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 * *
“아아악!”
라리사는 보이는 모든 것을 던지고 부수며 날뛰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사방을 할퀴다가 손톱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너무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쉬었지만 아무 도 그녀를 말리러 오지 않았다.
"감히! 감히! 천한 것들이!"
자신이 사교계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라리사는 분노로 졸도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주위를 난장판을 만드는 중이었다.
“나는 왕자비야! 왕족이라고! 그런데도 나한테······."
원래라면 이블린도 그녀의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블린은 고작 공작 부인일 뿐이니까. 그런데 멍청한 조슈아 때문에 왕족의 권리를 빼앗기고 이렇게 비참한 꼴로 전락하고 말았다.
“용서할 수 없어······!"
빠득 이를 갈던 라리사는 문득 깨진 거울을 보고 흠칫 놀랐다.
거울 속엔 천사 같은 자신의 모습이 아닌, 창백하고 음울한 귀신 같은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앨리스 모어의 모습이었다.
“꺼져! 왜 죽은 뒤에도 날 괴롭히는 건데!"
비명을 지른 라리사가 손에 잡힌 것을 내던졌다. 술병과 부딪친 거울은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라리사는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난 당신과 달라! 절대 당신처럼 이용만 당하다가 죽지 않아!"
라리사의 어머니, 앨리스 모어는 캐서린 공주의 그림자 시녀였다.
그녀는 미련할 정도로 강직하고 충성스러웠다.
자신의 몸처럼 캐서린 공주를 아끼고, 공주의 자식들 자기 자식처럼 사랑했다. 그리고 끝까지 공주를 지키다가죽었다.
“당신이 그런다고 누가 알아줘? 충성스러운 부하는 부려 먹을 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야!"
라리사는 그런 어머니가 경멸스러웠다.
공주와 닮은 아름다운 얼굴을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앨리스가 조금만 똑똑했어도 자신은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충성을 다하던 자들을 짓밟고 올라갈 거야 내겐 그럴 자격이 있잖아?!"
라리사는 자선이 이렇게 힘든 게 전부 앨리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앨리스가 아니라 더 귀한 태에서, 캐서린 공주의 딸로 태어났다면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멍청한 귀족 아가씨들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행복하게 살아갔을 텐데.
라리사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렇게나 닮았는데 어째서 공주의 딸이 아닌 걸까?
“정말 귀엽구나, 라리사. 라리사도 내 딸 할까?"
라리사는 자신을 보고 활짝 웃던 캐서린 공주를 기억했다. 그녀는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냘프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캐서린 공주를 마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위엄 있는 눈동자에 압도되곤 했다. 그녀에겐 태생적인 고귀함과 지배자의 아우라가 있었다.
라리사는 캐서린 공주처럼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캐서린 공주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반편이였다.
아서는 소심한 데다 동생에 대한 열등감에 찌든 멍청이였고, 마거릿은 그녀가 계단에서 밀치기 전부터 머리가 텅텅 빈 바보였다.
그나마 세스 엘마이어의 능력은 괜찮았지만, 공주와 같은 대범함은 갖추지 못했다.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에 살의가 들 정도였다.
‘그래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짓밟으려고 했는데.'
“이번 연회에서 엘마이어 공작께서 멋진 검무를 선보이셨다더군요. 은퇴하면서 검을 놓으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너무 아쉬울 정도였어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문을 떠올린 라리사는 저도 모르게 뺨에 손톱을 세웠다. 따끔한 아픔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낸 그녀는 다시 이를 갈았다.
‘전부 원래대로 되돌려야 해 '
자신은 저 높고 고귀한 장소로, 세스 엘마이어는 어둠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그러려면 제일 먼저 이블린이 사라져야했다.
라리사는 남은 돈을 모조리 긁어모아 유명한 암살 단체에 이블린 엘마이어를 죽여 달라는 의뢰를 넣었다. 하지만 모두 짠 것처럼 그녀의 의뢰를 거절했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소용없소. 여기 말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거요. 이블린 엘마이어를 죽여 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이는 건 뜨내기이거나 멍청이뿐이오.”
암살자는 한술 더 떠 기분 나쁜 충고까지 던졌다.
“그쪽도 적당히 포기하시오. 내가 알기로 이블린 엘마이어와 부딪쳐서 좋은 끝을 본 사람이 없소.”
암살자들만 믿고 있었던 라리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만 많이 주면 일국의 왕이라도 죽이는 것이 암살자가 아닌가. 그런데 의뢰 거부라니?
‘이블린이 왕보다 더 대단하단 소리야?'
라리사는 이를 악물고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이번엔 흑마법시를 움직이려고 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최후까지 아껴 두려고 했지만, 이젠 물불 가릴때가 아니었다.
“내가 주인님께 받은 명령은 이블린 엘마이어를 주살하라는 것이 아니었소.”
하지만 흑마법사는 차갑게 그녀의 명령을 거절했다. 라리사는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이블린 엘마이어를 치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예요.”
“이제 겨우 현실을 보게 됐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대답은 바뀌지 않소."
"뭐, 뭐라고?"
“내 스승이신 대마법사 라이언 아이오나도 이블린 엘마이어를 어쩌지 못했소. 그런데 누가 감히 그녀를 해칠 수 있단 말이오?"
