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 * *
보일 남작은 하트 무늬 나비를 잡는 임무를 맡았다.
"엄마는 둥지의 방으로 갈게 그리핀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거든.”
“그럼 제가 퍼즐의 방으로 갈게요!"
아내와 딸이 한 박자 빨랐기 때문이다. 아내처럼 그리핀을 보고 싶었던 남작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다 같이 다니면 안 되나?"
“나눠서 해야 빨리 끝나죠.”
“아버지, 힘내세요!"
가족들이 훌쩍 떠나자 남작은 터덜터덜 나비의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작은 새장과 잠자리채를 내밀었다.
“새장에 넣은 나비는 가져가셔도 됩니다."
“고맙소.”
그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빨리 하트 무늬 나비를 잡아서 나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나비의 방으로 들어간 순간, 공기가 확 바뀌었다.
신선한 나무의 향기와 큼큼한 이끼 냄새가 뒤섞여 기분 좋게 코를 간질였다.
은빛의 나무들이 끝도 없이 늘어선 공간. 어두운 조명과 뭉게뭉게 피어오른 안개가 꼭 새벽의 숲을 헤매는 느낌을 주었다.
‘나비는 어디에 있지?'
안개 속에서 오색의 빛 덩어리가 떠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한 남작은 반사적으로 채를 휘둘렀다.
그러자 뭔가가 채에 걸려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황금색과 붉은색 , 검은색이 뒤섞인 화려한 무늬가 있는 나비였다.
‘하트 무늬가 아니네.’
남작은 채를 찢을 것처럼 파닥거리는 나비를 얼른 꺼냈다. 손에 잡히는 느낌이 얇고 부드러운 종이 같았다. 진짜 나비가 아닌 마법 생물인 듯했다.
‘대체 돈을 얼마나 쓴 거야?'
마탑이 이블린의 노예라는 것을 모르는 남작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와! 호랑호랑나비!"
나비를 놓아주려는 순간, 가까이에서 탄성이 터졌다. 깜짝 놀라 돌아본 남작은 안개 속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사람들을 발견했다.
"희귀도로 별 세 개짜리잖아?"
“우와, 저게 있긴 있었네.”
다들 부러운 듯 남작의 손에 잡힌 나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소리를 지른 남자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저, 혹시 좀 더 가까이에서 나비를 봐도 될까요?"
“그럼요.”
남작은 자연스럽게 새장에 나비를 집어넣었다. 그는 가슴을 짝 펴고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희귀도라는 건 어디서 봅니까?"
부엉이를 닮은 동그란 얼굴과 고양이를 넓은 뾰족한 귀, 벨벳처럼 반들반들 윤이 나는 털.
솜방망이 같은 앞발과 솜털이 뽀송뽀송한 날개, 길 고 유연하게 꿈틀거리는 털 꼬리.
남부에 서식하는 숲 그리핀의 특징이었다.
독수리를 닮은 바위 그리핀과 달리, 부엉이와 닮은 귀여운 얼굴의 녀석들은 꼬르륵 꼬르륵 울며 사람들을 흘리는 중이었다.
“그, 그리핀 최고!"
남작 부인은 거대한 어묵 꼬치를 흔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핀들은 어묵 꼬치를 꽉 물었다가 놓으며 그녀와 놀아 주고 있었다.
몇 마리는 〈그리핀 간식〉이라고 적혀 있는 통을 돌아보며 애교를 부렸다. 그리핀들에게 주머니를 다 털리고 구석으로 밀려난 희생자가 울부짖었다.
“이 악마들, 간석이 있을 땐 나를 사랑한다고 하더니!"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때, 텅 빈 바구니를 든 요리사가 난처한 얼굴로 사람들을 불렀다.
“저, 여러분 이제 슬슬 왕자님께 갖다 드릴 타조알을 꺼내 주셔야 하는데요."
사실 이 그리핀들은 함정이었다. 이들을 뚫고 들어가 둥지에 있는 그리핀을 유혹해서 알을 홈쳐 내는 것이 사람들의 임무였다.
"구치만 애들이 너무 귀여운걸요.”
“이 예쁜이들에게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그러나 그리핀들에게 홀린 사람들은 아예 이 방에 뿌리를 내릴 기세였다.
-고르륵 고르르!
“웅웅, 우리 이쁜이. 간식이 맛있어요?"
어쨌든 다들 행복해 보이긴 했다.
퍼즐의 방은 다른 곳과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거대한 천 피스짜리 퍼즐은 빛의 속도로 맞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방에 모인 사람들은 퍼즐의 완성보다는 다른곳에 더 관심이 많았다.
“모든 증거가 말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보물은 바로 여기에 있어!"
”에이, 아까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꽝이네, 꽝!"
바로보물찾기였다. 퍼즐을 맞출 때마다 튀어나오는 작은 단서들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보물을 찾고 있었다.
난이도는 조금 높았지만 방 탈출로 단련된 이들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찾아낸 보물들이 제법 비싼 마도구나 마법 스크롤이었다. 돈이 있어도 선뜻 손에 넣기 힘든 물건들이 툭툭 튀어나오자 다들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퍼즐의 방울 가득 채웠다.
“자매님들 오셨군요."
그리고 장미 정원의 회원들에겐 또 다른 특전이 있었다. 바로 비밀스러운 굿즈가 숨겨진 보물지도였다. 그들은 퍼즐의 방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다음 가면을 쓴 재로 모여들었다.
“다들 연장은 챙겨 오셨나요?"
“그럼요, 물론이죠.”
“오늘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모두의 눈에 굿즈를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남작의 딸, 몰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시죠."
그들은 그림자처럼 연회장을 빠져나와 바람처럼 정원으로 스며들었다.
