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세스가 느끼는 감정들이 전해져 술에 턴한 것처럼 기분이 알딸딸해졌다.
-띠이이잉!
그때 주크가 자신도 칭찬해 달라는 것처럼 명명 소리를 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을 노려봤다.
“나 몰래 주인에게 돌아가니까 좋아?"
-띵…….
주크가 눈치를 보듯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칭찬을 덧붙였다.
“그래도 멋있었어."
-띠링!
곧바로 기가 살아난 주크가 으스댔다. 정말 주인과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나는 세스 목을 꼭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이제 주크를 손에 들어도 괜찮아요?"
"당신이 있으니까."
세스가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있으면 나도 변할 수 있어.”
순간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나는 세스에게 키스 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서 세스를 덮쳤다간 연회장 한가운데서 기절하는 흑역사를 쌓을 것이 뻔했다. 주변을 획획 둘러본 나는 세스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잘생긴 기사님, 우리 저어기 저쪽에 있는 테라스로 좀 가볼래요?"
“지금?"
세스가 주변을 살폈다.
신나는 공연에 이어서 즐거운 칼싸움까지 본 손님들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이렇게 미쳐 날뛰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호스트가 자리를 비워도 되냐는 뜻이었다.
나는 더 없이 진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진짜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자자, 어서 갑시다."
빨리 가자고 이랴이랴 소리치자 세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안고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나는 멀리서 눈치만 살피는 도튼 자작을 향해 손짓 했다. 이재 본 무대로 넘어가자는 뜻이었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떡인 자작이 시종들에게 준비된 사인을 보냈다.
-데에에엥! 데에엥!
잠시 후, 용장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막 나를 테라스에 내려놓던 세스가 흠칫하며 사방을 경계했다.
나는 그를 슬며시 안으로 잡아당기며 테라스의 문을 닫았다. 할 것 다 해 놨으니 나도 좀 연회를 즐겨야겠다.
* * *
-데에에엥! 데에엥!
웅장한 종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그러자 각방을 지키던 시종들이 소리 높여 외쳤다.
“나비의 방의 시련이 끝났습니다!"
"둥지의 방의 시련이 끝났습니다!"
"퍼즐의 방의 시련이 끝났습니다!"
그와 동시에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고 완성된 작품들이 하나씩 연회장으로 날라졌다.
"왕자님을 위해 준비한 춤추는 하트 나비입니다."
제일 먼저 황금빛 배에 실린 은색의 나무가 나타났다. 나무를 감싸듯 은은한 안개가 솟아올랐고, 수백 마리의 하트 무늬 나비들이 가지에 앉은 재로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색색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가 오므라드는 것만 같았다. 배를 끌고 온 댄서들이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손님들은 그 화려한 광경에 연선 감탄하며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쳤다. 그들 사이에서 새장을 손에 든 사람들이 부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호롤롤로 왕국의 풍경 입니다.”
이어서 해가지는 사막과 신기루처럼 아름다운 도시가 그려진 천 피스짜리 대형 퍼즐이 등장했다.
동시에 애수 어린 선율과 함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덩달아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래가 끝나자마자 둥둥거리는 신나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서남북에 있는 입구에서 거대한 음식상을 짊어진 남자들이 들어왔다.
연회장 안은 순식간에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찼다.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 속에서 시종이 힘차게 외쳤다.
“그리핀의 알로 만든 맛있는 요리입니다.”
왕자의 시종장 역할을 맡고 있는 도튼 자작이 거들먹거리며 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요리를 골라 상석에 바쳤다.
"왕자님, 어서 드셔 보십시오.”
그리핀의 옆구리에 붙어 있던 말라크가 고개를 들었다.
하루 종일 실연당한 왕자 노릇을 하느라 목도 마르 고 배도 고프던 참이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그는 접시를 받아서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작은 중대한 발견을 했다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왕자님께서 웃으셨다!"
"왕자님께서 웃으셨다!"
이어서 시종들이 따라 소리쳤고, 기시들과 댄서들이 돌림노래처럼 ‘왕자님께서 웃으셨다!’를 반복하며 박수를 쳤다.
분위기에 휩쓸린 손님들도 덩달아 박수를 치기 시작 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말에 모두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어서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자작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외쳤다.
“자, 다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춤추십시오! 우리 왕자님께서 미소를 되찾으신 기쁜 날입니다!"
시종들은 사방으로 음식을 나르고 댄서들은 열정적으로 춤을 췄다. 현란한 춤사위에 홀린 손님들도 그것을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며 몸을 움직였다.
"중문을 열어라!"
그때 정원으로 향하는 중앙 문이 활짝 열리며 나무들마다 환한 빛이 꽃처럼 피어났다. 동시에 돌바닥에서 가느다란 물줄기들이 분수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들은 정원에서 물놀이를 즐기셔도 됩니다!"
"좋다! 간다!"
자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자가 기다렸다는 듯 정원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물방울을 마구 튀기며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저희도 갑니다!"
주군의 모습에 흥분한 사막의 전사들도 거기에 동참 했다. 물을 맞으며 미친개처럼 뛰어다니는 그들의 모습에 홀린 사람들이 하나둘 부나방처럼 몸을 던졌다.
“우와악! 차가워!"
"꺄악!”