흑마법사의 얼굴엔 이블린에 대한 경의까지 엿보였다. 라리사는 그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렸다.
"당신의 능력 부족 때문에 핑계 대는 것이 아니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부끄럽지 않소. 왜인지 아시오?"
흑마법사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게 말했다.
“이블린 엘마이어는 신들의 사랑을 받는 총아이자, 운명이 선택한 대전사요. 하찮은 인간은 그녀에게 부딪치는 순간 밀알처럼 갈려 나갈 분이오.”
"······."
“나는 내 주제를 알고 있소. 그러니 위험을 피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소?"
라리사는 너무 화간 나서 또다시 졸도할 뻔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녀는 오히려 한마디도 못 하고 거처로 돌아왔다.
‘이블린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그저 운이 좋아서, 남자에게 귀여움을 받으면서, 지금의 자리를 차지한 하찮은 여자일 뿐인데.
신들의 사랑을 받는 총아? 운명이 선택한 대전사?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건 고작 애완용으로 살아가는 여자에게 붙여질 말이 아니었다.
‘조슈아, 조슈아를 움직여야 해 조슈아에게 이블린을 죽이라고 하면……. '
분노로 눈을 번들거리며 엉망이 된 방으로 돌아온 라리사는 멈칫했다. 방 안의 공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늦었구나."
그녀가 난장판으로 만든 방의 소파에 한 남자가 등을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기사로서 단련된 다부진 체격과 엄숙한 얼굴을 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중년의 남자였다. 하지만 라리사는 처음 보는 그의 얼굴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인님."
캐서린 공주와 같은 눈동자. 고귀하고 사나운 지배자의 아우라. 압도적인 위엄을 발산하는 그의 앞에서 라리사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저를 위해 여기까지 와 주셨군요!”
한때 카스티야의 왕이었고, 이제 비토리오 후작의 몸으로 갈아탄 ‘그것’이 바닥을 기며 울부짖는 라리사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래, 내가 왔으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는 내 말만 따르면 된다."
* * *
“전염병?"
왕이 보기 좋은 눈썹을 찡그렸다. 보고를 올리는 대신의 얼굴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뉴던비 항구에서부터 퍼진 것 같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온몸이 미라처럼 마르고 피부가 검게 변색된 다고합니다. 열과 같은 전조증세는 없고 퍼지는 속도 가빨라서 생존자는 전무합니다.”
마을 단위로 전멸해서 발견이 늦었다는 대신의 말에 왕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진짜 전염병이 맞긴 한가?"
“신전에서도 제일 먼저 저주를 의심해서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흑마법의 기운이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잠시 머뭇거리던 대신이 덧붙였다.
"희생자들의 몸에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마물의 짓일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마물이라니!”
"허어, 어찌 이런 일이……!"
수군거리는 대신들을 저지한 왕이 지도를 가져오게 명했다 하지만 전염병이 번지는 지역과 지도를 대조해도 어느 쪽인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진행 방향이 동시다발적인 것을 보면 특정한 마물일 가능성은 낮지만, 사망자들의 상태를 살펴보면 전염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군."
"으음······.“
어느 쪽으로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때 눈치를 보던 한 대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조사단을 파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산전에서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우리에겐 그보다 뛰어난 추적자가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마물을 상대하는 것에 전문이고요."
속이 훤히 보이는 수작에 왕이 피식 웃었다.
“정체 모를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에 엘마이어 공작을 보내라는 건가? 짐이 먼저 그대와 그대의 가족들을 파견해 주랴?"
“그, 그것이 아니오라…….”
"언제까지 위험한 일이 터질 때마다 공작에게 떠넘길 생각인가!"
왕의 호통에 입을 꾹 다문 대산들이 고개를 숙였다 .
왕이 중대한 임무마다 세스를 파견하는 것은 그에게 후계자로서의 무게를 싣기 위해서였다. 반면 대신들은 공작이 죽어 주길 바라며 위험한 임무에 끌어들이려 했다.
“한 번만 더 이따위 가소로운 짓을 하면…….”
무어라 말하려던 왕이 멈칫했다. 이내 왕의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걸렸다.
“아니, 짐이 직접 벌을 내리는 것보다 엘마이어 공작 부인의 손에 맡기는 것이 좋겠군. 그녀라면 아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처벌을 내릴 테니.”
"허어억!"
대신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엘마이어 공작을 파견하자고 건의한 대신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서 전염병의 원인을 밝히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냐?"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말이야-라는 왕의 중얼거림을 들은 대신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조사단 파견과 별개로 전염병에 대한 구호와 방역 조치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뉴던비 시장에겐 짐이 따로 전령을 보내겠다.”
"영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급한 안건을 해결한 왕이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왕실 의전관이 뛰어 들어와 왕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하라.”
갑자기 중단된 회의에 대신들이 어리둥절해하던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늙은 시종장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섰다. 시녀장이자 손녀인 피오나의 부축을 받은 채였다.
“이 늙은이가 다급한 마음에 어전에 나섰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무슨 일인가?"
왕이 예를 표하는 그를 말리며 물었다. 그러자 희미한 미소를 지온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 간곡히 청하옵니다. 엘마이어 공작 부인이 평화회담의 의전을 맡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