* * *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달리 라리사 모어와 록웰 부인은 인생의 쓴맛을 느끼고 있었다.
제일 먼저 등불을 든 안내인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헤매느라 넘어지고 뒹굴길 수차례 둘은 간신히 모닥불에 모여 있는 사막의 상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 연회장으로 안내하라는 라리사의 명령 에 상인들은 갑자기 화를 내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그곳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야시장에선 그들이 지나가자마자 물건이 쏟아지는 바람에 도둑으로 몰려 쫓겨 다녔고, 길을 물어보려고 춤추는 사람들을 방해했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라리사는 부독부독 이를 갈았다. 사막에서 온 촌것들에게는 그녀의 신분이 통하질 않았다. 아예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그녀만큼이나 엉망진창이 된 록웰 부인이 지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라리사는 이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물러선 게 들키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사교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싶어요?"
이블린에게 이기지 못해 도망쳤다는 소릴 듣는다면 죽어도 붙을 감지 못할 것이다. 라리사는 록웰 부인을 재촉해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채로 겨우 호숫가에 도착했지만, 남아 있는 것은 낡고 삐걱거리는 보트 하나뿐이었다. 할 수 없이 그것을 타고 노를 저었지만, 중간에 보트가 가라앉는 바람에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허우적거리는 둘을 지나가던 경비병이 발견해서 건져 냈다.
"죄송합니다. 중간에 무슨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둘은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겨우 연회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에선 흥겨운 음악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에 주눅이 든 록웰 부인이 중얼거렸다.
“이런 모습으로 참석하는 건 무리예요.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
현재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진창이었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곱게 꾸민 모습은 간데없었다. 젖은 몸에선 이상한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
얼굴에 착 달라붙은 머리를 쓸어 넘긴 라리사가 짜증스럽게 명령했다.
"들어가서 하녀를 찾아와요.“
”예?”
“하녀 몰라요? 연회 때 손님들의 치장을 도와주는 하녀가 있잖아요. 가서 찾아오라고요."
록웰 부인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이런 모습으로 연회장에 들어가란 말인가? 하지만 라리사는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둘 중 하나가 회생해야 한다면 당신이 희생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니, 어떻게 그런…….”
“싫어? 내 후원자가 될 때 이런 각오는 안 했나 봐?"
라리사가 뱀처럼 싸늘한 눈으로 록웰 부인을 바라봤다. 협박이 담긴 눈빛에 록웰 부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선택지를 주죠. 여기서 창피함을 당하고 하녀를 불러오든가, 나중에 아들과 함께 사교계에서 매장당하든가. 어느 쪽이 좋겠어요?“
록웰 부인은 라리사의 옆에서 그녀가 얼마냐 음험한지 지켜보았다. 라리사는 자신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얼마든지 남을 나락에 빠트릴 수 있는 인간이었다.
‘애초에 손을 잡은 것이 잘못이었어.’
록웰 부인은 라리사의 후원자가 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지금이라도 그녀와의 관계를 끊고 싶었다.
"좋아요. 지금 당장 하녀를 찾아오죠. 대신 그 뒤에는 저 혼자 돌아가겠어요."
“마음대로 해요.”
라리사는 피식 웃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록웰 부인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수치와 분노로 얼굴을 굳힌 록웰 부인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라리사는 근처의 벤치에 우아하게 걸터앉아 하녀가 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연회장 안에서 아름답게 치장한 소녀들이 나왔다.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소녀가 라리사의 앞에 멈춰 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저는 공작 부인의 시녀인 안나라고 합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응, 실수로 호수에 빠져 버렸어. 갈아입을 옷을 빌릴 수 있을까?”
라리사는 순진한 척 웃으며 안나라는 시녀를 훑어봤다. 그녀의 교활한 시선을 안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씻으실 물과 옷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라리사는 따뜻한 물로 씻고 준비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검은색이었지만 처음 입고 왔던 옷보다 더 화려하고 눈에 띄었다.
‘멍청한 이블린, 손님용 드레스를 이렇게 화려하게 준비해서 어쩌자는 거지?'
그사이 안나는 그녀의 머리를 정성껏 틀어 올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장신구를 달아 주었다.
"급하게 해서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라리사는 자신의 미모를 돋보이게 해 주는 드레스가 퍽 마음에 들었다. 옷감은 싼 티가 났지만, 디자인에서는 나무랄 곳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 있게 일어섰다.
“그럼 연회장으로 안내해 주겠니?"
공손히 고개를 숙인 안나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라리사는 그녀의 뒤태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시녀가 저렇게 화려하게 꾸미게 내버려 두다니. 역시 순진하고 멍청한 여자야.’
귀부인들은 시녀들의 옷차림을 엄격하계 단속한다. 시녀가 남편을 유혹해서 바람을 피울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자신이라면 얼굴에 회초리를 내려쳐서 시녀들에게 제 주제를 깨닫게 해 줬을 것이다. 라리사는 낮게 혀를 차며 안나의 뒤를 따랐다.
연회장에 가까워질수록 활기가 느껴졌다. 라리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이블린을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환한 미소가 역겨웠다.
“아, 이블린 난 너처럼 순진해 빠진 애를 보면 짓이겨 주고 싶어.”
“예?”
라리사는 뒤를 돌아보는 안나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그리고 우아한 걸음으로 안나를 지나 이블린에게 걸어갔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라리사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이블린을 향해 속을 긁어 줄 말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앗!“
갑자기 이블린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이국에서 일가친척을 만났을 때처럼 반가움이 가독 담긴 얼굴이었다.
‘뭐야? 내가 누군지 몰라? 설마 다른 사람으로 착각 하나?’
당황한 라리사가 멈칫하는 순간이었다. 환한 얼굴로 달려온 이블린이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삐억! 소리와 함께 라리사의 머리가 크게 휘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