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 * *
아스트리아의 수도, 호라이의 시민들은 둥-하고 땅 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 번은 착각인가 했지만 계속해서 둥둥 소리가 울리자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뭐야? 지진인가?"
그들은 하던 일올 멈추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기웃거렸다. 요즘 들어 카스티야 왕국 쪽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좋지 않아 다들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 없나?"
"수도 경비대는 뭐 하는 거지?"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불만을 표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다급하게 달려오며 소리쳤다.
"청혼 행렬이 오고 있다!"
“······청혼?”
“그게 무슨 소리야?”
"국왕 폐하께 청혼하는 행렬이 오고 있다니까!"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사람들이 좀 더 자세히 물으려 했지만, 그는 청혼 행렬이라는 말만 외치면서 지나 가버렸다.
“우리 폐하께 청혼하러 왔단 말인가?"
"맞아, 폐하께선 아직 결혼을 안 하셨지?"
위험한 일이 아니라는 것에 안심한 사람들이 흩어지려던 그때였다. 색색의 깃발을 든 건장한 남지들이 등장해서 소리를 질렀다.
"호롤롤로의 막내 왕자, 말라크 전하의 행차요. 모두 길을 비키시오!"
“길을 비키시오!"
사람들은 황급히 길 양쪽으로 비켜서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잘 못 들었는데 어디 왕자래?"
"홀롤로? 처음 듣는 곳인데?"
"옷을 보면 사막 왕국 쪽인가 봐.”
특이한 복장과 번쩍이는 장신구, 그리고 휘날리는 이국적인 깃발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것조차 잊고 말았다.
"저기 온다!"
그리고 마침내 화려한 행렬이 나타났다.
-두우웅! 두웅!
그림자 기사들이 밤새도록 거리 곳곳에 설치해 둔 스피커에서 웅장한 음악이 터져 ㄴ왔다. 동시에 하늘에서 아름다운 꽃잎이 소낙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호롤롤로의 금지옥엽~ 우리 막내 왕자님~ 용맹한 아스트리아 국왕님께 청혼하러~ 하얀 사막 건너 여기까지 왔다네~!"
절도 있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창공 기사단에서도 미모로 선발된 청년들이었다. 잘생긴 청년들이 꽃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우와아······!"
이어서 등장한 수많은 금은보회를 실은 수레와 코끼리들의 행렬은 모두를 열광시켰다. 왕자님의 시종으로 분장한 이블린은 선두의 코끼리 위에서 사방으로 돈을 뿌리고 있었다.
“우리 왕자님을 큰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천공신의 선녀 때는 위엄을 해친다는 이유로 코끼리가 등장하지 못했다. 이블린도 멀리서 구경만 해야 했다. 그것이 무척 아쉬웠던 그녀는 소원대로 코끼리를 타고 행진에 참가해서 신이 나 있었다.
“우와아아! 왕자님 만세!"
"까아아아!“
사람들은 떡밥에 몰려드는 붕어처럼 자지러지며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쳤다. 난생처음 보는 구경거리에 다들 펄쩍펄쩍 뛰며 행렬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들의 환영을 받는 호룰롤로의 왕자, 빛의 창의 주인인 말라크는 반쯤 넋을 놓은 채로 제일 큰 코끼리에 실려 가고 있었다.
‘내가 왜······? 어째서 이런 일이?'
다행히 공포에 질린 그의 표정을 사람들은 청혼을 앞둔 청년의 수줍은 긴장 정도로 받아들였다.
“폐하께 장가오실 왕자님이 잘생겼네! 아주 참해!"
“껄껄, 폐하께서 참 좋아하시겠어!"
수인족의 지나치게 예민한 귀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다 들렸다. 말라크는 당장이라도 코끼리 등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어쩌려고 이러는 건데!'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떠는 그와 달리 정작이 미친 짓을 벌인 이블린은 신이 나서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왕궁이 가까워질수록 말라크는 너무 겁이 나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말려! 지금이라도 이 미친 짓을 말리라고!'
그는 하늘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저 높은 상공에서는 그리핀들이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리핀을 타고 있을 엘마이어 공작은 아내의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부부가 쌍으로 미친 것 같았다.
‘아악, 아스트라이아시여! 여기에 번개라도 쳤으면!'
말라크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행렬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왕궁의 앞에 이르렀다.
왕궁의 정문인 ‘지혜의 문’ 앞은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웅장한 음악을 연주하던 행렬이 멈추자, 왕자의 시종장 역할을 맡고 있는 귀족이 앞으로 나서서 소리 높여 외쳤다.
"호롤롤로의 왕자이신 말라크 전하께서 아스트리아의 국왕 폐하께 청혼을 하러 오셨소. 당장 문을 여시오!"
문을 지키는 기사들은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멋모르고 속아 넘어간 시민들과 달리 고들은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도, 도튼 자작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학 누가 도튼 자작이란 말이오!"
도튼 자작은 유명한 코끼리 애호가였다. 집을 찾은 손님들에게 애지중지 키운 코끼리를 보여 주는 것이 고의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그리핀의 등장으로 아무도 코끼리를 찾지 않아 낙심하던 차에 이블린에게 캐스팅을 받은 것이다.
“뭣들 하시오! 당장 폐하께 우리 왕자님이 오셨다는 소식을전화지 않고!"
호롤롤로 왕자의 시종장 역할을 맡은 그는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유세를 부렸다.
기사들은 난감해하며 코끼리 위에서 손을 흔드는 이블린을 바라봤다. 사기꾼이라며 쫓아내기엔 상대의 정 체가무려 공작부인이었다.
