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작지만 차돌 같은 주먹이었다. 달려오는 속도를 더해 있는 힘껏 후려치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 되었다.
라리사는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귓가에선 삐-하는 이명이 들리다가 사라졌다.
"무, 무슨······!"
얼굴을 맞았다는 충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코에서 뜨거운 것이 흐르기 시작했다. 황급히 코 밑을 더듬은 라리사는 쌍코피가 터졌다는 것을 알았다.
‘가, 감히 내 얼굴을!'
번쩍 고개를 든 라리사가 이블린을 노려봤다. 그사이 훌쩍 뒤로 물러난 이블린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반가움을 담고 있는 얼굴과 달리, 루비 같은 붉은 눈에선 광기가 느껴졌다. 순간 주춤했던 라리사는 이를 악물고 어떻게 대응할지 머리를 굴렸다.
그녀에겐 아름답고 가련한 피해자로 보일 수십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쌍코피가 터진 채로는 아무리 예쁘게 눈물을 홀려 봤자 추해 보일 뿐이었다.
‘당장 비명을 질러야 해! 그래서 이블린을 미친 여자로 만들어야해!'
최고의 무기인 눈물이 봉인당한 라리사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몸을 낮춘 이블린이 한 바퀴 회전하며 라리사의 발목을 걷어찼다.
"꺄아악!“
라리사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바닥에 부딪친 등과 엉덩이, 뒤통수가 참을 수 없이 아팠다. 그래도 주저앉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놀란 표정으로 굳어진 사람들을 본 라리사는 순간 교활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서둘러 이블린을 몰아 갈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블린이 한 박자 빨랐다.
“암살자다! 암살자다! 왕자님을 노리는 암살자다!"
주먹을 높이 치켜든 이블린이 크게 세 번 소리쳤다. 라리사가 그 같잖은 수작을 비웃으려는 순간이었다.
-두둥두둥! 둥둥둥! 두두둥!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회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왕실 기시들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은 이블린의 뒤에, 암살자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은 라리사의 뒤에 섰다. 그리고 꽃잎과 색색의 가루를 뿌리며 다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뭐, 뭐야?!"
라리사는 당황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와 장식은 암살자의 것과 비슷해서 한 세트 같았다. 자청해서 무대 의상을 입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 뭐야 공연이었어?"
“깜짝 놀랐네.”
갑자기 공작 부인이 사람을 두들겨 패자 놀라 얼어붙었던 사람들도 웃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라리사는 자산을 둘러싸고 빙글빙글 도는 암살자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외쳐도 요란한 북소리와 우렁찬 노랫소리 에 묻혀 버렸다.
그리고 기시들에게 양쪽에서 번쩍 들리며 포인트 안무까지 선보인 이블린은 커다란 주먹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는 막대기를 들었다.
제법 멋지게 막대기를 붕붕 돌린 이블린인 라리사를 가리켰다.
"암살자를 해치우고 왕자님을 지켜라!"
”와아아!”
가검을 뽑아 든 기사들이 일제히 암살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블린도 막대기를 휘두르며 라리사를 후려갈겼다.
"타구봉법!"
"까아악!“
사정을 봐주지 않고 내려치는 대에 라리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 요란하게 쓰러지는 암살자들이 많아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너를 패기 위해 내가 돈을 썼다!”
“그만! 아악! 하지 마!"
“사양하지 말고 깽값을 받아라!"
라리사는 비 오는 날에 먼지가 날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사람들은 이블린을 말리기는커녕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든 라리사는 엉금엉금 기어서 달아났다. 이블린은 봐주지 않고 그녀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허우적거리던 라리사는 연꽃이 피어 있는 수반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자 빠르고 긴박한 음악이 끝나며 가볍고 밝은 리듬이 시작되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암살자들이 벌떡 일어서서 라리사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라리사는 저항하려고 애썼지만 이블린에게 하도 두들겨 맞아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에이 씨, 진짜 사람 귀찮게 하네."
"준비는 했는데 이걸 추게 될 줄은 몰랐지.”
암살자 차림을 한 창공 기사들은 투덜거리며 라리사를 끌어냈다. 그들은 바깥에 준비된 마차에 그녀를 던져 넣었다.
“멀쩡해 보이는 분이 왜 이런 짓을 합니까? 초대장 위조해서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모릅니까?"
"다음엔 마차도 없이 정문에 버려 놓을 겁니다."
으름장과 협박을 번갈아 늘어놓은 기시들이 꽝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라리사는 목적지를 묻는 마부를 무시하며 이를 갈았다.
‘감히! 감히! 내게 이런 수치를 주다니!'
축축하게 젖은 머리, 온몸에 달라붙은 꽃잎과 가루, 욱신거리는 코와 몸 곳곳의 통증, 귓속에서 왱왱 울리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박수소리까지.
무엇보다 꼴좋다는 듯이 자신을 깔아 보던 여자들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하찮은 것을 내려다보는 미소. 유모의 딸이라고 자신을 비웃던 추잡한 것들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라리사는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광대처럼 차려입고 개처럼 두들겨 맞은 것을 생각하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라리사는 부러진 손톱으로 마차의 시트를 움켜쥐었다.
