀 지루하지 않나요?"
“지루한 거야 상관없지만, 규모에서까지 상대가 안 되니까 문제지."
왕은 뭘 해도 내가 연 연회를 이길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인정했다. 마탑과 지인들을 갈아서 수월하게 연회를 치렀던 내겐 상당히 찔리는 상황이었다.
“짐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왕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얼렁뚱땅 대형 행사를 떠맡는건······.
‘왜 될 것 같지?'
방금 전까지 더 이상 엉뚱한 짓 벌이지 말라고 마리아에게 된통 깨지고 왔는데. 이걸 받으면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그렇지만 세스랑 막춤 추는 거 좋았단 말이야. 락페스티벌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다만 그때는 내가 아니라 태자가 벌인 판이라서 몇 가지 불만스러웠던 점이 있었다. 그것까지 보완해서 대규모로 판을 벌이면 참 재미있을 것 같은데.
‘헉! 넘어갈 뻔했다!'
저도 모르게 어떤 오프닝이 좋을지 고민하던 나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왕은 내가 곤란해서 거절의 말을 꺼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다정하게 등을 다독거렸다.
“나 또한 너에게 이런 짐을 맡기고 싶지 않다. 늙은이가 너무 난리를 치기에 말이라도 한번 해 보겠다고 약속한 것이지. 정말 미안하구나."
왕은 나를 달래고 선물을 준 다음에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밖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마이어 공작부인!"
그리고 왠지 낯익은 할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뒤늦게 그의 정체를 눈치챘다.
“어, 장미 할아버지?"
나는 세스에게서 왕궁에 숨겨진 비밀 정원을 넘겨받았다. 그곳을 의상부 친구들과 아지트로 쓰곤 했는데, 정원에 자주 드나들다 보니 종종 나무를 돌보는 할아버지와 마주쳐서 가볍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왕실의 정원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니.'
전과 달리 고급스러워진 옷차림만 봐도 그가 고위 귀족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장미 할아버지라는 내 중얼거림을 들은 그가 활짝 웃었다.
“이 늙은이에게 그리 고운 이름을 붙여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혹시 폐하께서 제 부탁을 전해 주셨는지요?"
”으으, 네."
역시 왕실 시종장이었구나.
전생에 나이가 깡패인 나라에서 살았던 나는 저도 모르게 전투력이 약해졌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왕이 서둘러 나를 감쌌다.
"공작 부인은 이미 거절했다. 더 이상 곤란하게 하지 말도록.”
“정말이십니까?"
시종장이 놀란 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음 순간 깊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실 수 없습니까?"
“아이고, 이러지 마세요. 할아버지.”
허둥지둥 손을 내젓는 나를 본 다른 시종들이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공작 부인,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애절하기까지 한 그들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간을 보자는 쪽으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당장 하겠다고 약속드릴 수는 없어요. 우선 현재의 계획을 보고 제가 도와드릴 점이 있나 고민해 보고 싶은데요.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번쩍 고개를 든 시종장이 정말 기뻐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안에 있는 유교걸이 양심을 마구 두들겨 됐다. 으윽, 아버님에게도 패악을 부렸던 내게 이런 약점이 있을 줄은!
그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왕이 갑자기 소리쳤다.
“짐은 싫다! 연회 때문에 바쁘다고 해서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거늘, 회담 따위에 내 귀염둥이를 뺏기다니!"
"회담 따위라니요, 폐하! 사사로운 욕심보다 국익을 먼저 생각하셔야합니다!"
“그냥 전에 하던 대로 해! 형식만 지키면 되지 않아!”
”의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왕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차마 시종장을 이기진 못했다. 가뿐하게 왕을 제압한 시종장이 상쾌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자, 이제 행사장으로 가시지요."
“······예.”
이 할아버지 무섭다. 나는 시종장과 우리 집의 총관 할아버지가 왠지 좀 닮았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나는 세스 집무실을 열심히 기웃거렸다.
“세스, 혹시 시간 있어요?"
오늘도 소처럼 일하던 세스가 펜을 내려놓으며 살짝 웃었다.
“이미 일하던 사람들을 다 내쫓아 놓고?"
“제가 아니라 간식 바구니가 쫓아낸 거죠."
간식 먹고 하라며 바구니를 던지자마자 다들 덥석 들고 도망치는데,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슬금슬금 세스에게 달라붙은 나는 그의 어깨를 안마하듯 조물거리 며 속삭였다.
“사실은요.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엄청 번거롭고 거창해 보이지만,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어서 손만 쪼끔 보면 되는 거거든요.”
이번엔 진짜 참으려고 했는데. 행사장을 둘러보고, 계획표를 살피니 아주 살짝만 건드려 줘도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다는 견적이 나왔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나를 보고 부드럽게 눈을 휜 세스가 물었다.
“어떤 일? 왕실 의전 행사?”
에라이, 이 귀신같은 사람에게 뭘 숨겨. 나는 말을 돌리는 것을 포기하고 세스 목을 꼭 끌어안았다.
"저 해도 돼요?"
"건강이 나빠질 정도로 무리하지 않는다면.”
"연회 때는 춤추다가 몸살이 난 거였다고요."
일은 다른 사람들이 다 해서 힘든 것도 하나 없었는데, 막판에 세스와 함께 춤추다가 육체의 한계선을 살짝 넘어 버린 거다.
하지만 세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당신이 외부인이라고 텃세를 부리는 사람이 있을까봐 걱정이 되는군."
예산도 얼마든지 써도 되고, 필요하다면 누구든 갖다 쓰라는 전권을 허락받았는데. 그걸로 안 되려나?
"혹시 내 힘이 필요하다면 말해 누구든 당신 말을 안 들으면 가서 때려 줄게."