처음엔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도 나중엔 막춤을 추며 날뛰었다.
“아하핫! 더 크게 북을 울려라!"
“신난다!”
이국에서 열리는 것 같은 연회, 즐겁고 유쾌한 볼거리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흥겨운 분위기가 그들을 취하게 만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개판이야?"
남편과 달콤한 밀회를 즐긴 이블린이 돌아왔을 때는 상상 이상의 개판이 벌어져 있었다. 자신이 이 개판에 일조했다고 생각한 세스가 헛기침을 했다.
“내가 어떻게든 말려 볼게.”
“아뇨, 이럴 땐 말리는 것보다 장작을 넣어야죠.”
이블린은 남들이 개판을 칠 때 잘한다고 박수를 치는 성격이었다.
“음악을 좀 바꿔야겠네."
이블린은 지나가는 시종을 불러 지시했다.
"봉인된 음악 3번으로 바꿔 줘."
”……예? 그, 그것을요?"
“지금이라면 괜찮아.”
이블린이 술 취한 사람처럼 날뛰는 손님들을 가리켰다.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시종이 사라졌다.
잠시 후, 정원의 스피커에선 고막을 찢을 것 같은 날카로운 선율과 광광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거 참 신나는군! 전장이 생각나!"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는 사람들과 달리, 태자는 망둥이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가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자 거기에 자극을 받은 전사들도 펄떡 거렸다.
그리고 점차 적응이 된 사람들도 덩달아 팔팔 뛰기 시작했다.
”와, 이게 되네.”
그들을 보며 이블린은 악마처럼 웃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음악도, 흥분한 상태에선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비?"
불안감을 느낀 세스가 그녀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다시 평소의 귀여운 얼굴로 돌아온 이블린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자요, 우리도 가서 즐겨야죠!"
"······."
세스 도저히 아내의 요청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블린과 함께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그날의 연회는 늦게까지 계속됐다.
사람들은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다가 연회장으로 돌아와 차가워진 몸을 녹이며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 기운이 회복되면 다시 뛰쳐나가 날뛰는 것을 반복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던 사람들은 새벽이 되어서야 실신해서 집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몸살감기로 침대에 드러누워 꿍꿍 앓기 시작했다 너무 신나게 논 후유증이었다.
이블린은 사흘이 지나도 일어나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몸살 감기약을 선물로 보냈다. 정령수의 잎을 빻아서 만든 약을 먹은 사람들은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휴, 죽는 줄 알았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가까스로 운신을 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작은 모임을 열어 이블린의 연회에 대해 떠들었다.
“정말 환상적인 연회였어요. 태어나서 그런 화려한 연회는 처음이었을 정도로요."
"역시 풍작가라고 해야 하냐 수준 자체가 달랐죠.”
"장식품이나 시종들까지 다 진짜처럼 보이더군요. 꼭 사막의 왕국을 여행하는 느낌이었어요."
모두가 처음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기에 말하고 싶은 것이 수백 가지는 되었다. 입 아프게 떠들던 사람들은 아쉬움에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제 평생 그런 연회에 다시 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겠죠. 공작 부인께서 다시 연회를 열지 않는 이상은요.”
“다시 열어 주시면 좋을 텐데.”
이블린의 연회에 다녀온 뒤에는 무엇을 봐도 재미가 없고 시시하게 느껴졌다. 이 증세를 사람들은 ‘이블린 앓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이블린과 비교당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이 파티와 무도회를 몽땅 취소해서 추억팔이 외엔 할 것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이블린 앓이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저희 남편은 오늘도 방에 틀어박혀서 나비 새장만 들여다보고 있답니다.”
“사실 저도 그리핀의 말랑말랑한 앞발이 눈앞에 어른어른 떠다녀요.”
"저는 그때 선나게 춤추고 먹고 마셨던 것들이요. 요즘은 꿈에서까지 나와요."
이블린의 연회가 사교계에 던져 준 충격은 굉장했다.
엄청난 규모부터 이국적인 현실감과 내용의 짜임새, 거기에 재미까지 어느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완벽한 무대였다.
사람들은 이블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그녀가 자신들과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교계의 폭군은 모두의 위에서 군림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문 들으셨어요?"
"무슨 소문이요?"
그리고 폭군에겐 희생양이 필요한 법이었다.
"연회 중간에 갑자기 공작 부인께서 암살자들과 싸우는 무대가 있었잖아요. 그게 공연이 아니었대요."
"공연이 아니라니? 진짜 암살자였단 말인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초대장을 위조해서 숨어 들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공작 부인께서 때려서 쫓아낸 거래요."
“세상에!"
사람들의 눈빛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말을 꺼낸 여자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서 흥미를 돋웠다.
"더 놀라운 사실이 뭔지 아세요? 그때 두들겨 맞고 쫓겨난 사람이 바로 클라멘스 백작 부인이었대요!"
"클라멘스 백작 부인이라면…….”
“엘마이어 공작님과 파혼한 그 여자요?"
“어머, 뻔뻔하기도 해라. 공작 부인께 맞아서 쫓겨날 만했네요!“
사람들의 눈에 번득이는 빛이 스쳤다.
라리사 모어에게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떨던 자들도, 그녀에게 밉보여 호된 꼴을 당했던 자들도 기회는 이 때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라리사 모어를 씹어 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