‘죽여 버리겠어! 반드시 죽일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라리사의 눈이 증오로 번들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이블린을 처참하게 죽이기 위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어휴, 속이 다 시원하네!'
나는 뻐근한 팔을 휘적거리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갑자기 나타난 라리사 모어를 보고 얼마나 반갑던지.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 뻔했다.
혹시나 해서 걸어 둔 덫에 철커덕 걸려들다니. 서비스 정신이 아주 투철한 악당이셨다.
‘이만하면 인사 정도는 됐나?'
바닥에 엎어 놓고 작신작신 밟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첫인사라고 치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앞으로 아서와 마거릿의 몫까지 아주 천천히 괴롭혀 주지!'
세스 몫의 원한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라리사의 앞날에 부비트랩을 꽃피워 줄 생각이었다.
“멋진 춤이었습니다."
그때, 베일로 얼굴을 가린 나바르의 태자비가 다가와 마실 것을 건댔다. 나는 그녀가 내민 잔을 받아 들며 눈을 찡긋했다.
"좋은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이죠.”
라리사가 사라진 후 연회장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무대를 내려가자마자 곧바로 사막의 전시들이 올라와 화려한 춤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저쪽도 굉장하네요. 아주 무대를 찢어 버리셨다.”
그중에서도 제일 펄펄 날아다니는 태자를 가리키자 태자비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최근 힘든 일이 많으셔서······.“
“아니에요. 여기까지 도와주러 오신 건데. 저야 두 분한데 감사할 뿐이죠.”
내가 태자비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사실이었다.
좀 더 실감 나는 테마 파크를 위해 궁의 가구와 시종, 악단과 댄서들까지 빌려 달라 부탁한 것이다.
덕분에 고증까지 완벽한 테마 파크가 완성되었지만, 전혀 원하지 않던 사람이 딸려 왔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춤을 추고 있는 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즐거워 보이시니 다행이네요.”
테마 파크를 만든 내가 다 뿌듯할 정도로 태자는 지금 이 순간을 줄기고 있었다.
“그러네요. 저렇게 신이 나신 모습은 처음 봅니다.”
베일 밑으로도 태자비가 환하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건 정말사랑이다. 저 신 미치광이 같은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며 웃다니. 진실한 사랑으로만 가능한 콩깍지였다.
그때 태자가 갑작스레 춤을 멈추더니, 어딘가를 향해 도발적 인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구경하던 사람들 이 양옆으로 물러서면서 세스가 나타났다.
"······어?"
잠깐, 세스가 왜 여기에 있지?
놀이공원 같은 거 안 좋아할 사람이라서 연회장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혹시 내가 라리사 모어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봤나?
이미지 관리에 실패한 것에 놀라 버벅거리는 사이에 세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대로 올라갔다. 나는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랐다.
"저, 두 분이 무대에서라도 겨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차마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태자비가 미안한 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상석에서 허둥지둥 일어서는 말라크를 향해 주먹을 콱 쥐어 보였다. 그리핀의 아래에서 빛의 창을 꺼내던 말라크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왕자 역할로 돌아갔다.
-둥두두둥! 둥!
긴장감을 더하는 북소리와 함께 태자와 세스가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나는 세스가 든 검이 주크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다시 한번 놀랐다.
-띠잉!
진정한 주인의 손에 들린 주크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세스는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주크를 손에 쥐지 않았다. 내게 건네주기 위해 집어 든 적은 있어도, 무기로서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엔 주크가 싫어서 거부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저주받은 검. 대지의 신전에서 쫓겨나게 만든 원흉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세스 과거를 안 뒤로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가 주크를 창고에 처박은 것은 조슈아를 벤 후였다. 세스는 검을 든 자신을 거부하고 있었던 거였다. 원하지 않았음에도 가족들을 해친 자신을.
그럼에도 다시 주크를 잡은 건…… 그의 심경에 변화가 있다는 뜻이겠지.
“자, 그럼 한번 어울려 볼까?"
태자가 신이 나서 세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세스는 어렵지 않게 그의 검을 막아 냈다.
창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검이 오갈수록 세스가 무섭도록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검을 들고 있는 세스가 너무 눈부셔서 마음이 아팠다.
세스가 어린 나이에 성기사단장 후보가 된 건 뛰어 난 재능 외에도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내던질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때 태자비가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천으로 옮기지 않아도 그녀의 불안함과 초조함이 손에 잡힐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들이란 꼭 어린애 같죠? 누가 더 센지 꼭 겨뤄 보고 싶어 한다니까요."
”······그러네요."
내 말에 태자비가 겨우 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 순간, 둥둥 울리던 북소리가 뚝 끊어지면서 태자가 훌쩍 뒤로 물러섰다.
“도저히 못 이기겠군. 내가 졌다!"
태자의 항복과 동시에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세스는 기사의 예를 표한 후에 주크를 집어넣었다. 그 동작까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이비.”
성큼성큼 다가온 세스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승리자답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나도 당신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어.”
“세스는 항상 멋진걸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또다시 한 꺼풀을 벗은 게 느껴졌다. 이러다 진짜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옆에서 태자가 앙알거리며 태자비에게 자신을 위로해 달라고 떼를 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심히 거슬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세스 이마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