그사이 행렬을 따라온 사람들이 기대 어린 얼굴로 떠들었다.
“이제 폐하께서 마중 나오시려나?"
“어어, 저기 누가 나온다!"
사람들의 말처럼 지혜의 문이 열리며 점잖게 차려입은 대신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선두에 선 이는 고목처럼 나이가든 왕실 시종장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나선 시종장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스트리아의 태양이신 국왕 폐하의 말씀을 대신 전하겠소.”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확성 마법을 통해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호룰롤로의 왕자, 말라크여. 그대의 아름다운 마음은 고마우나, 짐은 이미 국가와 혼인하였다. 하여 그대의 청혼을 받아 줄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
당연히 해피엔딩을 기대하던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하지만 시종장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짐은 몸과 마음을 이 나라와 백성에게 바칠 것을 맹세했다. 국가가 짐의 아내이자 남편이다. 그러니 그대는 서둘러 본국으로 귀환하길 바란다. 이것이 폐하의 전언입니다.”
막 코끼리에서 내려온 말라크는 왕과 마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크게 휘청거렸다. 그것을 실연에 대한 상처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낮게 소리를 질렀다.
얼른 말라크를 부축한 도튼 자작이 왕자의 말을 듣는 척했다. 그리고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리 왕자님께서는 아스트리아 국왕 폐하의 높으신 뜻을 받들기로 하셨습니다. 다만, 선물들은 국왕 폐하를 흠모하는 마음에 가져온 것들이니, 양국의 우애를 위해 부디 거두어 주실 것을 청하옵니다.”
"국왕 폐하께 왕자님의 깊은 뜻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시종장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행렬 사이에 있던 금은보회를 실온 수레들이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것들은 왕실에 바치는 그리핀 런의 세금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들은 왕자의 진심에 가없어했다. 마침 스피커에서는 쓸쓸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요란한 뿔피리 소리와 함께 황금색 사자기를 든 기시들이 나타났다
질서정연하게 말을 멈춰 세운 기시들 중 가장 앞에 있던 네빌 경이 위엄 있게 소리쳤다.
“나의 주인이신 엘마이어 공작 부인께서 호롤롤로 왕국과의 깊은 우애를 기려 말라크 왕자님을 모셔 오라 명하셨습니다. 왕자님께선 잠시 프리지어 궁에서 지치신 몸을 쉬어 가심이 어떠신지요?"
이번에도 말라크의 의향을 묻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도튼 자작이 크게 답했다.
“엘마이어 공작 부인의 깊은 우정에 감사드리며 잠시 몸을 의탁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마이어의 문장이 새겨진 황금 빛 마차가 나타났다. 말라크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얼굴로 도튼 자작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행렬은 다시 용장한 음악과 함께 떠났다. 사람들은 아쉬워하며 그들을 배웅했다.
”폐하께선 얼굴도 안 보여 주고 거절해 버리셨네."
"어차피 차일 거 얼굴 보면 더 마음 아프지, 뭐."
“그래도 공작 부인께서 거두어 주셔서 다행이야. 아니면 꼼짝없이 문전박대당한 꼴이었을 텐데.”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화려한 볼거리와 즐거운 음악, 그리고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스토리를 감상한 그들은 저도 모르게 잔뜩 들떠 있었다.
‘빨리 가서 집사람에게 이야기해 줘야지.’
‘애들이 들으면 좋아하겠는데!'
그들은 저마다 이야기보따리를 풀 사람을 떠올렸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이블린의 연회에 참석하기로 한 모든 귀족들은 두 번째 초대장을 받았다.
§변경 사항알림 §
금일 연회는 호롤롤로 왕국의 말라크 왕자 전하를 위한 실연 위로연으로 변경되었음을 알립니다. 부디 참석하시어 위로연의 자리를 빛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주의사항
- 연회장의 온도가 높은 편입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참석해 주십시오.
- 옷이 젖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사오니 갈아입을 옷을 지참하시길 권장합니다.
갑작스러운 변경에 사과드리며 모쪼록 호롤롤로 왕국의 이국적인 연회를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초대장을 받아 든 귀족들의 머릿속에선 거의 비슷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올 것이 왔군.’
‘어쩐지 조용히 넘어간다했다!'
그들 중 호롤롤로 왕국이 어딘지 의아해하는 애송이는 없었다. 이블린을 겪으며 강하게 단련된 귀족들은 왕까지 끌어들여 펼치는 이 대규모 컨셉 연회를 즐길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그리고 이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웃기지도 않는 유치한 짓을 하네.”
다른 가문에서 빼앗은 초대장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라리사가 중얼거렸다. 가장 찌증· 나는 것은 이런 엉터리 놀음에도 사람들은 헬렐레 좋아할 거라는 점이었다.
‘재미있으면 아무 상관없다는 머저리들'
고상한 척하던 귀족들이 이블린이 뭔가 할 때마다 넋이 빠져서 박수를 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 망쳐 놓고 싶었다.
"저, 그런데 초대받지도 않고 이렇게 연회에 참석해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후원자인 록웰 부인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사교계가 유해졌다지만, 그건 이블린이 일으킨 변화에만 해당되는 소리였다. 여전히 초대와 참석에 대한 규칙은 엄격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자리에서 나를 쫓아낼 수 없을 테니.”
일단 참석만 해 버리면 된다. 그것을 위해 라리사는 제 신분을 숨길 마도구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다.
"불청객을 쫓아내겠다고 소란을 피우는 것만으로도 연회는 망가질 테니까. 알아도 참을 수밖에 없겠죠."
라리사는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절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이번에 깨닫게 해 줄 생각이에요.”
그리고 연회의 밤이 시작되었다.