"정말?"
“당신을 위해서라면 왕실 기사단 전체를 때려눕힐 수도 있어."
막강한 신성력을 가진 세스 회복력과 체력이 다른 사람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났다. 왕실 기사단 전체를 두들겨 패겠다는 세스 말이 농담은 아닌 것이다.
“그럼 저랑 같이 가서 기선 제압 좀 해 줘요. 엄청나게 힘든 일을 시켜야 하거든요.”
“어떤 일인데?"
“조별 과제요.”
세스 잘 이해가 안 되는 듯했지만, 이만큼 악독하고 힘든 일도 없었다.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세스 역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보수로 좀 엉뚱한 걸 받았는데 괜찮아요?"
"들었어. 중앙 광장의 땅을 받고 싶다고 했다더군.”
사실 내겐 금은보화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세스가 준 재물도 많았지만, 왕에게서 받은 마광석 광 의 지분 때문에 숨만 쉬어도 돈이 생겼다.
사실 이걸 다 빼도, 황금 십자 훈장 때문에 먹고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재물이 늘어나면 기분은 좋겠지만, 행복은 더 올라가지 않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왕에게 다른 대가를 요구했다.
"거기에 나무를 좀 심고 싶어서요.”
“나무?"
“네, 정령수 말고 아주 평범한 나무요."
나는 세스 관자놀이에 살짝 입을 맞춘 다음 졸랐다.
“지금 같이 심으러 가요.”
* * *
중앙 광장은 내 부탁으로 현재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광장이라고 해서 전생처럼 돌로 포장된 장소는 아니고, 잘 다진 흙바닥이었다.
우리는 날고양이 우유를 타고 광장의 중앙에 내렸다.
우유에게 매달려 빠른 속도를 즐기던 복실 이와 코코가 신이 나서 텅 빈 광장을 우다다 날아다녔다.
“어디 보자. 여기 어때요?"
적당히 양지바르고 정중앙인 것 같은 자리를 고르자 고개를 끄덕 인 세스가 들고 있던 호미로 땅을 팠다.
나는 품속에서 엄지 손가락만한 씨앗을 꺼냈다.
이게 무엇의 씨앗인지는 나도 모른다. 전에 복실이에게 크리스마스트리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데, 복실이가 갑자기 에취! 하고 입에서 뱉어 낸 씨앗이었다.
처음엔 복실이가 먹다가 뱉은 자두 씨앗인 줄 알았지만 전혀 모양이 달랐다. 게다가 세스가 씨앗에서 신성력이 느껴진다고 해서 이 걸 심기로 결정했다.
‘구상나무였으면 좋겠네.'
나는 전생의 크리스마스트리를 생각하며 씨앗을 땅속에 집어넣었다. 영양분이 보충되도록 정령수의 잎을 빻은 가루도 넣고 흙으로 토닥토닥 덮어 줬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할게.”
무엇이든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세스가 씨앗을 덮은 땅 위에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잠시 후, 땅이 부르르 떨리더니 귀여운 떡잎이 쏘옥 기어 나왔다. 나는 이때다 하고 떡잎을 잡은 채로 내 힘을 쏟아 부었다.
‘구상나무가 아니라면 네 이름은 편도 결석이다!'
편도 결석이 되기 싫은 나무의 몸부림이 시작됐다.
우르르 땅이 떨리는 것을 느낀 세스가 잽싸게 나를 안고 뒤로 물러났다.
이내 시커멓게 물든 가지가 위로 솟구쳤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치는 나무를 보고 놀란 복실이가 뻑 소리를 질렀다. 네가 뱉은 거잖아.
한참이나 진동하던 땅이 멈췄을 때는 엄청나게 크고 멋진 나무가 우뚝 자라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카드에나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놀라서 깍깍거리던 코코가 나무 높이만큼 힘차게 날아올랐다가 다시 돌아왔다. 까만 눈이 신이 나서 반짝 거렸다.
나는 녀석을 쓰다듬어 주며 세스를 바라봤다.
"세스,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이 나무는 계속 남아 있겠죠? 몇 백 년, 어쩌면 천 년이 지나도요.”
"······응.“
세스가 아련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황금으로 만든 사과를 꺼냈다. 원래는 나무에 새기는 거지만 그건 너무 잔인하니까.
“그러니까 ‘여기 세스와 이비가 있었다.’고 적어서 나무 밑에 묻어 둡시다.”
-꾸!
-깍!
"복실이랑 코코도 있었다고요.”
나는 두 녀석의 항의에 얼른 덧붙였다. 내게서 사과를 받아 든 세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동안 나는 어디에도 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당신과 함께 영원히 남고 싶어."
-꾸!
-깍!
“그래, 너희도 함께."
세스는 두 아이의 잔소리를 들으며 사과에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넣었다.
여기에 이비와 세스가 있었다.
그리고 복실이와 코코도 있었다.
그가 뛰어난 검사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이거 잘 갖고 있어. 절대 잃어버리지 마라.”
나는 나무에게 황금 사과를 주며 으름장을 놓았다. 잠시 부들부들 떨던 나무는 부리 깊은 곳에 사과를 숨겼다.
언젠가 우리가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수십 번의 환생을 거쳐서 여기로 돌아온다면, 그때 다시 사과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인들이라면 다한다는 역사적인 의식을 마친 나는 뿌듯한 얼굴로 세스와 두 녀석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이제 나무를 꾸미러 가자! 다 함께 장난감 가게로 출동!”
-꾸우우!
-까가각!
여기엔 크리스마스나 새해를 맞이해 나무를 꾸미는 전통이 없지만, 오늘 내가 한번 만들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